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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원숭이' 보듯 쳐다봤지만, 보란듯이 합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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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④ 형틀목수 기능공 신연옥 씨 박정연 기자    |    기사입력 2023.10.01. 05:07:11 '힘' 좀 써야 한다는 노동 현장, 그곳에도 여자가 있습니다.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기 힘들다는 노동 현장에서 차별과 배제마저도 이겨낸 이들이죠. 남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블루칼라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기술직 여성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남성중심적 문화가 지배적인 현장에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를 버텼습니다. 여자 화장실이 없는 현장,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해야만 했던 무시와 젠더폭력 속에서도 자신만의 기술을 터득해 당당하게 '기술직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이어 나간 이들을 <프레시안>이 만났습니다. 자신이 흘리는 땀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성들은 건설 현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도면을 그리는 먹매김 노동자, 건물 뼈대를 이어 거푸집을 만드는 형틀 목수, 자동차 제조 공장에서 부품을 염색하는 도장노동자 등 <프레시안>이 만난 블루칼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중력을 거슬러 솟아오른 콘크리트 건물들은 '형틀목수'에 의해 쌓아 올려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노동자가 설계 도면을, 철근노동자가 뼈대를 잡으면 그 위에 폼이라 불리는 합판으로 촘촘하게 거푸집을 만들어 올리는 게 형틀목수의 일이다. 그 거푸집 안으로 콘크리트가 타설 되고 양생이 완료되면 한 층의 건물이 우뚝 서게 된다. 형틀목수는 재차 그 위를 딛고 또 다른 기둥과 보를 세우며 층을 쌓아 간다. 그렇게 층들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건물이 완성된다. <프레시안>은 지난 21일 경기도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 형틀목수 기능공으로 6년 째 일하고 있는 신연옥 씨를 만났다. 신 씨는 핀(폼을 고정시킬 때 사용하는 연장)이 들어 있는 못주머니를 차고 망치와 시노(손지레)를 숟가락과 젓가락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15킬로그램이 넘는 폼을 거뜬

조성렬 “국가별, 지역별 한민족 공동체 만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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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뉴스 월례강좌서, “재외동포 역량 최대한 활용해야” 기자명  김치관 기자     입력 2023.09.30 15:56    수정 2023.10.01 06:41    댓글 0   “국가별, 지역별로 한민족 네트워크 또는 한인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한민족 네트워크에서 국가별, 지역별로 한민족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오는 10월 5일, 재외동포청이 설립되고 처음으로 맞는 ‘세계 한인의 날’을 앞두고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재일동포, 재중동포, 재러동포, 재미동포 다 성격이 다르다”며 ‘세계 한인 네트워크’ 보다는 국가별, 지역별 네트워크 구축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전태일기념관 2층 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9월 통일뉴스 월례강좌’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재외동포 -한민족공동체 네트워크의 모색”을 주제로 강연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전태일기념관 2층 공연장에서 열린 ‘2023년 9월 통일뉴스 월례강좌’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재외동포 -한민족공동체 네트워크의 모색”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조천현] 조성렬 전 총영사는 “10월 5일 ‘세계 한인대회’를 하고 있다”며 “옛날에는 한민족이라고 했다가 최근에는 한인으로 이름이 바뀌는 추세”라고 전했다. 한국인, 한인, 한민족, 한인계의 개념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한국을 중심으로 해서 글로벌을 하다 보니까 한국 정부의 입김이 굉장히 강하게 작용한다”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런 네트워크의 책임자들이 바뀌고 그래서 내부 파벌들이 많다”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미주평통 부의장을 강제로 직위 해제를 했는데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예시하기도 했다. 조성렬 전 오사카 총영사는 '미스터 션샤인' 드라마로 강연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사진 - 조천현] 나아가 재외동포들의 참정권에 대해 “항상 야당 지지가 많아서 지금 국힘당이나 이런 데서는

오죽했으면 국방장관 간첩설까지... 이승만·신성모·채병덕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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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15]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나라를 구한 6사단 23.09.30 19:11 ㅣ 최종 업데이트 23.09.30 19:11 ▲  1948년 5월 10이 모진교에 위치한 23전초중대 로이드 스탠클리프 중위가 38 경계표시 위에서 찍은 사진 ⓒ 자료사진   대양 건너 남의 땅의 지도에 자를 대고 간편하게 '찌익' 그은 선이 38선이다. 바다와 섬과 강과 산을 넘어가며 남과 북을 깔끔하게 갈랐다. 그 가운데 북한강 다리 하나의 바로 북쪽을 지났다. 남쪽을 점령하기로 한 미군은 다리 북단의 공간이 초소를 만들기에는 너무 밭아서 다리 남단에 초소를 세웠다. 다리 중간에 38이란 숫자를 페인트로 큼직하게 써놨다. 이 다리는 모진교. 이곳의 북한강은 오래도록 모진강으로 불려왔기 때문에 1930년대에 세워진 이 다리는 모진교라고 명명했다. 춘천댐에서 물길을 따라 5킬로미터 정도 올라간 지점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춘천시 사북면이다. 다리의 북단은 사북면 원평리 산70-5 이고, 남단은 인람리 산56-2이다. 모진교는 지금은 지상에나 공중에서는 보이지는 않는다. 춘천댐이 물을 가두자 수몰된 것이다. 모진교의 북쪽에는 말고개가 있다. 지금은 말고개 터널이 뚫려 대부분의 차량은 터널로 통행하고 말고개 산길은 한적한 옛길로 남아 서서히 잊혀가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북한은 5시), 운명의 그날 그 시각, 북한 인민군의 개전포격은 말고개 후방에서 시작됐다. 모진교 남쪽에는 국군 6사단 7연대 3대대 9중대가 배치돼 있었다. 포격 목표의 하나는 모진교 남쪽의 372고지의 관측소. 한 시간 가까이 포격이 계속됐다. 관측소 대원들은 전원이 전사했다. 대기하고 있던 인민군 보병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건넜다. 그날 그 시각,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족상잔의 전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압도적 전력의 인민군, 모진교를 건너다   ▲  모진교 기사연재 그래프 ⓒ 박종현   내 평생 쌓여온 기억에서 한국전쟁 개전 초기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