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다. 움직임이 없다. 푸른 물결은 사라졌다. 바다는 숨을 멈췄고, 생명은 자취를 감췄다. 이곳은 지금 천천히 무너지는 동해안 바닷속이다.
우리는 종종 산불과 같은 육상의 재난에 대해서는 재난재해를 선포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그러나 바닷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상상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산불이 발생하면 정부와 사회는 신속하게 대처한다. 하지만 바닷속의 위기는 방치되고 있다. 바다의 생명선인 해양 생태계가 무너지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바다사막화',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될 바다의 비상신호
▲고기잡이 어선이 큰 수확 없이 텅 빈 그물을 건져 올리고 있다 ⓒ 진재중
'바다사막화'는 수온 상승, 오염, 해양 개발 등으로 해조류와 해초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다. 한때 울창했던 바다숲은 황폐한 모래밭과 하얀암반으로 변해가고, 그곳에 기대어 살던 해양 생물들은 서식지를 잃고 떠난다. 어민들은 "바다생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해양과학자들은 "바다의 사막화가 현실이 되었다"고 경고한다.
해조류는 단순한 바닷속 식물이 아니다. 해양 생물에게는 집이자 먹이이며, 인간에게는 귀중한 식량 자원이다. 더불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해 지구온난화를 늦추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제 바다의 변화를 외면할 수는 없다. 바다 역시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다.
강원 양양에서 30년 넘게 어업에 종사해온 박철부 어촌계장은 요즘 바다에 나가는 일이 예전만큼 반갑지 않다고 말한다.
"예전에는요, 그냥 바다에 나가 그물만 던져도 가자미고 광어가 잘도 잡혔습니다. 해조류가 많으니까 물고기들도 그 안에 숨어 살고, 산란도 하고 그랬죠. 근데 요 몇 년 사이 바닷속이 이상해졌어요. 해조류가 싹 없어지고, 바닥이 그냥 모래밭이에요. 텅 비었어요. 물고기가 있을 리가 없죠."
박 계장은 이 현상을 '바다에 생기가 없어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예전에는 맨눈으로도 보이던 바다숲이 지금은 거의 사라졌고, 물고기의 양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육지에는 대책, 바다에는 방치?
▲사라지는 바다숲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로 바다사막화 지역이 급격히 늘고 있다 ⓒ 한국해양환경생태연구소
그런데 우리는 바다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 육지에서는 산불이 나면 뉴스 속보가 뜨고, 정치권과 지자체 장이 앞다투어 현장을 찾는다. 그러나 바다의 해조류가 죽어가도, 바다숲이 사라져도, 그것이 뉴스가 되기는커녕 제대로 조사조차 되지 않는다.
'바다식목일'이라는 이름으로 5월 10일마다 바다에 해조류를 심는 행사가 있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친다. 시민들의 인식은 여전히 낮고, 정책과 예산도 부족하다. 진정한 복원은 단지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닷속 생태환경을 회복하고, 사라진 생물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게 장기적이고 과학적인 복원 계획이 필요하다.
평생을 어업에 종사해 온 강릉에 사는 정상록(80)씨는 "산에 불 나면 뉴스에 나오고 헬기도 뜨잖아요. 근데 바다 속이 썩어가도 아무도 몰라요. 바다도 똑같이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지금 이 바다가 우리 자식들한테 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많습니다"라며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에 불만을 제기한다.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최한길 교수는 "지금 필요한 건 인식의 전환입니다. 바다숲이 사라지는 것을 '생태계 재난'으로 인식해야 하고, 국가 차원의 모니터링과 장기 복원 사업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바다숲을 되살리는 일은 단순한 생태 보전이 아닙니다. 기후위기 대응이자, 미래 식량 안보에 대한 투자입니다. 우리가 외면한 채 방치할수록 회복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미래 식량 그리고 생태계의 최후 보루
▲미래의 식량이자 탄소흡수원으로 역할을 하게 될 해조류 ⓒ 진재중
전문가들은 해조류가 미래의 중요한 식량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후 위기와 식량 위기가 맞물린 시대에, 바다는 단지 '물고기를 잡는 곳'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 자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조 식품을 오랜 기간 연구해 온 강릉원주대 정인학 명예교수는 해조류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해조류는 이미 아시아권에서는 중요한 먹거리로 자리 잡았고, 서구권에서도 그 가치를 다시 조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작 우리 스스로 이 자원을 제대로 보호하거나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바다숲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복원과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여전히 낮습니다."
정 교수는 해조류 보호와 바다숲 복원이 단지 환경운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건 식량주권을 확보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10년 뒤 우리의 식탁, 나아가 지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해조류도 탄소흡수원 인정받을 날 머지않았다
▲해조류는 광합성이 뛰어남에도 아직 블루카본으로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 진재중
전 세계가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는 가운데, 바닷속 '해조류'가 새로운 탄소흡수원(블루카본)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동해안을 중심으로 자생하는 미역, 다시마 등 해조류의 탄소흡수 능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인 흡수원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현재 해양생태계 중 맹그로브, 염습지, 해초(seagrass) 등 일부만이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블루카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해조류는 광합성으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고정하는 능력이 뛰어남에도, 연안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유롭게 떠다닌다는 이유로 기준에 포함되지 못했다.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최한길 교수는 "해조류는 생장 속도가 빠르고 이산화탄소 흡수 효율이 높기 때문에, 향후 기후변화 대응 자원으로 매우 유망하다"며, "동해처럼 해양 생태계가 다양한 지역의 해조류 자원을 면밀히 분석하고, IPCC 기준에 맞춘 검증 자료를 확보한다면 공식 인증도 시간 문제일 것"이라고 말했다.
"해조류는 바다의 나무다, 미래의 자원으로 바라봐야 할 때"
▲해조류는 어업자원이자 탄소흡수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진재중
해조류는 어업 자원이자 탄소 자원이라는 '이중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해양의 탄소흡수 기능은 간과돼 왔지만, 이제는 해조류도 공식적인 탄소흡수원으로 자리매김할 날이 머지않았다. 바다를 기후 해법의 핵심으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다는 조용히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육지처럼 불타지도 않고, 연기를 내뿜지도 않지만, 생명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제 바다도 '숲'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바다에도 대책이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한다. 바다를 지키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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