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한양원 회장님이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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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한양원 회장님이 돌아가셨다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94세.
1년간 병가를 내고 신문사에 출근해 지난주 내가 가장 먼저 전화를 건 분이 고인이었다. 10개월쯤 전이었을까. 내가 병가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전화를 주었다. 휴직중엔 은둔하며 전화기를 아예 꺼놓고 있었는데, 전화기를 잠시 켠 사이에 그로부터 온 전화를 받은 것이다. 한회장은 “이 늙은이도 사는데, 젊은 사람이 아파서 왜 늙은이 걱정을 시켜.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 털고 나와”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드디어 복직을 했다고 알리러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않았다. 민족종교협의회 이찬구 사무국장에게 물으니 “회장님께서 순천향병원에 입원한지 2주가 됐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으로 찾아가 뵙고 싶다”고 했더니, “아무도 문병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하기에, “문병이 허용되면 전화로 알려달라”고 부탁해놓은 터였다.
우리나라 나이로 95세면, 누구나 장수했다고, 살만큼 살았다고 할만하다. 그러나 한회장의 부음은 그 어떤 부음보다 내겐 충격이다. 왜냐면 그는 내게 누구보다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평생 머리엔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채 장안을 활보했기에, 외관상으로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고여있지않았고, 늘 새로운 물이 흘렀다.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은 90대까지 현역으로 활동한 건강 때문이 아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절 그가 만나고 어울린 현대사 거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그 총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는 20대 때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주역을 가르쳤을만큼 주역에 대가였는데, 사서삼경 등 한문경전과 한문고시조를 줄줄 외는 지력 때문도 아니다. 우, 아니면 좌를 강요 당해온 현대사에서 그는 이념에 얽매이지않은 자유로움과 균형감을 지닌 드문 인물이었고, 자기 말 밖에 할줄 모르는 보통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남의 얘기도 잘 들을 줄 알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로 답답한 공기를 일거에 날리는 쾌남아였기에 그는 늘 청년이었다. 그는 어떤 때는 우익이었고, 어떤 때는 좌익이었고, 어떤 때는 중도였다. 오직 자신의 이념만으로 세상을 견주는 외눈박이가 아니라, 사람이 두 눈, 두 귀를 타고난 이유를 증명하며 살아간 인물이었다.
해방이후 쪼그라든 민족종교들의 수장이라는 직함으로도 내노라하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 주요 종교지도자들 사이에서 초라할 법했지만, 7대 종단 지도자들 모임에서나, 청와대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초청 받은 자리에서도 늘 좌중의 분위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현학과 유머와 균형감각을 대부분이 높이 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굳이 이념적으로 분류하자면 보수적이고 우에 가깝다고 할만했지만, 와이에스나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어서도 종교지도자들 중에서도 그를 특별히 좋아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청와대에 7대 종단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했을 때 오직 그를 끌어안고 번쩍 들어올려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던 것은 그만큼 그가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지난 2012년 공자의 고향 중국 곡부를 찾은 7대종단 종교지도자들. 갓을 쓴 한양원 회장이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 등과 함께 앉아있는 모습.
그는 보수적임에도 할 말은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대박론’을 외치자 “주역의 괘로는 한반도 통일이 가까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냉전이 끝나고도 남북한만 갈라져 있는데, 여전히 강대국의 이해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버리면 끝내 그들의 먹잇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오히려 경고했다.
또 김지하 시인이 지난 대선을 앞두고 후천개벽론을 들어 여성대통령의 필요성을 주창하자 “국가 전체의 운수를 봐야지, 지도자 한 명에 의해 후천개벽이 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군사정권 때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는 고백을 한 뒤라면 모르지만, 아무런 전제 없이 상대에 대한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편의에 따라 바뀌는 것도 지식인의 모습으로 볼 수 없다. 대놓고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돈을 원하면 일찍이 돈벌이를 했어야 하지 않는가.”고 비판하기도 했다.
4년 전이었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소속 7대 종단 종교지도자들이 유교의 교조 공자의 땅인 중국 산동성 곡부로 이웃종교체험을 위해 갔다. 이틀째였을까. 한회장이 숙소 화장실에서 넘어져 골반에 금이 가고 말았다. 그는 남은 일정을 휠체어에 의존해야했는데, 당시 함께간 민족종교협의회 김재완 사무국장도 70세가 넘은 노인이어서 휠체어를 밀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문화관광부 국장과 직원이 동행했지만, 젊은 공무원에게 한 회장의 휠체어를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그로서는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냐”고 할수도 있어보였다. 그래서 나는 “제가 한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고 나섰다. 귀국 전날 일행들로부터 ‘노벨 경노상’을 받을만하다고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내가 그렇게 특별히 노인을 공경하는 부류도 아니고, 착해서도 아니고, 무슨 봉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그런게 아니었다. 온종일 휠체어를 밀고 다녀도 좋을만큼, 거동이 불편함에도 시종일관 껄껄껄 웃으며, 유머를 잃지않은 쾌남아인 그의 매력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갓쓴 도인들의 서울시내 데모를 주동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산 청학동에 사는 이들이 속한 ‘갱정 유도’라는 민족종교의 대표인데, 1965년 6월6일 당시 갓 쓰고 한복입은 갱정유도인 5백명을 서울시내로 불러모아 거리 데모를 해 다음날 주요 일간지에 ‘기이한 난동’, ‘장안에 난데없는 청포데모’, ‘갓데모’ 등으로 보도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가 작성해 거리에 뿌린 평화통일 선언문은 ‘원미소용(遠美蘇慂)하고 화남북민(和南北民)하자’는 한자로 되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종용(꼬임)을 멀리하고 남북민이 화합하자’는 뜻이었다. 그 날 현충일을 맞아 국립묘지를 다녀오던 박정희 대통령이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이들을 보고 ‘주모자를 당장 청와대로 끌고 오라’고 해서 끌려가 한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무릎이 꿇려졌다. 박 대통령은 ‘원미소용’을 ‘원미, 소용’으로 뛰어 읽어서 ‘미국을 멀리하고 소련의 종용을 받자’는 말 아니냐고 따졌다. 그 뜻이 아니라고 설명했는데도 결국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92일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고인은 1950년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상경해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비서로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2014년 3월에 만났을때, "심산 선생님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끌려가 전혀 타협하지 않아 고문후유증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윤봉길의 손자 등과 함께 업고 다녀야했다"면서 심산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주었다.
“삼성이 아주 오래전부터 600년 전통을 가진 성균관대를 탐냈는데, 하루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갑 사장이 심산을 찾아와서는 봉투를 하나 건넸다. 심산은 비서인 윤종(윤봉길 의사의 아들)에게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보라’ 하더니 ‘5억원 수표가 들어 있다’고 하자 침을 뱉어 던지며, ‘이러면 내가 성균관대를 어서 가져가라고 내놓을 줄 알았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한겨레>에 보도되자,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며칠 전 한회장을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만났다고 한다.
한 회장은 요즘엔 ‘심산과 같은 결기 있는 큰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요즘은 정치인들이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좀 크게 보고 넓게 보는 국량이 큰 인물이 잘 보이지않는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한 회장은 3년 전 택시에 탔다가 승차를 거부한 그 택시에서 내리다가 오른쪽 대퇴부 골절의 중상을 입었다. 그의 가방이 문에 끼인 줄 모른 채 택시가 출발해버려 한참을 끌려간 아찔한 사고였다. 지병인 당뇨 수치가 높아 즉각 수술을 받지 못한 그는 다리를 절단할 뻔했으나 며칠 뒤 수치가 안정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의식 불명 상태에서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2주간 중환자실을 거쳐 3개월가량 입원 치료를 하고 한참 뒤에 만나자마자 “다시는 조기자를 못 볼뻔 했어.”라며 껄껄껄 웃었다. 그 호탕한 청춘의 웃음을 보며, 그의 나이를 잊었다.
그 몇달 뒤 한회장으로터 회사로 편지가 왔다. 그 편지 안에는 조 기자의 호를 지었다며, 한자로 ‘해원’(海圓)이라고 쓰여있었다. 아마도 쪼잔하게 살지 말고, 천강의 물을 다 끌어안는 바다처럼 큰 품을 가져라는 경책의 가르침을 담은 이름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껄껄껄 호탕한 웃음을 더는 들을 수 없다. 옛사람은 갔다. 이제 우리가 쪼잔함을 넘어, 좀 더 크고 넓고 호탕해질 차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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