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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1981년 2월, 광주는 ‘전두환의 미소’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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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입력 : 2020.11.30 06:00   수정 : 2020.11.30 06:00   전두환씨 대통령 시절 광주 방문 사진 69점 입수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5·18민주화운동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광주 동구 금남로를 지나며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위 사진). 하지만 제12대 대통령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광주를 방문한 대통령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은 전씨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고 있다. 금남로는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숨진 곳이다. 이 사진들은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받았다. 5·18 유혈진압 9개월 뒤 ‘개선장군’처럼 금남로서 손 흔들어 시민들 ‘싸늘’…30일 광주지법 사자명예훼손 혐의 선고공판   번호판 대신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표장’을 단 검정 차량 행렬이 도로를 지나고 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탄 남성은 차창 유리를 내리고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행렬이 지나고 있는 곳은 광주 동구 금남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시민이 숨졌던 곳이다. ‘개선장군’처럼 광주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남성은 5·18학살의 책임자로 꼽히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89)다. 금남로를 위풍당당하게 ‘행차’하고 있는 전씨의 모습은 5·18 유혈진압 9개월 뒤인 1981년 2월18일 찍혔다. 경향신문은 29일 정보공개를 청구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서 전씨가 재임 당시 광주를 방문한 사진 69점을 받았다. 전씨의 사진들은 당시 공보처 홍보국 사진담당관이 촬영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전씨는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매년 수차례 광주를 찾았다. 부인 이순자씨(81)와 동행한 행사도 여럿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사망한 금남로를 전씨 일행이 지나는 모습이다. 이 사진들은 ‘대통령선거인’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1981년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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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민간인학살 유족 노상도 노현섭 형제의 고난기 20.11.30 08:40 l 최종 업데이트 20.11.30 08:40 l 박만순(us2248) ▲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따르릉' "예, 마산유족회입니더." "지는 부산기지사령관 박정희라 캅니더." "그런데예?" "내도 유족인데,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동래유족회'가 결성되던 1960년 8월 25일 오전 마산유족회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였다. 당시 마산유족회는 마산 중앙동 부두노조 사무실에 공간을 마련해 사용하고 있었다. 마산유족회의 노현섭은 자유노련 소속 부두노조 위원장이었다. 유족회로서는 군인이, 더군다나 고위 장성이 관심을 갖고 식사를 하자고 하니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슨 의도가 있는가 하는 의심에 실제로 식사에는 응하지 않았다. 노현섭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마산유족회를 결성했다. 그는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의 전화를 받고 한껏 고무됐다. 박정희는 대구 10월 항쟁 사건으로 희생된 박상희의 친동생이었다.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은 선산유족회 부녀부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귀분은 경북 지역 유족회 활동에 적극 발품을 팔았다. "내 시동생이 부산기지사령관이라예. 울산에서 유해 발굴할 때 트럭도 내줬다 아입니꺼." 조귀분은 동네방네 다니며 자신의 시동생 박정희를 칭찬했다. 야누스의 얼굴을 한 박정희 노현섭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족회 임원들은 박정희를 같은 유족이자 한 식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너무나 순진한 생각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 후인 1961년 5월 18일 전국유족회장 노현섭(1921년생)은 영장도 없이 202방첩대에 다짜고짜 연행됐다. 그는 마산교도소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61년 8월 23일 서울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됐다. 이후 그는 &#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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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벽예감 421]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거대한 시한폭탄 한호석(통일학연구소 소장)   |  기사입력 2020/11/30 [09:39] <a id="kakao-link-btn" style="font-variant-numeric: normal; font-variant-east-asian: normal; font-stretch: normal; font-size: 12px; line-height: 16px; font-family: dotum, 돋움, Arial; color: rgb(102, 102, 102); text-size-adjust: none;"></a> <차례> 1. 다량생산 시작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2.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실패작이다 3. 갱도관통폭탄으로 갱도진지를 파괴할 수 있을까? 4. 무인정찰기와 전파교란공격 5. 요새 너머에 군종합동타격력     1. 다량생산 시작한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2020년 9월 4일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KTSSM)이 100km 이상 떨어진 표적에 명중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을 자기 웹싸이트에 올려놓았다. 이 사진은 2017년 7월 29일에 이미 공개된 적이 있다. 북측 국방과학원이 2017년 7월 4일에 진행한 화성-14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보고 자극을 받은 남측 국방과학연구소는 그로부터 며칠 뒤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 시험발사를 진행했고, 명중장면을 찍은 사진을 2017년 7월 29일 세상에 공개했던 것이다.    위성항법장치(GPS)로 유도되는 한국형 전술지대지미사일은 타격오차범위가 2~3m로 초정밀타격을 할 수 있고, 사거리는 120km이며, 탄체지름은 600mm이고, 500kg 열압력탄두가 장착되어 1.5m 두께의 콘크리트를 뚫을 수 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남측 국방과학연구소가 전술미사일 명중장면을 찍은 사진을 외부에 공개한 것은, 자기들이 북의 갱도진지를 파괴하는 미사일을

전세난의 진짜 원인 찾기, 개혁에는 쉬운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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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다주택자 세대 분리와 증여가 만들어낸 전세난 이성영 희년함께 토지정의 팀장    |    기사입력 2020.11.30. 09:27:07 최종수정 2020.11.30. 09:31:46     전세난의 근본적 원인 : 1주택 실수요/다주택 투기꾼 프레임의 부동산정책 기조 정부의 전세 대책에도 전세 가격이 꺾일 기미가 없다. KB 월간 주택가격 동향 기준으로 10월 전국 전세수급지수가 191.8로 2001년 8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1월 26일 한국감정원의 주간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지난 19일 정부의 전세 대책 발표 이후인 11월 넷째 주에도 서울아파트 전세 가격은 0.15% 상승하며 74주 연속 상승을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 정책효과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며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결국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정부의 정책을 성공이라 말하기 어렵고, 고통받는 국민들께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며 사과하고, 19일 전세 대책을 발표하며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도 "새로 전셋집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며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11.19 전세 대책에서 정부는 전세난 원인으로 저금리 추세와 갑작스러운 가구 분화로 인한 가구 수 증가를 꼽고 있다. 일리 있는 원인 분석이긴 하지만 왜 갑자기 8월 이후에 전세난이 심화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저금리 기조와 가구 분화가 8월 이후 갑작스레 일어난 것인가? 갑작스러운 가구 분화가 일어났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전세 시장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진보와 보수가 주장하는 전세난 원인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전세난의 주요 근거는 저금리 추세와 매매가 상승 기대 하락이다. 저금리 추세는 전세를 받아 집주인이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을 낮추기 때문에 전세주택 공급 물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집주인은 전세금을 받아 은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