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조건 없는 퇴진', 무엇을 말하나
시민사회 붙들고 '추미애 회군' 수습…대통령 고집에 실력행사만 남아
조건 없는 퇴진: 국민적 압력으로 박근혜 하야 선언을 이끌어내겠다는 것
지금까지 정치권이 논의해 온 ‘질서 있는 퇴진’이란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 일정을 제시하고 이에 맞추어 과도내각과 이후 대통령 선출 일정을 확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문재인 전 대표는 먼저 기성정치권에 시민사회단체까지 가세한 퇴진운동을 주도하는 비상기구를 구성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조건 없이 퇴진을 선언하면 이후 과도내각을 수립해 진상규명과 공정한 대선관리를 담당하도록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되면 과도내각의 핵심이 될 국무총리의 인선에도 대통령 퇴진운동을 주도하는 비상기구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간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등은 여야3당과의 영수회담을 통해 ‘콘클라베’ 방식으로 국무총리 추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문재인 전 대표의 주장은 이러한 주장과는 내용이 다르다. 국무총리의 추천과 조각에 원내의 야당들뿐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의 의견까지 반영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차기’를 노리는 각 세력과 개인들 사이에 또 다른 유불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 대해 문재인 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조건 없이 퇴진 의사를 밝히면 이후 과정에 대해서는 퇴진운동을 주도한 비상기구에서 논의해 결정하면 된다며 구체적인 언급을 꺼리고 있다. 과도내각을 책임질 총리 인선이나 운용방식, 조기 대선 실시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 전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기성 정치권이 이를 이용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추미애 회군’ 사태 직접 수습
문재인 전 대표가 직접 ‘조 건없는 퇴진’을 들고 나온 것에는 전날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촛불민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에 섣불리 나섰다는 시민사회진영의 반발도 반영된 걸로 보인다.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기구인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14일 양자회담의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재인 전 대표가 퇴진론을 직접 주장한 것은 추미애 대표의 실책(?)을 보완하고 차기 대권주자인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해 더불어민주당과 지지자들의 조직적 단결을 도모하려는 의도를 보여준 걸로 해석된다.
애초 추미애 대표의 양자회담 추진에는 문재인 전 대표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문재인 대표 측이 그렇지 않다는 해명을 이미 내놓은 바 있고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김민석 전 의원이 추미애 대표와 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 사이에서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14일 의원총회에서 주류 대 비주류의 논쟁구도가 드러나면서 결국 누가 중간에서 역할을 했든 양자회담 추진 자체에 당 내 주류의 의중이 실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 다시 제기되기도 했다.
추미애 대표의 양자회담 제안과 철회는 야권 공조에 상처를 입혔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추미애 대표를 박근혜 대통령에 비유하는가 하면 ‘추미애의 최순실’ 등을 언급하며 갈등의 골에 기름을 붓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직접 퇴진론을 언급하면서 야권 공조의 전열은 다시 정비되는 모양새지만 핵심 이익을 눈앞에 두고 입장을 달리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이런 식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문재인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퇴진운동과 관련 있는 것 외의 민감한 쟁점에서 전부 유보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고려한 걸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 이후 과도내각에서 개헌을 추진할 것이냐의 질문에 “우리 헌법에 손 볼 대목이 많다. 개헌이 필요하다. 지난번 대선 때 공약도 했다”면서도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답한 것이 대표적이다.
갈 데까지 가겠다는 대통령
문재인 전 대표의 ‘조건 없는 퇴진’ 요구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권의 ‘질서 있는 퇴진’ 구상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역시 작용한 걸로 보인다. 15일 청와대는 언론을 통해 “모든 해결 방안은 법적 테두리 내에서 논의돼야 한다”면서 “‘질서 있는 퇴진’이라고 하지만 헌법에 관련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하야나 퇴진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질서 있는 퇴진’ 관련 구상에 대해 사실상 거부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대비해 ‘진박 중의 진박’이라는 유영하 변호사를 선임한 것도 청와대의 이후 대응 방향이 퇴진이나 2선후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거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유영하 변호사가 “헌법상 모든 국민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발언해 사실상 법적 책임의 축소를 위해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나 검찰 조사에 최대한 늦게 응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 등에서 이런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청와대의 이런 태도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을 제안했다가 철회하면서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적 퇴진을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됐다는 점 역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등은 여전히 교섭단체 3당과 박근혜 대통령을 대상으로 하는 영수회담, 이를 통한 국무총리 추천 및 과도내각 구성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모종의 ‘결단’을 할 때에야 가능한 그림이다. 대통령의 ‘결단’은 정치 윤리와 시민적 당위가 아니라 ‘정치적 협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야3당의 입장이 전부 ‘대통령 퇴진’으로 정리됐고 추미애 대표 사건으로 커튼 뒤에서 서로 총까지 겨누게 된 상태에서 이러한 구상의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힘으로 하는 방법만 남아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야권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대중적 압력을 확대시키고 동시에 국회 내에서 탄핵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힘으로 하는’ 방법만이 남은 셈이다. 이러한 실력행사의 과정에서 사실상 분당 직전의 상태에 있는 새누리당과 야당들이 어떤 방식으로 합종연횡하고 각자도생하는가에 따라 이후 국면이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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