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경총에서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중대재해법’) 시행령의 개정에 관한 의견(건의서)을 제출하였다. 시행령 개정 논의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새정부의 임기가 시작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기다렸다는 듯이 시행령 개정의 필요성과 그 내용에 대한 의견을 제출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지난해 중대재해법이 제정된 후 시행을 앞두고 시행령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확인됐던 경영계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영책임자의 범위를 구체화하고, 경영책임자 등이 부담하는 의무의 내용을 시행령에서 구체화하되 현행 시행령에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되어있는 부분은 삭제하고, 뇌심혈관계 질환과 같이 개인적 요인으로 발생할 수 있는 질환으로 사망한 경우는 법이 적용되는 사망자에서 제외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총의 의견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위임하지 않은 경우에도 시행령에서 정하자고 하고 있다. 특히 경영책임자의 범위와 관련해서, 법에는 “사업을 대표하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고 정해져 있을뿐, 그밖에 시행령에 위임한 내용은 없다. 그런데 경총은 시행령에 안전보건과 관련한 업무를 위임받은 사람을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러한 자를 선임한 경우에는 대표이사 등은 안전보건 관련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조항까지 명시적으로 두자고 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그동안 재해가 발생하면 안전보건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책임자 선에서 책임을 부담하는 것에 그치고, 실질적으로 전반적인 경영방침, 예산 등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경영책임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못해왔던 상황을 반영하여 ‘경영책임자 등’을 의무의 주체로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여부를 수사 중인 사안에서 대표이사의 책임이 문제되고 있고, 심지어 대표이사가 증거를 인멸하도록 지시한 정황까지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시행령에 위임할 근거도 없이 법이 정한 것보다 협소한 범위로 내용을 좁히고, 나아가 대표이사 등의 책임을 면하는 근거규정까지 두자는 것은 결국 법 개정을 거치지 않고 법을 무력화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경제 6단체장들과 오찬 회동을 갖고 있다. ⓒ제공 : 뉴시스
중대재해법 시행령 개정 의견 빌미로 법 무력화하고 개정 필요성까지 제기하는 기업측 OECD 산재사망률 1위 현실은 보이지 않는가
중대재해처벌법은 현장에서 노동자, 시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경영책임자 등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의무를 정하고 이를 위반하여 사상의 피해가 발생하였을 때,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 경영책임자 등을 처벌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즉, 법이 정하고 있는 의무를 위반한다고 하여 곧바로 처벌되는 것이 아니고, 의무위반 사실이 확인되고 사상의 피해가 발생하고,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총의 건의 내용을 살펴보면, 법의 존재 자체로 경영책임자 등이 처벌을 감수해야하는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법 개정이 시급히 필요한데, 법을 바로 개정할 수 없으니 시행령이라도 시급히 개정해야한다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개인적 요인으로 발병할 수 있는 뇌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한 경우 법이 적용되는 ‘사망’의 경우에서 제외하자는 것도, 구체적인 의무의 내용을 시행령에서 삭제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자고 하는 취지도, 살펴보면 사례가 발생하면 무조건 경영책임자 등이 처벌받는 것을 전제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견이 제출되는 것은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부터 ‘규제완화’를 이야기하고,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인해 해외자본의 국내 투자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법 개정을 검토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과 일맥상통해 보인다. 법 제정에 대한 요구는 십여년 넘게 계속되었고, 그 사이 수많은 이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 많은 재해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수십 년간 반복된 한 명, 한 명의 죽음으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만들어진 이 법을, 시행된 지 다섯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시행의 효과가 없고 경영자들에게 부담만 가중한다는 이유로 시행령 개정, 나아가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의 안전이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하루에도 몇 명씩 사망하는 현실이 과연 법 시행의 효과가 없어서일까, 법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고질적인 안전경시 문화와 안전불감증 때문일까. 국제기준에 맞춰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이들의 눈에는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자신들은 변하지 않으면서 법을 사실상 무력화시킬 방안을 이야기하고, 이에 발맞추어 규제완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评论
发表评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