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메카가 되려면 학술적 기반 가져야” <미니 인터뷰>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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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를 담당한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실을 맡아 내용을 채운 이는 이동언(60)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이다.
독립기념관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끝으로 30년을 재직하고 정년퇴직한 그는 홍암 나철과 대종교 독립운동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벌교에) 내려 와서 인생 2막을 여기에 바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2일 오후 홍암 나철 순국 100주기 추모제와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을 마친 뒤 기념관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통일뉴스 : 홍암 나철 기념관이 개관했는데, 어떤 역할을 맡았나?
■ 이동언 연구실장 :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를 맡았다. 수원대 박환 교수와 부경대 허태근 교수가 고증했다.
학술전시이기 때문에 좀 어려움이 있었다. 기간도 짧았고. 다행히 내가 이쪽 관련 자료를 많이 모아 뒀고, 독립기념관이라든지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수집해서 이번 전시에 다 반영했다.
□ 어떤 계기로 기념관 전시를 맡게 됐나?
■ 나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하고 독립기념관에서 30년 근무했다.
특히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자료가 부족하고,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가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인 대종교였다. 그래서 홍암 나철 관련 논문을 몇 편 썼고, 대종교 인물인 서일 장군, 백산 안희제, 단암 이용태 등에 대해 연구했다. 앞으로도 홍암 나철을 비롯해 대종교에서 활동한 인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다.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은 대종교였다. 서일 장군이 1911년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을 창설하고, 그게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고, 1920년에 청산리대첩의 주력부대인 대한군정서로 발전한다.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라고 하는데 정식명칭인 대한군정서로 불러야 한다.
대한군정서 총사령관이었던 김좌진 장군 밑에서 참모장을 한 나중소 장군이라든지,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선생은 전혀 연구가 안 됐는데, 최근에 논문이 발표됐다.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해서 대종교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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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암 외증손자 안만현 씨는 홍암의 친필 유서 원본 등을 기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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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암 증손부 박민자 씨(사진)의 아들 나근세 씨는 「단군교 포명서」와 영문 명함 등을 기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 대종교 중광터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혀준 홍암 나철 선생 친필 유묵이 있고, 독립운동 관련 사진자료 속의 대종교 간부들 이름을 전부 밝혔다.
대종교가 있었던 유적지를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대종교 인물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대종교 관련 자료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고증 거쳤다.
□ 사진 속 인물들을 파악한 구체적 사례를 든다면?
■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으로 대종교 총본사가 옮겨갔을 때 찍은 사진 중에서 나철 첫째 아들 나정련, 3세 교주 윤세복, 이수원, 이현익, 둘째 아들 나정문, 김진옥 이런 분들을 다 밝혀냈다. 환국했을 찍은 사진의 명단도 밝혔다. 그동안 조금 잘못 설명된 부분도 있었다.
□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들도 전시됐는데.
■ 사위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 딸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가 있는데 딸에게 준 것은 한글로 돼 있는 게 특징이다. 중광 헌장인 「단군교 포명서」와 외교항쟁 벌일 때 사용한 영문 명함 등 원본이 기증됐다.
홍암 외증손자 안만현 씨와 홍암 증손부 박민자 씨의 아들, 그러니까 고손자 나근세 씨가 기증했다.
□ 전시관 전시 기획은 누가 했나?
■ 내가 기획사와 함께 했다. 일본에 동지 네 명과 같이 갔을 때의 체험공간을 만들었다. 관람객이 같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상에는 관련 자료와 보성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검색할 수 있도록 했고, 임오교변 때 돌아가신 ‘임오 10현’의 자세한 약력과 활동사항을 소개하는 콘텐츠도 만들어 놨다.
□ 자료들을 더 채워야 할 텐데.
■ 앞으로 홍암 나철 기념관이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려면 학술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연구자들을 모으고 자료를 수집해서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정기적인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홍암 자료를 다 모아서 전집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1942년 임오교변 때 일본놈들이 싹 가져갔다는 자료도 찾아봐야 한다. 한국 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봤다고도 한다.
□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나?
■ 선양회에서도 골든벨 등 많이 하고 있지만 대종교가 사실 좀 어렵다.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서 대중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내년 쯤에 ‘홍암 나철과 대종교 독립운동’ 단행본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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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외빈들에게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동언 연구실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 기념관 건립에 상당한 재정이 투입됐는데, 이후 운영과 유지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안다.
■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기념관, 박물관을 많이 만들고 있는데, 학예사를 둬야 한다. 물론, 안내도 중요하지만 전문적 자격을 갖춘 학예직을 키우고 활성화해야 의미부여가 될 것 같다.
□ 오늘 행사에서 홍암 약력을 소개하는데 왕석보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는 학계에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사안 아닌가?
■ 잘 몰라서 그런 거다. 전시하면서 다 바로 잡았다. 오늘도 ‘장원급제’했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병과 16등으로 급제했다. 역사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 사실 대로 바로잡아야 한다.
□ 이후 기념관 운영 방향은?
■ 추세가 각 박물관이 교육프로그램으로 많이 치중한다. 역사 자료를 토대로 청소년들 체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살아있는 교육이 필요하고 현장 교육이 중요하다. 유적지 답사를 직접 갔다 오면 달라진다.
이제 시작이고, 자료 수집은 발로 뛰면 독립운동사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시간과 예산과 노력 필요하다. 제일 중요한 게 자료라고 생각한다. 자료가 있으면 논문을 왜 안 쓰겠나?
□ 지자체들이 기념관 외형만 그럴싸하게 지어놓고 정작 운영, 관리는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운영도 책임지고 할 용의가 있나?
■ 독립기념관에서 정년했다. 인생 2막을 대종교 독립운동 연구자로 살고 싶다. 일단 개관 기념 학술회의부터 시작해야 하고, 후진 연구자들도 키워야 될 것 같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라고 떠들 게 아니라 독립운동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학술과 자료, 교육, 이 세 박자가 갖춰지면 홍암 나철 기념관이 활성화 돼 의미있는 기관이 될 걸로 기대한다.
76억이나 쏟았는데 개관 테이프 끊고 끝난다면 국민 혈세 낭비다. 당연히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보성군이 계속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홍암 기념관을 맡겨주면 경력을 살려서 홍암 기념관이 제대로 정립될 수 있도록 헌신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려 와서 인생 2막을 여기에 바칠 생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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