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금기어 ‘죽 쒀서 개 준다’
민란의 현장에서 다시 꺼낸 <민,란> (02) |
11월 12일, 100만 명에 이르는 주권자 인파가 직접 청와대를 향해 시선을 직시했다. 대통령은 성난 ‘민란’의 함성을 듣고도 ‘나 몰라’로 일관하면 여파는 해일이 돼 다시금 전국을 ‘민주’의 깃발로 뒤덮을 것이다.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에 모인 국민의 날카로운 주인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현장에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치고 무언의 눈빛으로 공감한 국민의 마음은 모두 하나였다.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당도 민중총궐기의 대의명분을 그냥 마냥 눈 돌리기 어려웠나 보다. 지역구까지 적은 깃발에는 왠지 기회주의자의 냄새가 나고 곧 엄중한 결단의 시기에 이르면 그 펄럭임은 파도의 포말로 부서져 버리고 말 듯 처량해 보였다. 과연 ‘이명박근혜’ 정부의 대역죄를 칼날처럼 잘라낼 시기에 이르면 어떤 처세로 타협할 지 의심이 들었다. 민란의 역사에도 지도자의 기회주의 때문에 ‘죽 쒀 개 준’ 경우가 많다. <시경(詩經)>도 ‘타산지석(他山之石)’해야 옥을 고른다(공옥攻玉)고 조언했다.
“당(唐)은 황소(黄巢)로 인해 망(亡)하고 그 화(祸)는 계림(桂林)에 있다.” 고 <신당서(新唐书)>는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말기 최대 농민전쟁인 황소 민란이 일어나기 전 계림에서 봉기한 방훈(庞勋) 민란이 있었다. 당나라를 침몰시킨 진정한 화근이자 최초의 항거였다. 당나라 말기 혼란, 피 끓는 전쟁의 서막이다.
805년에 서주(徐州)를 포함해 4개 주를 지배했던 번진 무녕군(武宁军)이 설치됐다. 819년 고구려 유민 집단이자 산동지방 절도사로 재직하던 이사도(李師道)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해 유명해졌다. 신라인 장보고(張寳高)가 무녕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종군하기도 했다. 중원과 강남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는 번진으로 절도사의 횡포에 맞서 장병들의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했다.
862년 7월 서주에 근무하는 장병들이 신임 절도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돌연 절도사를 축출해 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 해도 하극상치고는 돌발적이었다. 왕식(王式)이 신임절도사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하극상을 벌린 장병 수천 명을 학살하고 무녕군을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목숨을 건진 장병들은 모두 도망쳐 산으로 들어갔으며 비적으로 평생 살 운명이었다.
당시 운남 지방에는 백족 등이 중심이 된 남조(南詔) 정권이 세력을 키워 북상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서주의 하극상 사건 2년 후 864년, 조정에서는 서주와 사주 일대의 ‘비적화한’ 장병을 끌어들여 남조 방위를 담당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조처를 취했다. 그래서 약 800여명이 계주(桂州, 광서 계림桂林)로 내려가 주둔하게 됐다. 이국 땅에서 용병의 시간을 견디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는 비적과 조정의 거래였다. 거래는 약속에 기반하는 것인데, 애초에 약속한 주둔기간 3년이 지났건만 조정은 귀향 명령 대신에 복무 기간을 6년으로 연장해버렸다. 불신이 팽배해지자 불만의 고름이 터져 나왔으며 게다가 관찰사의 가혹한 훈련과 만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등점을 넘고 있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수병(戍兵) 복무를 감당하라는 것은 잔혹한 고통이었다.
868년 7월 전직 무녕군 장교 허길(许佶)은 마침 관찰사가 전근간 틈을 노려 계주도장(桂州都將)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식량창고를 약탈한 후 군량과 사료를 관리하는 양료관(粮料官) 방훈을 지도자로 추대해 서주로의 귀향을 도모했다. 방훈 군대는 병기 창고를 열어 무장한 후 계림을 출발해 호남, 호북, 안휘, 절강을 거쳐 서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 당시 지방 번진의 횡포에 고통 받던 농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병력도 점점 늘어나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애초에 약속을 어긴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못하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일부 장병의 단순 반란이 서서히 농민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민란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방훈은 ‘조정이 우리를 모두 주살하려 하니 어차피 싸우다 죽는 것이 백 번 낫다’고 외치며 서주의 본거지 팽성(彭城)을 공격했다. 계림으로 보냈고 복무 연장을 주도한 서주관찰사 최언증(崔彦曾)을 체포해 원한을 갚았으며 부하장수들은 물론이고 일족까지 몰살시켰다. 서주를 장악하고 장강 일대를 차단하자 수도 장안까지 위협했다. 이때 농민들의 참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20만 명의 대규모 군대가 됐다. 조정이나 민란 지도자 모두 서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규모로 급증했다.
조정에서는 방훈에게 서신을 보내 협상을 하는 한편 20만 명의 토벌군을 모집해 절도사 강승훈(康承训)에게 지휘하게 했다. 선봉장 대가사(戴可师)가 3만 명을 이끌고 진격해오자 방훈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쳐 방심하도록 유도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해 토벌군과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그러나 방훈은 토벌군을 과소평가하고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만하고 향후 공격방향이나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방심했다. 게다가 음주와 오락에 점점 빠졌는데 마음 속으로는 반란군 두목으로 최후를 맞기 보다는 조정이 자신을 절도사로 인정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교만에 빠져 사치로 나태하면, 얻었으나 다시 잃게 되며 이겼으나 다시 패하는 것인데, 하물며 얻은 것도 이긴 것도 아니니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군사 주중(周重)은 직언하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방훈은 듣지 않았다. 지도자가 기회주의적 속성을 들어내니 덩달아 계림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수병들도 거만하고 난폭해졌다. 무고하게 재물을 약탈하거나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민란 주동자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방훈도 엄격한 규율로 처벌하지 않자 서서히 군율이 떨어지고 무법천지로 변해갔다.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으로 명분과 규모를 키웠으나 군인의 최고 로망인 절도사에 편재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심지어 ‘절도사를 얻을 지 말 지’ 고민하는 방훈을 비판하는 동요까지 아이들이 부르고 유행할 정도였다. 절도사를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기다리고 다시 전투를 하다가도 또 기다리는 애처로운 내용이 <자치통감>에 기록돼 있다. 방훈의 지략과 풍모는 한 나라를 세울만한 됨됨이는 아니었던 듯하다. 웃음거리가 된 지도자를 비웃는 노래는 곧 고난을 살아가는 민중의 애환이자 바람이었건만 자신에 대한 비난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려는 속성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일까?
조정은 서신을 지속적으로 보내 절도사의 녹봉을 줄 것처럼 심리전을 펼쳐 안심시키면서 대대적인 토벌을 준비한 후 공격해왔다. 민란 지도자로서의 신임이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민란 군대를 이탈해 투항하는 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니 전투가 제대로 수행될 리가 없다. 숙주와 서주에서 연이어 패배했으며 팽성이 함락 당한 후에 계림 출신 핵심 장병의 일가친척 수천 명이 공개 처형되자 급속도로 사기가 꺾였다. 방훈은 869년 9월에 이르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주했지만 서북에서 출전한 돌궐계 용병 사타족(沙陀族) 기병에게 철저하게 유린 당했다. 게다가 패잔병을 이끌고 강을 건너려 할 때 이미 투항한 옛 동지가 토벌군 선봉대로 나타나 앞길을 막자 더 이상 퇴로가 없었다.
한때 장안까지 위협할 정도로 거침 없었지만 목표의식이 불투명하고 한계에 다다르면 허망하게 쉽사리 무너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군인이 주도하고 농민을 비롯 사회 각계의 백성들이 호응해 1년 이상 전국을 휩쓸던 기세는 이후 황소의 난을 촉발했으며 당나라 멸망의 도화선(导火线)이 됐다.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 동참해 거리를 누비며 문재인은? 안철수는? 박원순은? 안희정은? 이재명은? 생각하며 물음표를 계속 던졌다. 그들의 이 ‘민란’처럼 솟는 민중의 투쟁과 희망을 담는 그릇인가에 대한 끝없는 회의였다. 더불어 당나라의 방훈을 비롯해 민란의 리더가 실패의 촉매제가 된 수많은 역사를 되새겼다. 이상하게도 민란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실패의 상징이 된 민란지도자와 현 야권 대선후보가 오버랩되는 것은 왜 일까? 민란 반역의 지도자와 캐릭터가 겹치지 않는 자는 있는가?
참다운 민란의 승리,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가는데 앞장서는 진정한 지도자는 지금 TV 앞에 어슬렁거리는 대선후보가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 속에서 나올 일이다. 11.12 민중총궐기는 그 시작이다.
민란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은 졸고인 <민,란>(2015, 썰물과 밀물)에서 인용하고 일부 내용을 고쳐서 기재한 것임을 밝힌다. ‘중국민중의 항쟁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민,란>은 중국 방방곡곡을 취재하면서 느낀 소회와 얻은 자료를 기초로 집필된 이야기 책이다. 민란의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눈 여겨 볼 수 있는 잣대로서 읽히기를 바란다. [필자 주]
최종명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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