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법 정의는 노동자 앞에서만 우물거리나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마터면 제1 야당 유력 대선후보가 투표용지에서 사라질 뻔한 아찔한 경험을 했다. 지난 20대 대선 과정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이재명 후보의 발언을 핑계로 국민의힘 등은 이 후보를 허위사실 공표를 금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이 후보는 대선 패배 이후인 2022년 9월 8일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검찰과 이 후보 측의 치열한 공방과 이 후보의 단식 등으로 1심 선고에만 2년 2개월이 소요됐지만 2심은 상대적으로 속도를 내서 4개월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전속결로 심리를 진행해 21대 대선을 목전에 둔 지난 5월 1일, 2심 무죄 판결을 뒤엎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2심 무죄판결 선고 이후 36일만에 대법원 소부도 아닌,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린 것이다. 법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그것도 6만 8000쪽에 달하는 소송자료를 읽고서 한 달여 만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필자로서도 상상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에게 정의가 요구했던 시간은 7년
대법관 자신들이 보기에도 머쓱했는지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초고속 판결의 이유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당화했다. 관련 뉴스를 보면서 필자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지당한 말이지만 필자는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노동자에게는 정의가 항상, 그리고 많이 지연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니, 정의가 지연되는 것이 오히려 당연시되어 왔다.
2005년 2월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였던 최병승 씨가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활동을 이유로 사내하청 업체에서 해고됐다. 현대차를 상대로 불법파견·정규직화 투쟁을 해 왔던 최병승 씨는 곧바로 원청인 현대차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울산지방노동위원회에 제기했다. 장장 7년여에 걸친 현대차 불법파견 법정 투쟁의 시작이었다. 핵심 쟁점은 최병승 씨를 현대차의 직원, 즉 고용관계에 있는 현대차 노동자로 볼 수 있는지였다. 부당해고를 다투기 위해서는 현대차가 최병승 씨의 사용자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1년 뒤인 2006년 3월 울산지방노동위원회는 ‘현대차는 최 씨의 사용자로 볼 수 없다’며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각하했다.
최병승 씨는 다시 중앙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고 2006년 8월, 중앙노동위원회도 각하했다. 그는 다시 행정법원을 상대로 ‘중앙노동위원회의 각하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7년 1월 행정법원은 ‘현대차는 최 씨의 사용자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고 2008년 2월 고등법원도 동일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년도 훌쩍 넘은 2010년 7월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은 파견법 위반의 불법파견 관계이기에 현대차가 최병승 씨의 사용자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심을 거쳐 최종적으로 대법원 판결로 확정되기까지는 다시 2년이 더 소요되었다.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조립하는 작업장 현실이 파견법 위반의 불법파견 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정의 이루어진다면 7년 아니라 9년이 대수일까
최병승 씨의 사례는 그나마 짧은 편이다. 구미에 있는 디스플레이용 유리 제조업체인 아사히글라스의 사내하청 노동자 170명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2015년 6월 해고됐다. 최병승 씨의 사례처럼 형식은 사내하청 업체가 해고한 것이지만 배후에는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있었다. 아사히글라스지회는 2015년 파견법 위반 혐의 고소를 시작으로 아사히글라스를 상대로 지난한 법정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지회는 단식농성과 고공농성, 검찰청사 로비 점거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2024년 7월 대법원은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사히글라스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용자라는 것을 최종 확인받기까지 무려 9년이 걸렸다. 최병승 씨, 그리고 아사히글라스지회는 비록 많이 지연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법원은 정의를 실현했다.
정의가 지연될 뿐만 아니라 부정되는 사례는 더 많다. 2004년 KTX 운행이 시작되면서 ‘땅 위의 스튜어디스’라는 화려한 채용광고를 배경으로 철도청에 채용된 여승무원의 근로자 지위 확인 및 부당해고 투쟁은 2008년 소송을 시작해 만 7년여가 지난 2015년 대법원에서 결국 최종 패소했다. 2004년 철도청 자회사인 홍익회의 계약직으로 채용된 KTX 여승무원은 이후 철도유통, KTX 관광레저 등 철도공사 자회사로 소속이 계속 변경되는 위탁계약직 신분을 전전했다. 2004년 채용 당시, 1년 뒤 철도청이 공기업으로 출범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철도청의 약속과 달리 정규직 전환은 계속 미루어졌고 보다 못한 KTX 여승무원은 파업과 함께 2008년 11월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및 임금지급 소송을 냈다.
2010년 1심과 2011년 2심 법원은 KTX 여승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특히 2심 법원은 불법파견 관계라는 점까지 확인하면서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의 사용자임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4년 뒤인 2015년 양승태 대법원은 2심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철도공사가 KTX 여승무원의 사용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KTX 여승무원 2인은 철도공사 소속 팀장 1인과 함께 KTX 운행 시 안전관리 및 서비스 업무를 수행했다. 안전관리는 철도공사 직원인 팀장이, 서비스 제공 업무는 KTX 여승무원이 하기에 업무가 명확히 구분된다는 논리로 불법파견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이 청와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판결이기도 하다. 20대를 거리에서 보낸 KTX 여승무원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가 최종 부정되었다.
팔짱 낀 법관 앞에서 지금도 질질 끄는 노동 관련 재판들
최종 판결이 완료된 몇몇 대표 사례만을 언급했지만 노동자를 위한 정의는 지금도 지연되고 있다. 쿠팡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했다가 해고된 쿠팡 부천 신선센터 계약직 노동자 2인은 2020년 9월 쿠팡을 상대로 해고 무효소송을 제기했고 2024년 6월에서야 부당해고라는 1심 판결이 내려졌다. 계약직 노동자의 근로계약이 반복 갱신되는 경우 사용자의 정당한 사유 없는 재계약 거부는 부당해고로 보는 것이 이미 확립된 판례임에도 1심 판결에만 거의 4년이 걸린 것이다. 2심과 최종 대법원까지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1심 재판부가 재판을 4년 간 질질 끌면서 해고 노동자들은 다른 일을 찾지 못한 채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고 소송을 낸 쿠팡 노동자 중에는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노동자도 있다.
헌법과 법률은 법관이 신속히 재판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은 모든 국민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고, 법관 윤리강령은 “법관은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며, 신중하고 충실하게 심리하여 재판의 적정성이 보장되도록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사소송법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개월 이내에 판결을 선고하며,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두 강제성이 없는 훈시규정일 뿐이며 노동자에게는 딴 세상 얘기일 뿐이다. 한국 사회가 보수 편향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비판하지만 노동자에게 법원만큼 자본 편향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다. 정의가 구현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늘 지연되어 왔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제 풀에 꺾여 중도에 소송을 포기하거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언급한 사례처럼 대한민국 법관 모두가 노동자를 위한 정의 실현을 지연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 법원 내 노동법 커뮤니티를 만들어 공부하는 판사들도 있다. 순환보직제 때문에 노동 전담 재판부에 속한 판사일지라도 2~3년 근무하다 이동한다. 지금의 사법시스템은 법관에게 사건을 배당할 뿐, 제도적으로 노동법 전문 역량을 쌓는 시스템은 아닌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지난 수십 년 간 사법고시와 로스쿨로 대표되는 폐쇄적이면서도 고비용의 양성 경로를 통해 축적된 법 전문가 그룹이 보통 평범한 노동자, 나아가 일반 대중과 유리된 채 이너서클(inner circle)화, 기득권화 되고 있기에 나타난 결과이다. 법 조항만을 전문적·기술적으로 따지면서 노동자 대중의 절박함을 경시하기에 나타난 결과인 것이다.
높은 법대에서 들리는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라는 헛소리
행정법원이나 가정법원처럼 아예 노동법원을 설립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에서는 낯설게 들리지만 유럽에서는 노동법원이 보편적이다. 한국에서 노동법원 설치 문제가 이제야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사법개혁위원회는 하급심 강화 차원에서 노동법원 설립을 준비했다. 당시 제안된 국민참여재판 제도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결실을 맺어 시행되고 있지만, 노동법원은 장기 과제로 넘겼다. 노동문제 전문 변호사로 대법관을 지낸 김선수 전 대법관은 대법관 퇴임사에서 최소한 준참심(準參審)형 노동법원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노동 사건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반영하기 위해 노사단체가 추천·선출한 인물을 직업 판사와 함께 명예판사로 참여시키는 노동법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필자 또한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동자가 법원에 소장을 들고 오는 것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자 방법이다. 그만큼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은 대형 로펌을 앞세우며 노동자가 제풀에 꺾여 정의 구현을 포기하기를 바라 왔고 대한민국 사법부는 ‘지연된 정의’로 조력해 왔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유독 노동문제 재판에서 ‘지연되는 정의’에 대한 반성 없이, 높은 법대(法臺)에서 세상을 재단해 왔던 인텔리 의식에 젖은 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대법관들의 얘기는 표리부동한 판결을 감추기 위한 헛소리일 뿐이다. 대한민국 사법 흑역사에 기록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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