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 처단한 박기서 선생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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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선생이 10일 0시 10분께 지병으로 영면했다. 향년은 78세로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을 암살했음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사면돼 포병장교로 복귀했다. 그리고 평생을 뉘우치지 않으며 단죄도 받지 않고 살았다. 이런 안두희를 처단한 것이 바로 경기도 부천지역의 평범한 버스 기사인 박기서 선생이었다.
10일 김민웅 촛불행동 상임대표는 페이스북에서 “그(박기서 선생)는 지난 1996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자신이 손수 만든 정의봉으로 격살했던 분”이라며 “친일매국 세력들이 득세해 온 세상에서 박기서 선생 같은 분은 그야말로 의인”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수족”으로서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처단되지 않다가 “결국 박기서 선생에 의해 죄 많은 생을 마감했다”라며 “민족의 지도자를 죽이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지내는 자를 어떤 누구도 처벌하지도 못하고 그랬다가는 도리어 죄인이 되거나 보복을 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벌인 매국세력 처단은 너무도 마땅하다”라고 역설했다.
또한 “누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장군을 비난한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겠는가. 박기서 선생의 안두희 처단은 그와 다르지 않은 애국의 결단이자 민족정기의 기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분단을 막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김구 선생이 당시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제거 대상 1호”였으며 안두희가 그들의 수족으로서 김구 선생을 암살했음을 상기시켰다.
김 상임대표는 “이런 자(안두희)를 처단하지 못하고 무려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1996년, 박기서 선생의 안두희 격살은 모든 친일 매국세력, 친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외세에 대한 충격적 일격이자 경고였으며 이후의 역사에 엄중한 교훈과 행동 원칙을 남긴 쾌거”였음을 피력했다.
이어 윤석열과 내란세력이 “다시는 국민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청산되어야 한다. 80년 적폐를 끝장내는 정의봉이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한 반드시 그리될 것”이라고 적었다.
같은 날 추미애 민주당 국회의원도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님의 명복을 빈다”라며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추 의원은 “독립된 나라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을 암살해 역사를 더럽힌 자를 스스로 역사의 청소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단했던 의인이 돌아가셨다”라며 박기서 선생의 뜻을 기렸다.
박기서 선생은 생전 촛불행동이 주최하는 촛불대행진에 참여하며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윤석열을 몰아내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특히 박기서 선생은 행진 앞 대열에서 시민들과 더불어 윤석열 탄핵, 김건희 구속, 핵폐수 반대, 한미연합훈련 반대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고 실천하는 데 바친 삶, 바로 이것이 박기서 선생의 생애라 할 수 있다.
빈소: 부천장례식장 7호실 장례기간: 2025.7.10 ~ 2025.7.12 입관일시: 2025년 7월 11일 9시 발인일시: 2025년 7월 12일 5시 장지: 모란공원묘지
아래는 김 상임대표의 글 전문이다.
「처단의 원칙, “사법적 격살”의 원칙」
박기서 선생이 돌아가셨다. 향년 78세다. 그는 지난 1996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자신이 손수 만든 정의봉으로 격살했던 분이다. 그로 인해 투옥 생활도 감당하셨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박기서 선생을 “21세기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친일매국세력들이 득세해온 세상에서 박기서 선생 같은 분은 그야말로 “의인”이다. 안두희는 어떤 자인가. 육군포병 출신으로 이승만의 수족 김창룡의 지시를 받아 경교장에 계셨던 백범 김구 선생을 권총으로 암살한 자다. 그런 죄를 짓고도 이 자는 이승만의 비호 아래 풀려나고 군납품 사업으로 살만큼 사는 위세를 누렸다. 그러던 중에 권중희 선생 등 애국지사에 의해 여러 차례 처단될 뻔 했다가 부상만 입고 버티던 중에 결국 박기서 선생에 의해 죄 많은 생을 마감했다. 격살(擊殺)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가 있다. 그러나, 민족의 지도자를 죽이고도 멀쩡하게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지내는 자를 어떤 누구도 처벌하지도 못하고 그랬다가는 도리어 죄인이 되거나 보복을 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벌인 매국세력 처단은 너무도 마땅하다. 누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장군을 비난한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겠는가. 박기서 선생의 안두희 처단은 그와 다르지 않은 애국의 결단이자 민족정기의 기세다. 그렇다면 백범 김구 선생은 왜 암살되었는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조선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과 만주지역의 조선인 무장투쟁세력이 파죽지세로 관동군을 무너뜨리자 다급해졌다.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오키나와에서 묶여버린 미군의 여력이 한반도까지 가지 못하자 미국은 술책을 쓰게 된다. 바로 그 한반도가 소련과 조선인 무장투쟁세력에게 고스란히 넘어갈 상황 앞에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 분단선을 주도적으로 획정했고 이는 분단으로 결론지어졌다.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있던 소련과 조선인 무장투쟁세력의 남하 저지선이 된 38선은 잠정적인 선 긋기였으나 미군정의 지배로 말미암아 영구분단의 지배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여기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꾸민 단독정부 수립 공작, 즉 미국에 의한 재식민지화 정책이 펼쳐졌고 이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대투쟁에 나선 민족지도자가 백범 김구 선생이었다. 미군정에 대해 한때 기대를 걸었던 백범은 자신의 판단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1949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담에 참여하고 돌아왔고 그로써 백범은 단독정부를 밀고 나간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과 그의 졸개가 된 친일세력의 입장에서나 제거 대상 1호가 된 것이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이런 세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그러기 20일 전인 6월 6일에는 이들 세력이 반민특위를 공격, 무력화시킨다. 이 기반 위에 백범 김구 선생의 죽음이 이어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기를 들었던 1948년 제주 4.3 민중항쟁이 바로 이 시기에 무자비하게 토벌되고 있었다. 이로써 해방 후 미군정 치하에서 친미 매국세력으로 재빨리 변신해 목숨을 건사한 친일 매국세력들의 천하가 열렸다. 안두희는 이런 세력의 세상을 위해 추악한 짓을 벌인 자였던 것이다. 이런 자를 처단하지 못하고 무려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1996년, 박기서 선생의 안두희 격살은 모든 친일 매국세력, 친미 사대주의자, 그리고 외세에 대한 충격적 일격이자 경고였으며 이후의 역사에 엄중한 교훈과 행동 원칙을 남긴 쾌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내란-외환의 수괴이자 전범인 윤석열이 결국 수감되었다. 이자 그리고 이자와 함께 한 무리들을 어떻게 처단하면 되는지 박기서 선생의 행동이 말해준다. 윤석열과 그들 일당은 모두 필히 “사법적 격살”이 되어야 한다. 다시는 국민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청산되어야 한다. 80년 적폐를 끝장내는 정의봉이 우리 손에 들려 있는 한 반드시 그리 될 것이다. 박기서 선생의 부음(訃音)에 이렇게 추모의 마음을 다진다. <저작권자 ⓒ 자주시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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