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 해외동포의 평양 일기 1

 

오인동  | 등록:2021-01-08 14:30:02 | 최종:2021-01-08 14:40:3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 해외동포의 평양 일기 1       
1992– 2008 오인동


남에서 의과대학 마치고 강원도 철원휴전선 경비 3사단 23연대군의관복무를 시작으로 3년 뒤 1970년 말, 미국에 유학 왔다. 정형외과 수련에 이어 1975년, 하버드 의대 병원(MGH)에서 인공엉덩이 관절수술(Total Hip Replacement)을위한 관절기 실험연구로 학술상을 받았다. 새로운 인공관절기 고안으로 11종의 미국발명특허를 받자 ‘80년대 초,국제의료기회사들이 상품화 했다. 북미주와 유럽, 모국과 아시아 나라들에서 강연과 시범수술 등으로 10여 년 바쁘게 지냈다.

LA(로스앤젤레스)교향악단 이사, California Club회원 등 미국주류사회에서 활동하던 중 1990년, La 한인 동포사회의 현실에도 눈 뜨게 되어 정치력 신장을 위해 정동수/촬스김 등 1.5세청년들의 Korean American Coalition(한미연합회)이사장으로 봉사하던 중 1992년 4.29 La흑인폭동도 한인단체들과 지켜냈다. 그해 10월, 재미한인의 사회권영세회장단의 방북학술교류단원으로 평양에 갔다. 고려호텔에서 인공고관절치환수술 강연 뒤 인공관절기, 시청각교육자료와 논문들을 기증하고 북의 사적지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과 금강산도 돌아보고 귀국했다.

[ 아래는 2010년 ‘창비’가 출판한 ‘의사 오인동의 북녘 방문기’ <평양에두고온수술가방>속의 글이다.]

“우리 일행의 송별의밤, 우리는 마치 통일을 이룬 기분이었다. 술이 거나해진 나는 리정호동무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리 동무, 나 내일 평양 못 떠나는 거 아냐?”  물으니,  곧 그가 “무슨말……? ”
“아, 내가 북에 심한 말 많이 했잖아. 강연 때 CIA다, 안기부다 떠들어대고, 의사들이 치료하는 것에 대해 해야 할 말 못 하면 되겠느냐, 훈장을 주렁주렁 가슴에 단 혁명원로들 데리고 병정놀이 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위대한 수령께선 이제 좀 쉬셔도 된다…… 이러다간 나 아주 공화국품에 안기는 거 아니냔 말이야.” 했더니 그가 곧, “아따, 오 선생, 떨리기는 떨리는 모양이구먼. 공화국에는 떠는 사람 둘 자리 없이요”
모두들 한바탕 웃고 또 마셨다. 밤이 깊도록 우리는 노래도 부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내일이면 헤어져야 할 아쉬움의 마지막 정을 쌓았다. 이들이 정말 우리가 그토록 미워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사람들 이란말인가?”

1992년 10월, 평양청년호텔: 재미한인의사회장단의 학술교류방문
왼편부터 오인동, 이만택부회장, 김용성국제부장노용면전회장부부, 권영세회장
그 청년호텔에서 아랍계의 청년들이 우리나라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1992년 10월: 평양고려호텔강당에서 인공엉덩이관절치환수술강연

1992년: 북정형외과의사들: 왼편부터: 장창호연구실장, 문상민평양의대정형외과과장,
 신성호함흥의대정형외과과장,적십자병원리영구정형외과원사들과대화

1992년 10월: 저자고안의SpectronToal Hip Prosthesis인공엉덩이관절기들,
수술법교재, 시청각교육자료, 수술교과서, 논문등북에기증

1992년10 월: 묘향산국제친선전람관
전통적인조선식지상-지하전람관에는 김일성주석이
세계 여러나라 수뇌들로 부터 받은 각종기념품들을
전 인민들이 볼 수 있게 전시 되어 있었다.

1992년 10월: 금강산목란관점심식사 뒤 잠에 떨어진 나를 가련하게 보는 북 리정호지도원, 권영세 재미한인의사회장과 금강산 안내원의 웃는 모습……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가?
말로만 들어온 조국반도 제일의 금수강산의 다양한 모습이 과연 제1이었다
.

북에 다녀온 뒤 LA 한국문화원에서 분단역사를 읽던 중, 강대인 박사로부터 김대중 야당 총재의 인공엉덩이관절수술 의뢰를 받고 1995년, 서울에서 주치의들과 함께 진단하고 수술 결정을 했다.식사 끝에 부인 이희호 여사가 조용히 나를 한편으로 데리고 가서, “선생님, 저 양반은 의사가 처방한 약도 음식도 제대로 따르지 않으니 이번 수술뒤엔 아주 단단히 주의를 주셔 달라”고 하기에 어쩜 아내 말 듣지 않는 나와 똑같아 속으로 웃었죠. 수술은 미국서 하기로 했는데 얼마 뒤 남에서 해야겠다고, 그러다가 그래도 미국에서 해야겠다고 하던 중 남녘 정치계의 여러 상황변화로 연기되다가 선거가 다가오며 취소되었다. 김 총재가 건네준 책 [3단계 통일론]도 읽으며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미국주류사회의 분단된 Korea관련 회의들에참여해 통일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토론도 하다 보니 한반도 문제 미국 전문가들과 친하게 되었다.

1995년 11월 서울: 김대중 총재 인공고관절치환수술비밀상담, 이희호 여사(빨강색옷)
주치의 장석일과 윤영구박사, 강대인 재미동포 치과의사
북쪽으로 청와대가 보이는 롯데호텔 메트로폴리탄클럽에서

1990년대 중반, LA이채진 교수와 북 학자들을 미국에 초청해 미주동포와 미국학자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기획해 보았으나 미국의 북 인사 입국 불허로 이루지 못했다.‘97년 봄, 서울국제통일토론회에서 임동원총장을 만나고, 미국 대북 관료 Quinones와 함께 세종연구소에서 이종석 연구원도 만났다. 그 가을, 나는 LA 재미동포 이활웅, 문갑용, 차종환, 은호기, 배연원, 함승아, 조경미, 백승배, 조재길, 곽건용등과 <Korea-2000>통일연구회를 결성하고 <남북지도자에 드리는 통일정책 건의서>를 작성했다.

1997년 가을:  미국로스앤젤레스재미동포통일운동선배/동료들과 Korea-2000연구회 결성: 이활웅, 문갑용, 은호기, 차종환, 배연원, 오인동, 함승아, 조경미, 백승배부부, 조재길, 곽건용등….

1998년 1월, 서울서 임동원 총장과 만나 ‘건의서’를 김대중 당선자에, 중국서 김현환 박사와 평양에 가니 통일전선부신병철 국장/최승철부국장을 만나  <건의서>를 김정일 총비서에 전했다. 한편 ‘92년 방문 때 만났던 보건성 최창식 부상과 재회하니 평양의대와 의학교류를 위한 논의도 했다. 그리고 김일성대학 리학수 철학교수와 윤병철 참사가 찾아와 북의 정치이념과 사상과 사회제도에 대한 설명과 질문을 나눴다. <통일정책 건의서>를 읽은 김일성대학 박동근 정치경제학 교수와 만나 대화하며 역사박물관도 돌보며 밤늦게까지 보드카도 마시며 토론했다. 유럽동포사회에서 강연도 한 적이 있다는 그는<건의서>에 동의한다며 실행여부는 내가 만난 통일전선부간부들에 달렸다고 했다. 박 교수는 민족통일연구실장이며 김정일 총비서의 대학시절부터의 스승인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임동원 총장이 권했던 김용순 비서는 만나지 못했다.

1998년 1월:Korea-2000 의[남북두지도자에드리는통일정책건의서] 를 서울에서 김대중대통령당선자에–평양에서 김정일총비서에 전달.
서울에서 임동원총재–평양에서 통일전선부최승철/신병철통전부국장과만났다

위: 평양의 금수산 기념궁전이고 아래: 김일성대학 리학수철학교수와 윤병철참사
북의 정치이념과 사상과 사회주의제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950년 남북전쟁 뒤 1970년대까지 북 경제는 남보다 우월했으나 공산권 붕괴 뒤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에 시달렸다. 그 겨울, 평양 거리에 걸린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가자”는 표어도 봤다. 난방이 안 된 평양대극장에서 내일의 북을 이어갈 중학생들에게 보여주는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 하라> 공연도 보았다. 호텔로 가는 길에 본 표어 “나중에 웃는 자가 더 행복하다” 의 의미는 무엇일까 했다. 서울에 들려 임동원 총재와 만나 경과를 알려 드리고 귀국했다.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되어 서울에 다녀온 뒤, Korea 통일관련 미국논단PCIP, WAC등에 참여하며 Nautilus논단에 기고하고 NYT, LA Times 신문 등에 기고도 했다.

위 왼편:‘98년 1월: ‘92년 첫 방문 때 만났던 북보건성 최창식부부장과 재회,
재미한인의사회의제 2차 평양의학학술 교류에 대한 논의
아래 오른편: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 박동근교수, 민족통일연구실장- 김정일총비서스승
남북 두 지도자에게 드린 조국통일정책건의서 내용에 대한 논의

2006년: 광주6.15 선언기념 남북대회에 최승철이 북대표 단장으로왔다.
필자–임동원–최승철(1998년 1월 평양에서 만났던 통전부 부국장)
‘98년1월: 평양에서[Korea-2000]의<통일정책건의서>를 최국장에 건네고 임동원총재의 남북대화 계획도 전했었다.

2006년: 6.15광주기념대회: 왼편부터문정인교수, 하나건너이종석장관, 오인동, 임동원장관, 북최승철대표단장, 현대현정은대표

2000년, 김대중/김정일 6.15공동선언으로 분단이래 처음 남북 교류·왕래가 시작 되고2005년, 6.15선언실천 남.북.해외측위원회가 발족되어 광범위한 활동도 하게 되었다. ‘06년, 광주 6.15 기념대회에 8년 전, 북에서 만났던 최승철이 북 대표단장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손을 잡았다. 승진한 최창식 보건상도 왔다며 그 식탁으로 가니 3번째 만나는 우린 너무나 반가웠다. 그가 “그동안 왜 한 번도 북에 와주지 않았냐”기에 나도 곧, 농조로 ‘한번 초청이라도 해봤나?’ 했더니 머쓱해하며 대답을 못해요. 곧 ‘아냐, 농담이야! 농담…’ 하며 ‘남녘 의사들도 많이 방문했다던데?’ 하며 분위기를 바꿨죠. 동년배 북 인사들과는 이런 걸쭉한 대화도 해요.

2007년 9월: 정상회담차 노무현대통령이 휴전선을 넘자 북측에서 맞이하는 최승철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평양<10.4 남북평화번영선언>을 했으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시작 되어 6.15 선언기념 금강산 북.남.해외위원대회에서 해외동포위원회 김천희부국장과 만나니 평양의대병원 선생들이 나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는 얘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해 10월, 6.15미국위는 워싱톤에서 유럽, 호주 등 해외지역위원들과 통일토론회를 마친뒤 박소은, 이행우위원장과 뉴욕 북 유엔대사관 신선호 대사/박성일 참사관을 만나 통일촉진 대화를 나눴다. 그 뒤 박 참사가 관절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친척의 치료에 자문해 주다 보니 광주에서 최 보건상을 당황케 했던 일이 되살아 왔다. 박 참사에게 인공관절수술을 돕기 위해 평양방문을 주선해 달라 했다. 그리고 마침,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오~ 필승Corea’함성을 들은 뒤 호기심에 연구하기 시작한 모국의 로마자 국호 <꼬레아Corea, 코리아Korea>의 연원에 대한연구서가 ‘08년출판되자 문화부 선정 역사분야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그 책 몇 권을 북사회과학원에 전해 달라고 박 참사에게 건넸다. 이렇게 뉴욕의 조선유엔대사관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편 계속>

‘08년: 6.15기념금강산삼일포: 북해외동포위 김천희부국장(맨왼편)과 만난 6.15해외동포위원들. 평양의학대학병원 의사선생들이 나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오인동 (Indong Oh) 약력

인공관절수술전공의사(은퇴),6.15해외측미국위공동위원장
하버드의대(MGH)교수,미국고관절학회:J.Charnley, F.Stinchfield상
인공고관절기/기구고안 (HD-2, Spectron, Biofit, Tifit System등)
인공고관절논문:70여편,수술법저서:14권, 미국발명특허:11 종

RoKorea - 윤동주민족상 - 윤동주사상선양회 - 2013
DPRKorea - 명예의학박사 -국가학위학직수여위원회- 2012
RoKorea- 한겨레통일문화상 - 한겨레통일문화재단? 2011

<밖에서그려보는통일의꿈> - 남북연합방, 다트앤, 서울, 2013
<평양에두고온수술가방> - 의사오인동의북한방문기, 창비, 서울,2010
<통일의날이참다운광복의날이다> - 밖에서본한반도, 솔문, 서울,2010
<Corea ,Korea>- 서양인이부른우리나라국호의역사, 책과함께,서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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