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지 못한 법을 옹호하고, 자신의 조국을 함부로 여기거나 조국이 짓밟히는 것을 보고 있는 자는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다”
- 피델 카스트로, 1953년 최후 진술에서
반군을 놀라운 승리로 이끈 후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50년간 통치하면서 10명의 미국 대통령과 맞섰던 쿠바의 전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향년 90세로 타계했다.
그의 친 남동생 라울 카스트로(84) 국가 평의회 의장은 국영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형이 25일 밤 10시 29분에 세상을 떠났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했다.
남미부터 아프리카까지 존경받았던 혁명가
미국 플로리다 주로부터 불과 145킬로미터 떨어진 섬나라를 통치한 카스트로는 1961년 미국의 피그만 침공과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이듬해의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적 인물이 됐다. 수염이 상징이었던 카스트로는 치명적인 미국의 경제봉쇄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암살 계획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건강문제로 라울에게 권력을 이양한지 8년 만에 숨을 거뒀다.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수감되는 등 그의 쿠바 혁명은 대실패로 시작했지만, 1959년 1월에 혁명이 결국 성공하면서 카스트로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남미의 역대 최연소 지도자가 됐다.
이후 카스트로는 수십 년간 남미부터 아프리카까지 세계 각국의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롤모델이 됐고 그들을 열심히 지원했다.
노동절을 맞아 하바나의 혁명광장에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2006.5.1ⓒAP/뉴시스
카스트로는 흔들림없이 사회주의를 추진했다. 심각한 위장병으로 2006년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라울에게 넘기고 2008년 대통령직을 마지막으로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그의 세력은 약화됐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저항적 이미지는 트레이드 마크였던 코이바 시가를 끊고 그의 큰 몸집이 구부정해진 이후에도 강렬하게 남았다.
“사회주의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카스트로의 외침은 서구식 민주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중국과 베트남 등의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이후에도 지속됐고, 1,100만 인구의 ‘마르크스주의적’ 쿠바는 경제적 어려움을 내재한 ‘별종’으로 남았다.
다만 카스트로는 살아 생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지켜볼 수 있었다. 2014년 12월 17일 라울과 오바마 미 대통령이 1961년 이후 단절됐던 외교적 관계를 복구하기로 했던 것이다. 카스트로는 침묵을 지키다가, 한달 후 공개 서신을 통해 그의 평생 적이었던 미국과의 이 역사적 합의를 조심스럽게 축복했다.
22세의 간호사인 다이얀 몬탈보는 “비극”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녀는 “우리 모두 카스트로와 함께 자랐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속보에 가슴이 정말 아프다”며 슬퍼했다.
미국과 대결한 반세기
게릴라 시절의 피델 카스트로(가운데). 피델이 자신의 연인이자 동반자였던 셀리아 산체스(피델의 뒤쪽)이 쳐다보는 가운데, 산적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을 신문하고 있다. 사진은 1958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안에 있던 게릴라전 기지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AP/뉴시스
피델 카스트로 루스는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의 사탕수수 지대에서 태어났다. 스페인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 아시스는 스페인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며 미국의 설탕회사들에서 일했다. 그러나 친미정부가 들어서자 앙헬은 모든 것을 그만두고 자신의 농장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카스트로는 기독교 학교들을 다니다가 아바나 대학에 진학해 법학과 사회과학 학위를 받았다. 학생운동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후 변호사로 활동했던 그는 1953년 쿠바 동부에 있는 산티아고 시의 몬카도 병영을 무모하게 공격하면서 반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했던 대부분의 동료들은 사망했고 카스트로는 라울과 함께 수감됐다.
카스트로는 당시의 최후진술을 외부로 빼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여기서 나왔다.
노동계와 학생들의 시위 격화와 심각한 경제난이 겹치며서 독재 정권은 15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카스트로를 1955년에 특별 사면한다. 멕시코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혁명군을 조직해 1956년 그란마 함선을 타고 쿠바에 상륙해 바티스타 정부군과 전투를 치렀다. 그는 정부군의 공격으로 상륙 도중 수많은 동료를 잃었지만, 민중의 지지위에서 게릴라의 숫자를 늘리며 이후의 교전에서 연승하며 쿠바 동부의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기지를 구축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3년 간의 내전 끝에 결국 무너졌고, 혁명군을 이끈 카스트로가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하자 수십만 명이 아바나 거리에 쏟아져 나와 환호로 그를 맞이했다.
미국은 쿠바의 새 정권을 인정한 첫 국가들 중 하나였다.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싶다는 카스트로의 말을 조심스럽게 믿으려 했던 것이다.
혁명 직후 미국을 찾은 피델 카스트로가 당시 부통령이던 닉슨과 회담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의 표정은 긴장된 쿠바-미국관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긴장되어 있다. 1959.4.19ⓒAP/뉴시스
그런데 몇 달 되지 않아 카스트로는 본격적으로 친 민중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토지개혁으로 외국인의 농지 소유와 내국인의 농지 소유 면적을 제한하고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줬으며 판사와 의원들의 연봉을 삭감하고 하위 공무원의 임금을 인상했다. 빈곤층의 월세를 반으로 줄였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강변했고 자신의 정권이 사회주의 정권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멕시코 망명 시절 처음 만난 체 게바라를 중앙은행 총재 및 산업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자들을 임용하기 시작하자 서방의 견제가 시작됐다.
카스트로의 혁명은 쿠바를 넘어 남미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오만한 미국인들에 맞서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국인의 대부분은 대지주의 토지 몰수와 미국 조직폭력배의 축출, 그리고 그들이 운영하던 카지노들의 폐쇄에 환호했다.
라 쿠브르(La Coubre)호 폭발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행진하는 쿠바의 지도자들. 쿠바 정부는 라 쿠브로호 폭발 사건이 미국정부의 소행이라고 비난했다. 왼쪽부터 피델 카스트로,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쿠바 대통령, 체 게바라가 쿠바 정부의 장관들과 함께 행진했다. 1960.3.5ⓒAP/뉴시스
6시간까지도 이어졌던 카스트로의 연설들은 쿠바 생활의 배경음악이 됐고, 269분간 이어진 그의 1968년 유엔총회 연설은 50여 년간 유엔의 최장 기록이었다.
카스트로가 소련과 가까워지자 미국은 그를 축출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쿠바의 주된 수입원인 설탕의 수입을 대폭 축소하자, 카스트로는 미국 자산 10억 달러를 동결하면서 이에 반발했다. 분개한 미국은 무역제한조치를 통해 식량과 의약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미국 제품의 쿠바 수출을 금지했고 1961년 1월 결국 쿠바와 국교를 단절했다.
같은해 4월 16일,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임을 선언했고, 바로 다음 날 취임한지 3개월도 안 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CIA를 시켜 쿠바 망명자들을 주축으로 한 용병부대를 쿠바로 보냈지만, 이 ‘피그만 상륙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망신을 당한 미국은 이후 쿠바 침략을 포기했지만 대신 카스트로 제거를 꾸준히 시도했다. 쿠바와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쿠바 망명자와 미국 정부가 꾸민 카스트로 암살 계획은 630건이 넘는다고 한다.
미-소 냉전의 최대 위기는 1962년 10월 케네디가 쿠바에 소련 핵미사일이 있다며 쿠바 해역을 봉쇄하면서 발생했다. 일주일 동안의 외교로 위기는 막을 내렸지만, 핵전쟁의 가능성이 그렇게 높았던 적은 없었다.
칠레를 방문한 피델. 피델 카스트로(왼쪽)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 칠레를 찾았다. 피델의 오른쪽은 막 집권한 아옌데 칠레 대통령. 군중들은 붉은색 깃발을 흔들며 피델을 환영했다. 1971.11.10ⓒAP/뉴시스
카스트로는 1960년대에는 남미 국가들의 혁명을 지원했고 1970년대에는 군대를 파견해 아프리카 여러 국가의 친미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는 수십 년간 해외로 쿠바 의사를 파견해 빈곤층을 돌보게 했고 도피한 미국의 흑표범당(Black Panther)의 지도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쿠바의 ‘혁명’은 이어질 듯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특혜무역과 보조금이 끊기면서 쿠바 경제는 곤두박질했지만 냉전 종식으로 쿠바와 국교를 재개하는 남미와 유럽 국가들은 증가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무교’ 국가였던 쿠바를 요한 바울 2세 교황이 1998년에 방문하기도 했다.
하바나의 병원에 입원한 피델 카스트로(오른쪽)가 문병을 온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의 손을 잡고 있다. 2006.8.13ⓒ그란마/AP/뉴시스
관광업이 부활하면서 쿠바 경제는 서서히 회복했고 카스트로는 경제난 때문에 암묵적으로 허용했던 시장 경제 요소를 다시 규제했다.
공적으로는 대담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카스트로도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은 꺼렸다. 그는 첫째 부인 미르타 디아즈 발라트와 아들 한 명을 두었지만 1956년 이혼했고, 이후 40여년 간 달리아 소토 델 발레와 살았다. 1980년에 조용히 결혼했다는 둘 사이에는 아들이 5명 있다.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한지 49년만에 물러났을 때, 그는 국왕들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국가수반이었다.
은퇴 이후 카스트로는 자신이 구축한 마르크스주의적 체제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개혁한 라울을 변함없이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카스트로가 장수한 덕에 그의 남동생은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쿠바의 혁명은 두 형제가 사망한 이후에도 지속될 지도 모른다. 라울은 2013년 2월, 자신이 2018년에 물러날 것이라 발표했고 후계자로 지명한 미겔 디아스 카넬(53)을 국가평의회 수석 부의장으로 발탁했다.
쿠바 공산당의 7차 당대회에 참석해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왼쪽). 그의 동생이자 현재의 쿠바공산당 서기인 라울이 피델의 연설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2016.4.19ⓒ신화/뉴시스
카스트로는 지난 4월, 수년 만에 공식자리에서 주요 연설을 했다. 쿠바 공산당 제7차 당대회 폐회식에서 그는 쿠바 국민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는 곧 90세가 된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은 처지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 때는 찾아온다. 하지만 쿠바 공산주의자들의 이념은 사람이 열정과 품위를 지니고 노력한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적, 문화적 재화를 생산할 수 있으며,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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