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가 7년 만에 다시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앞서 헌재는 2012년 “(태아에게) 별개의 생명권이 인정돼야 한다”며 ‘낙태죄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태아 생명권은 낙태죄 폐지에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핵심적 근거의 하나입니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 등 종교계는 ‘태아 역시 신이 내려준 생명이므로 낙태는 살인과 다름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요. 천주교 주교회의 가정과 생명위원회, 프로라이프청년회 등 종교단체는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낙태죄 헌법소원 기각을 헌재에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인이 낙태에 대해 날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현행 낙태죄가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 성찰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는데요, 낙태를 죄악시하는 전통적 관념을 거부하고 나선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낙태는 죄악’이라고 말하는 대신 “신은 낙태한 여성을 ‘잘했다’고 칭찬해주실 것”이라며 힘주어 말했습니다.
■ “신은 여자만 죄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제 삶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낙태를 선택했어요.”
- 여성A(임신중절 경험자, 모태신앙 크리스천)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교회 안에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이 굉장히 많아요.”
- 달밤(감리교여성지도력개발원 상임연구원)
“저희 어머니도 저를 임신하고 중단하려는 시도를 하셨었대요.”
- 자캐오(대한성공회 사제)
이들은 모두 현행 낙태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여성만 죄인이 되는 점을 꼽았습니다.
“낙태한 여성은 법적 처벌의 자리에 놓이지만 남성의 자리는 아예 없어지게 되더라고요. (임신중절의) 책임을 여성 혼자 지게 되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밤)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현행법 하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맞닥뜨린 여성들은 적절한 의료를 안내받지 못하고,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임신중절을 시도하기에 이릅니다.
“알약으로 임신중단할 경우에 주의해야 할 것들을 듣고 싶었는데 병원에서 아기 수첩 만들 거냐고 해서 ‘아니오’라고 했더니 어떤 것도 묻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초음파 사진 두 장 받고 나왔어요.”(여성A)
“이주민과 함께하는 용산나눔의집 원장으로 와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분들이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자캐오)
하지만 신은 여성만 고통받게 되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입니다. 자캐오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에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동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마치 신을 대하는 것처럼요. 그러면 한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구조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은 누군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겁니다.” (자캐오)
■ “낙태죄 개선은 반대…아예 폐지돼야”
이들은 또 신앙인들이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며 강조하는 소중한 ‘생명’에 정작 ‘신이 사랑하시는’ 여성은 배제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길일까요?”(여성A)
“낙태를 살인이라고 말해온 건 교회지 신이 아니었어요. 낙태는 ‘생명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이렇게 단순하게 바라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신학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과 대화해야 합니다.”(달밤)
결국 이들은 임신중절이 허용되는 상황을 폭넓게 하는 등 낙태죄를 개선하는 것을 넘어 낙태죄를 아예 폐지하는 것이 신의 뜻에 부합하는 길이라고 강조합니다.
“여성을 처벌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낙태죄가 폐지되더라도 낙태를 죄악으로 보는 종교적 관념에 대해서도 계속 성찰해야 할 것이고요.”(달밤)
헌재는 오는 11일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형법 269조(자기낙태죄)와 낙태를 도운 의사 등을 처벌하는 형법 270조(동의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선고하게 됩니다. 어떤 결론이 내려질까요?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당신들의 차별과 낙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여성A)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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