"두 사람이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했습니다"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 ②> 후광 김대중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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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31  16: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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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 기획> 통일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
6.15공동선언과 함께 탄생한 <통일뉴스>가 어느덧 창간 1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보수정권의 집권으로 남북관계는 6.15공동선언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길을 찾기 어려울 때, 다시 떠나왔던 출발점들을 되짚어 보는 일도 의미있는 일일 것입니다. 지금보다 결코 녹록치 않았을 당시에도 통일의 거보를 내딛어 스스로 통일의 초석을 쌓았던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역사를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큰 결단, 그리고 뜨거운 가슴과 구체적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문익환, 김대중, 정주영, 윤이상,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각 분야에서 우뚝 솟은 이정표가 될 인물들입니다.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이들과 함께 웅대한 통일의 꿈을 한번 꾸어 봅시다.
<통일뉴스> 창간 15주년 기념공연은 11월 4일 오후 6시 30분 서울여성플라자 아트홀봄에서 열립니다. /편집자 주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 2000년 6월 14일 평양 목란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사진출처-김대중평화센터]
"여러분,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남북 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올렸다.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다시 연출해야 했다. 마침 장내에 카메라 기자가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2(2010.8)』 298쪽.
2000년 6월 14일 저녁 8시 평양 목란관 만찬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6.15 공동선언' 타결 소식을 전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포즈를 취했다. 전세계가 주목한 역사적인 사진이 탄생한 것이다. 1970년대부터 '3단계 통일론'과 '공화국연합제'를 주창해왔던 후광(後廣) 김대중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진 순간이기도 하다.  
6.15 공동선언은 △자주의 원칙, △남북 통일방안 수렴,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다방면의 교류.협력 활성화, △당국 대화 개최에 합의하고, 김 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남측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만찬장에 참석했던 고은 시인은 자작시 「대동강 앞에서」로 이 자리를 경축했다.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 2000년 6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 캡쳐.
당시 국정원장으로서 막후 협상을 담당했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직접 김대중 대통령을 영접한 순간을 2000년 6월 정상회담 기간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반갑게 악수하며 첫 상봉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특히, 김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나란히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분열을 받는 모습은 너무도 감격적이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한민국 국군 총사령관인 대통령이 아직도 법적으로는 '전쟁상태'인 적군의 의장대를 사열하고 분열을 받다니,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피스메이커 개정증보판(2015.6) 62쪽』 
그도 그럴 것이 당초 예정됐던 방북을 이틀 앞둔 6월 10일, 북측은 돌연 일정을 하루 연기해달라고 요청해 남측을 당혹케 했다. 박지원-송호경 간 「4.8 합의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고 돼 있었다. 김 대통령은 "다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55년을 기다려왔는데 하루 더 기다릴 수 있는 것 아니오"라고 참모들을 위로했다. 
임동원 전 장관에 따르면, 막후 협의과정에서 북측은 김 대통령의 출발 시간과 동선 등 세부사항이 공개된 것을 문제삼았다. 북측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이 김 위원장 신변안전이었다는 것. 이 때문에, 그는 북측의 연기 요청을 '김정일 위원장이 공항 영접을 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6월 14일 오후 정상회담 중간 휴식시간, 김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제목, 기사, 광고 없이 전날 공항에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은 사진만을 실은 2000년 6월 14일자 <경향신문> 1면을 가리키며 "이런 신문은 처음 봅니다. 이 자체가 얼마나 상징적입니까"라고 말했다. 
6월 15일 오찬장은 전날의 감격이 고스란히 이어졌다. 김 위원장은 "이제는 6월이라는 달이 민족의 비극이 아닌 내일에의 희망의 달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하겠다"는 전날 김 대통령의 만찬사에 화답하는 조치를 잇따라 취했다. 조명록 차수가 북한 군부를 대표해 '6.15 공동선언' 지지를 밝히도록 하고,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오늘 12시부로 전방에서 대남 비방 방송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고 말했다. 정상회담의 주역 중 한 명인 박지원 문광부 장관의 제안에 따라 참석자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6.15 시대 
임동원 전 장관은 1998년에서 2007년에 이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를 "민족의 희망을 세운10년"으로,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현 박근혜 정부까지를 "남북관계가 역주행"한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통상,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남북 당국간 대화와 인적왕래, 교류협력이 활발했던 시기를 '6.15 시대'라고 부른다.
이를 알리는 첫 가시적 조치가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이다. 1985년 이후 15년 만에 남측 가족 102명이 평양으로 가서 북에 있는 가족 218명을, 북측 가족 101명이 서울로 와서 남측 가족 750명을 만났다. 남측은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송환했다. 6.15공동선언 3항이 이행된 것이다.
9월 14일 남측 임동원 국정원장과 북측 김용순 노동당 비서가 서울에서 7개항의 고위급 특사 합의문을 발표했다. △김정일 위원장에 앞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서울 방문, △국방장관회담 개최, △적십자회담 개최, △경제협력 실무접촉 개최, △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기공식 개최, △북 경제시찰단 파견, △임진강 수해방지 공동조사 실시 등이다. 
9월 15일 호주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남북 선수단이 아리랑 연주에 맞춰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공동 입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대한 행진이었다"고 회고했다. 9월 18일 경의선 연결 기공식이 열렸다. 24일에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 수뇌부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었다.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은 청와대를 찾아 김 대통령을 예방했다.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북.미 사이에 공동코뮈니케가 채택됐다.
김 전 대통령이 주도한 화해.협력 흐름은 국내외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한국민의 93~98%가 "정상회담에 만족한다", "남북 공동선언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해 10월 31일 유엔총회는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12월 10일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군나르 베르게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은 군나르 롤드크밤의 시를 인용해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라고 김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칭송했다.
6.15 시대만의 특별한 면모는 몇 가지 통계(『2014 통일백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00~2007년까지 남북 사이에는 정치.군사.경제.인도.사회문화 분야 당국 회담이 238회 열렸으며, 169개의 합의서가 채택됐다. 반면, 이명박 정부(2008년에서 2012년) 시기 당국 회담은 21회, 합의서는 7개뿐이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에도 당국 회담 24회(22회가 개성공단), 합의서 7개에 불과했다.
2000~2007년까지 남북 3,829가족이 평양과 서울, 금강산에서 상봉했다. 당국 차원의 대북 식량차관 지원은 2000~2007년 사이에만 8,728억원이 집행됐다.
1989~1999년까지 남북을 오간 총 인원은 19,944명에 불과한 반면, 2000~2007년까지는 총 139,270명이 왕래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5.24조치'가 취해진 이후에는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사이의 인적 왕래가 끊기다시피했다. 2007년 20억 달러에 이르렀던 남북 교역은 '5.24조치'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끊겼다. 
'통일지향적 평화체제'를 위하여
  
▲ 2009년 6월 11일 마지막 공개 강연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현직에 있을 때 부시 미 행정부 내 네오콘 세력의 대북 강경책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했던 김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퇴임 이후에도 결연하게 안팎의 역풍에 맞서 '햇볕정책(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지켜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이 가장 큰 시련에 처했던 시기는 단연 2006년이다. 2005년 9월 19일 6자회담 공동성명은 미국의 BDA 제재로 첫 단계에서 제동이 걸렸다. 2006년 6월 하순으로 예정됐던 김 전 대통령의 방북도 취소됐다. 북한은 그해 7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햇별정책 탓'이라는 보수층의 거센 공격에 노무현 정부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자, 김 전 대통령이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10월 10일 전남대 강연에서 "우리는 1994년 이래 일괄타결을 주장해왔으나 부시 정권이 이를 외면하다가 오늘의 실패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이날 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도 "포용정책이 무슨 죄가 있나"면서 "죄 없는 햇볕정책에 북한 핵실험을 갖다 붙이는 데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입장을 표했다. 한달 뒤,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부시 미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전환했다.
2009년 6월 11일 '6.15 공동선언 9주년 기념 특별강연'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력히 충고하고 싶다"며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이 합의해 놓은 6.15와 10.4를 이 대통령은 반드시 지키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슴 아파하면서 "과거 50년간 피 흘려서 쟁취한 10년간의 민주주의가 위태롭지 않느냐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라고 호소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공개연설이었다. 
  
▲ 2009년 8월 21일 북측 김기남 비서가 김정일 위원장을 대신해 김 전 대통령 영전에 꽃을 올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김 전 대통령(1924.1.6 生)은 2009년 8월 18일 새벽 1시 43분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19일 조전에 이어 김기남 비서를 단장으로 하는 특사조의방문단을 보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북 화해의 장을 마련했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그 모멘텀을 이어가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하기 전날인 7월 12일 작성했던 미공개 연설문의 제목은 '9.19로 돌아가자'였다. 이 시기 김 전 대통령의 지향점과 관련, 임동원 전 장관은 "남북연합이 '통일지향적 평화체제'를 관리하며 '사실상의 통일' 상황부터 실현하고 완전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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