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길이고 오만은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길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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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躬自厚而薄責於人(궁자후이박책어인)”란 말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궁자후이”와 “박책어인”으로 나누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한문 躬(궁)은 ‘몸소 궁’, 厚(후)는 ‘두터울 후’, 薄(박)은 ‘얇을 박’, 責(책)은 ‘꾸짖을 책’ 이다. 그래 문자 그대로 하면, ‘자책은 두텁게, 남 책망은 얇게’로 말할 수 있다.
이 말을 자신의 글씨와 함께 알게 해 준 김병기 서예가는 이렇게 말한다. 공감한다. “한때 우리 사회에는 ‘내 탓이오’,‘ 네 덕, 내 탓’이라는 말이 캠페인처럼 유행한 적이 있다. 자동차 뒷면 유리창에 써 붙인 사람들도 많았다. ‘내 탓’으로 돌리는 사례가 많은 겸손한 사회가 곧 평화롭고 아름다운 사회라는 국민적 인식이 자발적으로 그런 캠페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지금이야 말로 다시 한번 그런 캠페인이 일어나야 할 때이다. 정치판에서부터 ‘남 탓’ 풍조를 일소하고, 자책을 두텁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국민들도 정치란 으레 하는 책임 전가 싸움이라는 타성적 인식과 양비론의 절망에서 벗어나 ‘탓’과 ‘덕’을 바르게 판정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보다 내가 알고 있던 말은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이었다. 즉 “자신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남 대하기는 봄바람처럼”이라는 말이다. 줄여서, “춘풍추상”이라고 한다. 남을 대할 땐 봄바람처럼, 너그럽게 하고, 나를 지킬 땐 가을 서릿발처럼 엄하게 하라는 거다. 생각이 너그럽고 두터운 사람은 봄바람이 만물을 따뜻하게 기는 것과 같다. 그 반대가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내가 침묵하면 깊이 생각하느라 그런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내가 화내는 것은 주관이 분명해서 이고, 남이 화내는 것은 성격이 더러워서 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고, 나에게 엄격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하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땐, 상대에게 내가 모르는 수 많은 사연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몇 일전부터 화두였던 ‘오만’의 극복을 고민하다가 만난 문장이다. 겸손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길이고 오만은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길이다. 오만은 남 눈의 티끌은 지적하면서도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는 데에서 시작된다. 오만은 원망을 낳고, 원망을 받는 자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왕도 백성의 원망을 사서 자리에서 쫓겨나 죽음에 이른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일상에서 잘 목격하고 있다. 정치인들부터 솔선하여 “자책은 두텁게, 남 책망은 얇게”라는 공자의 말을 실천해야 진정한 새 시대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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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두는 월런 버팃이 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사람과 함께하라.” 그는 찰리 멍거와 파트너를 맺으며 서로를 더 나은 투자자로 만들었다. 잠재력을 끌어내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초월적 존재가 된다. 그런데 어떻게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만남의 방향에 따라 몸의 파동이, 삶의 동선이, 운명의 변곡점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생존을 위해 각 개체가 스스로 자기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우린 서로 만나 협력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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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나아가는 이야기를 해본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과 7만 년 전 까지만 해도 인간은 침팬지나 사자. 개똥벌레나 쇠똥구리와 같이 지구의 생태계에서 조그마한 영역만을 유지한 채, 다른 동물들과 어우러져 사는 한 종의 동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는 동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인간 개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두고 생각한다. 두뇌의 크기,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한 신체,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과 불을 이용할 줄 아는 능력 등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부분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 개개인의 능력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 역사상 최초로 보이지 않는 ‘환상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지배하는 존재가 된다. 예를 들면, 켄타우로스, 사자-인간 등등,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능력이 인류를 세상의 지배자로 만든다. 신화와 종교도 거기서 출발한다. 이 때부터 호모 사피엔스 개개인의 신체적 능력은 정말 볼 것 없지만, 특유의 사회성을 가진 사피엔스들은 서로 힘을 모아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돕고 살아왔다.
그리고 협력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인지적 진화 과정을 거쳤다. 예컨대, 저 언덕 너머에 위험이 있다고 동료에게 알려준다. 이처럼 나는 오늘도 글을 쓴 이유가 호모 사피엔스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걸 믿고, 인지적으로 진화하여 더 생존이 쉬워지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가상의 신’을 만들어 낸다. 우주의 모든 일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연을 통제하는 환상의 존재가 있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그를 ‘신’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혈연으로 맺어졌던 사피엔스들의 소규모 공동체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수많은 사피엔스들을 한대 묶는 대규모 공동체로 변화 된다. 그리하여 호모 사피엔스는 공통의 신 아래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연대감을 키운다. 그 연대로 인해,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던 사피엔스들은 유례 없이 강력한 대규모의 집단으로 발전해 나간다. 동아시아 사유체계에서는 ‘신’대신 ‘도’를 사용한다. 이 문제는 다음에 한다.
초기 종교는 생존을 기원해 주는 종교였다가, 나중에 감시자의 역할(도덕 선생님)까지 한다.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종교만 커졌다. 현재 거대 종교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행실을 권유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는 처벌하는 권선징악의 종교들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아는 사이가 아닐지라도 같은 신을 믿는다면, ‘저 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겠구나’하면서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남일지라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를 있게 한 것은 인간의 유전적 진화라고 하기 보다는 문화적 진화, 신의 탄생으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인지 력은 생물학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서로 알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150명이 최대라고 한다. (“던바의 숫자”)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신부님의 강론이다. 보이는 것만 믿었던 다른 동물들은 철창 속에서 사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은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동물 중의 한 종에 불과했던 인간이 생존을 위해 상상의 신을 만들어 그 신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동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스스로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 진화론의 생각은 문재가 있는 것이 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극복할 능력은 없다. 모든 동물은 ’만남’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다.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면, 인간은 생존 본능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보아서 할 수 있는 것이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들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조 능력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을 예술에서는 영감(inspiration)이라 한다. 영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갖고 싶을 때 갖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한 존재와의 만남으로 오는 것이 영감이다.
사람이 동물과 달리 신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을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이 신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이다. 예를 들면,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이실 생각을 미리 하면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진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것을 믿으신 것이다. 그건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면 이루어진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생존하는 것 이외에 더 높은 시선의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예를 들면, 희생, 사랑, 자기 초월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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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의 투자 멘토였던 찰리 멍거는 공군에서 기상 관측 업무를 하던 시절, 비행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종사를 살리려면 조종사를 ‘확실히 죽이는 원인’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고의 전환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멍거는 저평가된 주식을 싸게 사들이는 기존의 투자 방식을 버리고, 좋은 회사의 주식을 제값 주고 사라고 워런 버핏에게 조언했다. 그것이 버핏을 가장 부자로 만든 시즈캔디와 애플 주식을 사게 된 배경이었다. 그는 축적보다 배제를, 성공보다 실패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내게 알려준 사람이었다. 멍거는 언제나 공부하는 사람으로 “내 나이 92세에도 여전히 무식해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게 다행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발 달린 책’이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던 그가 99세로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번뜩이던 그의 눈이 이미 오래전 암흑에 갇혔다는 아이러니를 떠올렸다. 그는 결혼에 실패했고, 백혈병으로 아이를 잃었으며, 백내장 수술 실패로 50대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우뚝 선 성공 뒤에 보이지 않는 실패가 널려 있었다.
부고를 듣고 그가 내게 알려준 ‘거꾸로 사고법’에 대해 노트에 적었다. 건강하고 싶다면 ‘먹어야 할 것’이 아닌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피하자. 브레이크가 없다면 최고의 속도는 무용지물이다. ‘성공률 95퍼센트’에 사람들이 열광할 때, ‘실패율 5퍼센트’에 주목하자 같은 나의 다짐 말이다. 그것이 내가 골을 넣은 선수가 아닌, 골을 먹은 상대편 골키퍼의 일그러진 얼굴을 먼저 볼 수 있던 힘이었다. 멍거를 추모하며 생전 그가 남긴 삶의 지혜의 말을 되새긴다. “절대로 돼지랑 씨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둘 다 진흙탕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돼지는 그렇게 되는 걸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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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작가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읽은 것을 공유한다.
누군가 내게 기분 나쁜 말을 할 때
조금도 흔들리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는 나로 살아본 적이 없고,
나도 그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나쁜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고
나는 듣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로 50년을 살아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는데,
그냥 잠시 지켜 보기만 한 그가
어찌 나를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그는 그저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자일 뿐이니
계속 그렇게 살라고 그냥 두면 된다.
운이 좋다면, 열정을 일찍 찾는 것이 진짜 승리이다. 그는 사업과 투자에 열정이 있었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찰했다. 열정을 찾은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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