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뜻 이어받아 하루빨리 분단 극복해야"

벌교서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 열려..100주기 추모제도
벌교=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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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02  23: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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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개천절인 11월 2일, 홍암 나철 순국 100주기 추모제와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이 생가가 있는 전남 벌교 금곡마을에서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음력 개천절인 11월 2일, 홍암 나철 대종교 대종사의 순국 100주기 추모제가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과 함께 열렸다.
홍암 나철은 1863년 벌교읍 금곡마을에서 태어나 을사오적 처단 투쟁과 항일외교 등을 펼쳤고, 1909년 대종교(단군교)를 중광(重光)했지만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다 100년 전인 1916년 음력 8월 보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숨을 끊는 폐기법으로 순국했다.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기 추모제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수성 전 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오늘 하늘이 대단히 파랗다. 홍암 나철 선생이 바라시는 우리 조국의 미래, 여기 모인 모든 분들의 마음과 같이 느껴진다”며 “홍암 나철 선생 기념관 개관 및 순국 100주기 추모제를 갖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쁘다”고 인사했다.
  
▲ 이수성 추모제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이용부 보성군수(오른쪽)가 정상우 홍암나철선생선양회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수성 추진위원장은 “우리는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하루빨리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세계 속에 당당히 우뚝서는 통일 대한민국을 성취해야 한다”며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선생의 강인한 의지와 공존과 공생의 홍익인간 정신을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부 보성군수는 추모사에서 “홍암 선생은 1963년 우리 고장 벌교에서 태어나시어 민족의 선각자요,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고, 대종교를 중광한 민간 외교관, 사회개혁가로서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온 몸을 바치셨다”고 기렸다.
특히 “올해로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선생 관련 각종 유물이 전시되는 홍안 나철 선생 기념관 개관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 남기신 숭고한 정신과 사상을 기리고 받들며, 앞으로 우리 고장이 의향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군민과 출향향우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각별한 관심을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 테이프 커팅에 앞서 내외빈들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관에 전시된 홍암 나철 흉상.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날 개관한 홍암 나철 기념관은 보성군이 2006년부터 생가 복원을 시작으로 윗켠의 사당 홍암사와 아랫켠의 홍암관과 교육관 등 대형 한옥 건물 세 채로, 10년 만에 완공됐다. 전시관은 홍암관과 대종교 독립운동관, 자료실로 꾸며졌으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생가 복원과 2011년 착공한 기념관 건립에는 국비 14억 4천여만 원과 보성군비 62억여 원 등 총 75억 6천 5백만원이 소요됐으며, 기념관은 부지면적 24,687㎡에 건축연면적 937.08㎡이다.
이날 감사패를 받은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정상우 회장은 2001년부터의 활동 경과 보고에 나서 2001년 85주기 추모제를 시작으로 매해 추모제를 거행하고 2002년 제1회 학술회의 이후 여러 차례의 학술회의와 교육, 초혼비 제막, 중국 화룡시 청호마을 홍암 묘소 참배 및 정비 등의 활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 대종교 원로인 김선적, 원영진 선생이 헌화 분향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문화행사는 채동선합창단의 독립군가 합창으로 마무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 선생 순국 100주기 추모제 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가 주관한 이날 100주기 추모제와 기념관 개관식에는 김선적, 원영진 등 대종교 원로들과 홍암 나철 선생 증손부 박민자, 외증손자 안만현 씨 등 유족들이 참석해 헌화와 분향을 했으며, 보성군 각급 기관장들과 군의원 등도 자리를 함께 했다.
‘홍암 나철 기념관’ 테이프를 커팅한 내외빈들은 이동언 선양회 연구실장의 안내로 자료실과 홍암관을 둘러보았고, 문화행사를 이어갔다.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려면 학술적 기반 가져야”
<미니 인터뷰>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
  
▲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를 담당한 이동언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실을 맡아 내용을 채운 이는 이동언(60) 홍암나철선생선양회 연구실장이다.
독립기념관에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을 끝으로 30년을 재직하고 정년퇴직한 그는 홍암 나철과 대종교 독립운동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벌교에) 내려 와서 인생 2막을 여기에 바칠 생각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2일 오후 홍암 나철 순국 100주기 추모제와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식을 마친 뒤 기념관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통일뉴스 : 홍암 나철 기념관이 개관했는데, 어떤 역할을 맡았나?
■ 이동언 연구실장 : 홍암 나철 기념관 전시를 맡았다. 수원대 박환 교수와 부경대 허태근 교수가 고증했다.
학술전시이기 때문에 좀 어려움이 있었다. 기간도 짧았고. 다행히 내가 이쪽 관련 자료를 많이 모아 뒀고, 독립기념관이라든지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수집해서 이번 전시에 다 반영했다.
□ 어떤 계기로 기념관 전시를 맡게 됐나?
■ 나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하고 독립기념관에서 30년 근무했다.
특히 독립운동사 중에서도 자료가 부족하고,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가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인 대종교였다. 그래서 홍암 나철 관련 논문을 몇 편 썼고, 대종교 인물인 서일 장군, 백산 안희제, 단암 이용태 등에 대해 연구했다. 앞으로도 홍암 나철을 비롯해 대종교에서 활동한 인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다.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은 대종교였다. 서일 장군이 1911년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을 창설하고, 그게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고, 1920년에 청산리대첩의 주력부대인 대한군정서로 발전한다.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라고 하는데 정식명칭인 대한군정서로 불러야 한다.
대한군정서 총사령관이었던 김좌진 장군 밑에서 참모장을 한 나중소 장군이라든지,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선생은 전혀 연구가 안 됐는데, 최근에 논문이 발표됐다. 홍암 나철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해서 대종교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질 것 같다.
  
▲ 홍암 외증손자 안만현 씨는 홍암의 친필 유서 원본 등을 기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 증손부 박민자 씨(사진)의 아들 나근세 씨는 「단군교 포명서」와 영문 명함 등을 기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 중 중요한 자료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 대종교 중광터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혀준 홍암 나철 선생 친필 유묵이 있고, 독립운동 관련 사진자료 속의 대종교 간부들 이름을 전부 밝혔다.
대종교가 있었던 유적지를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대종교 인물을 밝히는데 주력했다. 대종교 관련 자료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고증 거쳤다.
□ 사진 속 인물들을 파악한 구체적 사례를 든다면?
■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으로 대종교 총본사가 옮겨갔을 때 찍은 사진 중에서 나철 첫째 아들 나정련, 3세 교주 윤세복, 이수원, 이현익, 둘째 아들 나정문, 김진옥 이런 분들을 다 밝혀냈다. 환국했을 찍은 사진의 명단도 밝혔다. 그동안 조금 잘못 설명된 부분도 있었다.
□ 유족들이 기증한 자료들도 전시됐는데.
■ 사위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 딸에게 보내는 친필 유서가 있는데 딸에게 준 것은 한글로 돼 있는 게 특징이다. 중광 헌장인 「단군교 포명서」와 외교항쟁 벌일 때 사용한 영문 명함 등 원본이 기증됐다.
홍암 외증손자 안만현 씨와 홍암 증손부 박민자 씨의 아들, 그러니까 고손자 나근세 씨가 기증했다.
□ 전시관 전시 기획은 누가 했나?
■ 내가 기획사와 함께 했다. 일본에 동지 네 명과 같이 갔을 때의 체험공간을 만들었다. 관람객이 같이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상에는 관련 자료와 보성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검색할 수 있도록 했고, 임오교변 때 돌아가신 ‘임오 10현’의 자세한 약력과 활동사항을 소개하는 콘텐츠도 만들어 놨다.
□ 자료들을 더 채워야 할 텐데.
■ 앞으로 홍암 나철 기념관이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려면 학술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연구자들을 모으고 자료를 수집해서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우선 정기적인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홍암 자료를 다 모아서 전집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1942년 임오교변 때 일본놈들이 싹 가져갔다는 자료도 찾아봐야 한다. 한국 학자들이 일본에 가서 봤다고도 한다.
□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나?
■ 선양회에서도 골든벨 등 많이 하고 있지만 대종교가 사실 좀 어렵다.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서 대중화 작업이 필요한 것 같다. 내년 쯤에 ‘홍암 나철과 대종교 독립운동’ 단행본을 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 내외빈들에게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동언 연구실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기념관 건립에 상당한 재정이 투입됐는데, 이후 운영과 유지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도 있는 것으로 안다.
■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기념관, 박물관을 많이 만들고 있는데, 학예사를 둬야 한다. 물론, 안내도 중요하지만 전문적 자격을 갖춘 학예직을 키우고 활성화해야 의미부여가 될 것 같다.
□ 오늘 행사에서 홍암 약력을 소개하는데 왕석보 선생에게 한학을 배웠다고 하는데, 이는 학계에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사안 아닌가?
■ 잘 몰라서 그런 거다. 전시하면서 다 바로 잡았다. 오늘도 ‘장원급제’했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는 병과 16등으로 급제했다. 역사가 왜곡돼서는 안 된다. 사실 대로 바로잡아야 한다.
□ 이후 기념관 운영 방향은?
■ 추세가 각 박물관이 교육프로그램으로 많이 치중한다. 역사 자료를 토대로 청소년들 체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살아있는 교육이 필요하고 현장 교육이 중요하다. 유적지 답사를 직접 갔다 오면 달라진다.
이제 시작이고, 자료 수집은 발로 뛰면 독립운동사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시간과 예산과 노력 필요하다. 제일 중요한 게 자료라고 생각한다. 자료가 있으면 논문을 왜 안 쓰겠나?
□ 지자체들이 기념관 외형만 그럴싸하게 지어놓고 정작 운영, 관리는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운영도 책임지고 할 용의가 있나?
■ 독립기념관에서 정년했다. 인생 2막을 대종교 독립운동 연구자로 살고 싶다. 일단 개관 기념 학술회의부터 시작해야 하고, 후진 연구자들도 키워야 될 것 같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의 선구자라고 떠들 게 아니라 독립운동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학술과 자료, 교육, 이 세 박자가 갖춰지면 홍암 나철 기념관이 활성화 돼 의미있는 기관이 될 걸로 기대한다.
76억이나 쏟았는데 개관 테이프 끊고 끝난다면 국민 혈세 낭비다. 당연히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청소년 역사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보성군이 계속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홍암 기념관을 맡겨주면 경력을 살려서 홍암 기념관이 제대로 정립될 수 있도록 헌신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려 와서 인생 2막을 여기에 바칠 생각은 있다.

  
▲ 추모제와 개관식에는 500여명의 내외빈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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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정상우 홍암나철선생선양회 회장이 선양회 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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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주 작가가 홍암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단군의 아들』을 헌정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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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당 홍암사. 개천문을 통해 들어간다. 이날 추모제에는 사당에 모셔진 위패를 무대에 올려 사당은 개방하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홍암관에 전시된 예언시와 번역본.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딸에게 남긴 홍암의 자필 유서 원본. 드물게 한글로 쓴 친필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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