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공부이다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박한표  | 등록:2025-07-16 09:27:23 | 최종:2025-07-16 09:28:16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공부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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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궁남지>에 이어 찾아간 곳은 시인 <신동엽문학관>이었다, 거기서 찍은 사진이다. 제목이 <쉿, 저기 신동엽이 있다> 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시인 신동엽은 1960년대 환경에서 시대적 위기의 본질을 통찰해낸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 승효상의 신동엽 문학관의 옥상을 오르려면 조각가 구본주의 작품을 만난다. 구본주 작의 <위기의식>은 신동엽의 젊은 날을 환기시킨다. 어제 못다한 로고스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사진이다. 어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에로스가 충동적이고 카오스적인 힘이라면, 이 힘에 리듬을 부여하고 어떤 방향을 부여하는 지평선이 로고스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평선은 절대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거다, 그러니 달려가는 거다. 달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지평선의 힘이다.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끝이라는 게 없다. 목적도 없다 그저 하는 거다.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공부이다. 그 공부는 사람을 통해서 하는 거다. 사랑과 우정, 사제간의 교감으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거다. 그 네트워크가 에로스와 로고스가 만나는 삶의 현장이 된다. 이걸 고미숙은 접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접속은 고전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 이런 접속을 하면, 우리 인생이 확장되고 증식된다. 그런 접속이 일어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스토리로 만들 때 글쓰기가 일어나는 거다. 그런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인 로고스를 훈련하려면, 읽고, 쓰고 말하는 거다. 이걸 ‘지성의 연마’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연마를 통해 얻는 지성의 기쁨을 모르면, 사람들은 화폐를 향해 달려간다. 돈, 돈 돈만 외친다. 화폐로 소비를 하고, 화폐로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 유혹을 끊기가 쉽지 않다. 돈이 많으면 상품을 소유하고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권력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은 없다.

2
우리는 자신이 누군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한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이다. 왜냐하면 앎은 무지를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질문이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탐색이나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으로 이분법이 지배한 세기이다. 그리고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그 안에 온갖 지식과 정보가 그득하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에서 로고스로 변주되어야 한다. 그 때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다.

3
그 글쓰기가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이유는 여럿이다.
▪ 글을 쓰려면 사유가 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생각이 명료하고 맑아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생성되고 논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명한 언어, 논리적 일관성을 지향하게 되면 욕망의 불꽃은 저절로 사그라진다.
▪ 글을 쓰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을 하려면, 생리 구조가 수승화강(水丞火降)의 상태가 되어야한다. 수승화강은 평정의 다른 이름이다.
▪ 글쓰기에는 어떤 노동이나 운동보다 고강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욕망을 잠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으로 투여한다는 뜻이다.
▪ 글이 생산될 때의 성취감은 짜릿한 쾌락과는 클라스가 다르다.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의 파동은 온 몸을 촉촉히 적셔 준다. 이게 글쓰기가 주는 마력이다.

글쓰기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낡은 문”에서 배운 것과 같다. 그리고 사진처럼, 스스로 곡을 만들어 연주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지난 와인 강의 중에 성유진 연주자가 25현 가야금으로 자작곡을 연주하는 거다.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외로움을 달래려고 만든 곳이라 했다.

낡은 문이 가르친다 / 심수향

언제부터인가 문이 삐거덕거린다
삐거덕거리면서 열리지 않는다
왈칵 밀치면 더욱 열리지 않는 문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에 열린다

시원찮은 문 바꾸라고 하지만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일을
가르치는 문, 세상의 문은 그렇게
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문
때로는 깊은 속내 열어 보이듯
꽃 피는 소리에 가만히 열리는
낡은 문의 가르침.

4
계엄과 계몽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계몽에 관한 근대 철학 대부분은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에서 출발한다. 1784년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는 계몽을 “미성숙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계몽이라 번역하는 영어 단어 ‘Enlightenment’와 독일어 표현 ‘Aufklärung’, 프랑스어 표현 ‘Les Lumières’는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의 은유를 담고 있다. 이게 일본의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계몽’이라는 단어로 온 것이다.

성숙이란 이성을 스스로 사용해 생각하고 행동하며 삶에 대해 책임지는 인간의 모습을 뜻한다. 그렇치 못한 사람은 무속에 빠지고 망상 속에 헤매이게 된다. 지난 해말 우리는 보지 안햤는가? 더 나아가, 칸트는 이런 성숙한 인간이 ‘공적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회’,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계몽된 사회’의 증거라고 봤다. 다시 말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자기 판단’ ‘자기 행동’ ‘자기 책임’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자기 사적 유익만을 좇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 곧 공동선을 함께 고민하고 추구한다. 계몽의 궁극적 목적은 성숙한 인간이 모여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 자기 판단: 칸트는 계몽의 첫 번째 규칙이 “스스로 생각 하라” 이다. 주입된 생각이나 유행하는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말고 자기 이성으로 묻고 따져보며 판단하라는 거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의 선을 위해 무엇이 옳고 정의로운지를 분별할 책임도 여기에 포함된다.
• 자기 행동: 두 번째 규칙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이다. 만약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 저런 억울함과 고통을 당한다면, 나는 무엇을 바랄까? 자신을 이웃의 자리에 두고, 이웃이 당하는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상상력과 공감의 윤리가 요구된다.
• 자기 책임: 세 번째 규칙은 “자기 자신과 일관되게 생각 하라” 이다. 내가 억울함을 당할 때는 도움을 기대하면서, 정작 타인이 고통을 당할 때는 쉽게 외면하는 이중적 태도는 계몽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성경에 말하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 이것이 성숙한 윤리의 핵심이다.

요약하면, 편견과 이념, 당파적 사고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자기 삶에 책임지는 태도를 실천하는 일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계몽된, 아니 성숙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자기 판단’으로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기, 타인의 배려하는 자기 행동,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태도로서의 ’자기 책임’, 이 세 가지를 고민하는 아침이다.

5
좀 다른 이야기인데, 말 잘하는 사람은 똑똑해 보인다.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을 보면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확신에 찬 말을 내뱉는 사람을 보면 그 확신마저 전염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의 행동이다. 거침 없는 비판, 가슴 따뜻한 공감, 고상한 기품, 정의로운 다짐 따위는 다 소용 없다. 한 번의 행동, 반복되는 행동, 평소의 행동, 일생의 행동이 그 사람의 말뜻을 결정한다. 한평생 거짓말을 일삼은 사람에게 돌아갈 신뢰는 어차피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머뭇거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실 전체를 파악하는 자는 구체적인 사태에 임하여서는 머뭇거리며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잠시 마음을 놓으면, 우리들의 삶은 우리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 분잡에 휩쓸리다 보면 존재에 대한 질문은 스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맹목적 앙버팀만 남는다. 숨은 가빠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은 점점 사라진다. 서슴없는 언행과 뻔뻔한 태도가 당당함으로 포장될 때 세상은 전장으로 변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법, 종교의 영역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세상을 어지러움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태도가 있다면 ‘머뭇거림’이 아닐까? ‘머뭇거림’은 다음을 내포한다.
•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는 겸허함,
• 함부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
•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수용하려는 열린 마음.

‘머뭇거림’의 반대가 ‘서슴없음’이다. 시몬느 베이유(Somone Veille)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머뭇거림”이라 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머뭇거림은 답답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머뭇거림 속에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하거나, 응대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정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확신은 고단한 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지만, 그 확신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성에 갇힐 때는 아집에 불과할 수 있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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