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행복이 아닌 것을 통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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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중심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같고 다름 함께 바라봐야 실체
“구원이 고난도 십자가도 없는 것으로 믿는다면 실체 아니다”
» 비가 내린 뒤 서울 도심에 뜬 무지개.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무릎 관절염에는 노루, 고라니 뼈가 좋다고 합니다. 노루나 고라니를 사냥하러 나선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총 쏘는 솜씨가 있어야 할 건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것이겠지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또 있다면 뒷산에 노루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물고기를 산에서 찾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얻을 목표와 방법이 나오겠지요. 구원이란 무엇이고 신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것을 얻고 싶다면 첫째는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얻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실체를 아는 방법론으로 먼저 ‘타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유기적 관계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공동체 영성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의 관계 속에서 객관의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 전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던가?”라고 물으셨습니다. 내 생각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의 생각도 맞으면 검증이 되고 틀리면 생각의 비교를 통해서 더 정확한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와 너에 대한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무지개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냥 바라보고 즐길 수만 있습니다. 쫓아가 잡으려 애쓰는 것은 ‘허무’일 뿐이지요.
구약시대 현자(전도서:코헬렛)가 존재와 현상에 대한 깨달음으로 고백하기를 “허무로다, 허무로다! 세상만사 허무로다!”, “무엇이든 생겨날 때가 있으면 사라질 때가 있고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가르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존재의 유한성과 영원성의 추구’로 가르칩니다.
행복한 삶은 행복이 아닌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허무한 것은 확실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존재의 실체를 아는 것이 깨달음의 중요한 요체(拗體)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두가 관계적으로 공동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내 중심의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실체가 못되지요. 누군가가 밉다는 것은 나와 비교적일 때 생깁니다. 생각과 행실에서 나는 이러한데 저 사람은 저러함이 미움의 실체입니다. 그도 관계론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풍토로 어떤 사고방식과 습관을 가졌는가? 나를 만든 환경과는 어떤 것이 같고 다른가? 함께 바라본다면 미움의 실체란 별것 아님을 알게 됩니다.
행복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행복할 때가 있으면 불행할 때가 있다’는 이법을 넘어서는 행복도 있을까요? ‘좋아할 때가 있으면 싫어할 때가 있다’는 이법을 넘어서는 친구관계나 부부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나를 그리스도라 하였는가? 구원이란 고난도 십자가도 없는 것으로 믿느냐? 그렇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2016.9.23.) *
서울 다녀오면 늘 피곤하다! 차를 타서인가 도시를 다녀와서인가?
※예수살이 공동체 <산위의마을>에 실린 박기호 신부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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