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비상입법기구’가 만들었을 끔찍한 세상
전두환 ‘국보위입법회의’의 부활··· 친윤 입법의원 임명해 독재 맞춤형 무더기 입법
- 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 발행 2025-01-30 14:45:52

최상목에 쪽지 건네
국회 예산 차단하고
비상입법기구 예산 편성 지시
윤석열이 최 부총리에게 한 지시는 예산을 끊어 국회의 권한을 무력화하고 국회를 대체할 새로운 입법기구를 창설하는 것으로 12.3 비상계엄이 위헌이고 내란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윤석열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차은경 판사와 탄핵심판 과정에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윤석열에게 비상입법기구와 관련한 질문을 던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파장을 잘 알기 때문에 최 부총리가 국회에서 2번이나 윤석열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증언했음에도 윤석열은 자신이 작성하지도, 전달하지도 않았다면서 부인했다.
시민의 저항과 계엄군들의 머뭇거림, 그리고 야당 국회의원이 중심이 돼 국회 표결을 통해 계엄령을 해제하면서 비상입법기구는 설치되지 못했다. 만약 윤석열이 의도한 대로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입법기구를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미 1980년 전두환이 비상계엄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만들어 독재의 길을 닦았던 역사를 경험했다. 이를 바탕으로 비상입법기구를 통해 윤석열이 만들려 한 끔찍한 세상의 실체를 알아보자.
전두환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처럼
윤석열이 만들었을 ‘비상입법기구’도
친 윤석열 인사들로 구성됐을 것···
석동현 윤갑근 전광훈 등이 입법 의원?
전두환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비상계엄과 함께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의사당을 봉쇄했다. 보안사령부는 비상계엄 직전 주요 정치인들을 잡아들이며 사전 작업에 나섰다. 포고령을 통해 정치활동도 금지했다. 전두환은 행정부 역할을 대신할 임시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고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이를 통해 행정부를 장악했고,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위해 만든 기구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980년 8월 27일 11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두 달 뒤인 10월 27일 전두환은 국보위를 통해 만든 5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 등 전두환 독재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개헌이었다. 헌법 부칙을 통해 10대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다. 정계, 학계, 종교계, 여성계 등 81명으로 구성된 입법회의 의원들은 전두환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채웠다.

윤석열의 비상입법기구도 전두환과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만 차이는 있다. 1987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사라졌기 때문에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통해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 그래서 윤석열은 국회를 봉쇄하고, 여야 주요 정치인을 체포해 국회를 마비시키려 했다.
아울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부정선거를 밝히겠다는 명분으로 계엄군을 보냈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방법사는 선관위 직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야구방망이에 망치, 송곳, 안대와 포승줄, 수갑으로 사용할 케이블타이까지 준비했다. 고문과 같은 강압적 수사로 부정선거 증거를 조작하고, 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며 국회를 해산하려 한 것이다.
국회를 해산한 뒤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선거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정계, 학계, 종교계 등에서 친 윤석열 인사들을 뽑아 비상입법기구를 구성했을 것이다. 지금의 내란 수사와 탄핵 정국 속에서 윤석열을 변호하고 있는 석동현·윤갑근 등의 변호사와 전광훈을 비롯한 아스팔트 극우들도 입법 의원으로 뽑혔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세력 정치활동 금지한
전두환의 ‘정치풍토쇄신법’처럼
윤석열도 ‘반국가세력 정치금지법’
제정했을 수도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980년 10월 28일부터 1981년 4월 10일까지 156일 동안 활동한 한시적 입법기구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만든 법안은 무려 215건에 이르렀다.
입법회의를 구성한 지 1주일도 채 안 된 11월 3일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었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부패나 혼란에 현저한 책임이 있는 자에 대한 정치활동을 규제함으로써 정치풍토를 쇄신하고 도의정치를 구현하여 민주정치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로 만들어진 이 법안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다. 대통령이 임명한 쇄신위원들이 정치인을 심사해 정당 가입은 물론 출마, 지지 및 반대 행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3김’을 비롯해 전두환이 반대세력으로 지목한 정치인 500여 명의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윤석열도 비슷한 법안을 만들었을 것이다. 윤석열은 “북한 공산세력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힌 바 있다. 여러 차례 국회가 반국가세력에게 장악됐다고 이야기했고, 반국가세력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했다.
윤석열이 평소 주장해온 대로 반국가세력의 활동을 금지한다는 명분으로 법을 만들어 반국가세력이라고 낙인찍은 야당 정치인과 일부 여당 정치인의 정치활동을 금지했을 것이다. 국회를 해산한 뒤에도 자신을 반대할 만한 정치인들이 다시 정당을 결성하거나, 후보로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제3자 개입금지’ 등
전두환의 ‘노동개악’처럼
노동개혁 부르짖던 윤석열도
노동권 후퇴 시도했을 것
전두환은 1980년 12월 31일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각종 노동 관련법도 개악했다. 이때 개정된 법안은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근로기준법, 노동쟁의조정법, 노사협의회법, 노동위원회법 등이었다.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인 노동삼권을 제약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기 어렵게 만들었고, 가뜩이나 열악했던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더욱 나빠졌다.
노동자가 회사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유니언숍’(union shop) 제도를 없앴다. 노동조합은 산별에서 기업별 노조로 전환했다. 단체교섭의 위임을 금지했고, 제삼자 개입금지 조항을 만들어 노동조합이 외부 단체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했다. 아울러 국가·지자체·국·공영기업체 및 방위산업체의 쟁의행위를 금지했고, 쟁의행위도 사업장 이외의 다른 장소에선 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이러한 전두환의 노동법 개악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등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을 통해 하나씩 바로 잡았다. 하지만,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노동개혁을 부르짖어 온 윤석열의 행보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2023년 신년사에서 “가장 먼저, 노동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의 성장을 견인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변화하는 수요에 맞춰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바꾸면서 노사 및 노노 관계의 공정성을 확립하고 근로 현장의 안전을 개선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럴싸한 표현들이지만 이른바 ‘강성노조’의 힘을 빼고, 기업이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막기 위해 기업이 각종 손해배상 소송에 쉽게 나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을 것이다. 노사법치주의라는 명분으로 화물연대와 건설노조에 대해 검경을 동원해 총공세를 벌였던 것과 같은 노동조합 압박이 전방위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해 노동관계법을 개정해 노동권을 후퇴시켰을 것이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이후
관제야당 만들며 친 전두환 국회 세워
윤석열 비상입법기구 이후
친 윤석열 국회 통해 1당독재의 길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 11대 국회가 임기를 시작하며 마무리됐다. 입법회의는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그 영향은 오래 이어졌다. 국민의 직접 투표를 통해 구성된 11대 국회도 입법회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풍토쇄신법으로 유력 정치인의 활동이 막혀있었고, 전두환은 자신에게 충성할 준비가 된 이들에게만 정치활동을 허락했다. 이렇게 정치인을 길들였고, 11대 국회는 집권당인 민주정의당과 전두환 정권이 세운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등이 의석을 차지해 사실상 1당독재와 다름없었다. 국회가 구성됐지만, 사실상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계속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윤석열의 비상입법기구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전두환처럼 216개의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의 무리를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법안만 처리한 뒤 자신이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은 정치인만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면 비상입법기구 이후 들어설 23대 국회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의원들로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두환처럼 관제야당까지 만든다면 손쉽게 뜻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친 윤석열 국회를 통해 마음껏 자신이 원하는 법률을 만들고,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은 채 절대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윤석열의 내란이 성공한 뒤 비상입법기구를 통해 만들었을 세상을 상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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