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프랑스 100년전쟁의 원인과 결과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9) 프랑스카톨릭, 영국성공회의 분열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2/08/18 [18:27] 최종편집: ⓒ 자주민보 중세기 유럽 역사를 고찰하는데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오늘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결탁하여 서구열강의 중심에 서서 제3세계 나라들을 괴롭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 발생한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오늘의 서구열강들은 그 어떠한 죄의식을 표현하지 아니하고 비극적인 100년 전쟁에 대하여 올바른 논평과 정직한 평가를 기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눈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저지른 비극적인 100년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야만 영국과 프랑스가 중세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에 끼친 모든 부정적인 영향들을 올바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1. 영국의 원주민과 노르망디의 침략 영국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켈트족인데 켈트족은 영국 본토에서 약 2400년 동안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원주민 켈트족은 그들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리스어로 그들을 “프레타니카”라고 불렀다. 이 그리스어가 원인이 되어 훗날에 영국을 “브리튼”, “브리티쉬”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켈트족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고 있으면서 로마에 동화되고 있었으나 로마제국이 망한 후에 켈트족도 패망하여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 여러 부분으로 분리됐다. 영국 땅에서 켈트족을 추방하고 점령한 세력은 “색슨족”과 “앵글로족”이었다. 이 두 개의 종족은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종족으로 동화되었으며 하나의 민족으로 1500년 동안 살아오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성”을 형성했다. 이들은 영국인의 땅의 명칭을 “앵글로족이 사는 땅”이라고 스스로 불렀다. 이러한 역사가 유래되어 오늘의 “잉글랜드”가 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잉글랜드 본토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던 토속 민족들의 소중한 종교를 뿌리 채 타파하여 멸종시키고 카톨릭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영국은 기독교국이 되었다. AD 7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인들은 알프레드 대왕의 통치와 전통을 확립하여 수백년 동안 장구한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 세기의 오랜 평화와 번영 후에 영국은 AD 780년대에 이르러서 바이킹족의 침략을 받는 운명에 처하게 됐다. 바이킹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북쪽에서 남하하여 내려온 원주민인데 바이킹족이 잉글랜드를 침략한 때는 8세기 중엽부터 10세기 말까지로, 약 200년 동안 영국을 지배했다. 바이킹족이 무력으로 영국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영국이 침략자인 바이킹족을 지배하고 흡수하고 있었다고 역사는 전한다. 1066년에는 프랑스의 북부 지역에 속하는 노르망디의 통치자인 윌리엄 장군이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잉글랜드 땅에 윌리엄 왕조를 새로 창건했다. 노르망디 사람들 역시 원래는 바이킹족에 속하는 같은 종족들인데 북유럽에서부터 남하하여 프랑스의 북부지역에 정착하여 프랑스에 종속된 민족으로서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 노르망디의 통치자 윌리엄 장군은 프랑스의 왕정에 예속된 통치자로서 프랑스왕의 지시를 받고 있는 사실상 왕의 신하의 신분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왕의 전통과 권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영국 왕실과 프랑스 왕실은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노르망디의 윌리엄 장군(윌리엄 공)이 잉글랜드를 침공한데 대하여 영국인들의 거센 반격이 1066년부터 1075년까지 계속됐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윌리엄 장군의 통치에 곧 순응하게 되었고 결국 윌리엄 장군의 잉글랜드 정복은 성공했다. 이후 윌리엄 장군이 영국의 왕이 되어 윌리엄 왕조는 1066년부터 1200년까지 134년 동안 계속됐다. 윌리엄 왕조가 134년 동안 영국을 통치하는 정권하에서 영국은 완전히 프랑스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대거 영국정부의 고위관직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영국의 윌리엄 왕가와 프랑스의 왕족들간에 결혼이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영어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어가 더 우수한 언어로 사용되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왕족들이 프랑스의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져 한때 프랑스가 영국에 예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왕족들이 공공연히 프랑스 왕정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왕족들과 프랑스 왕족들 사이에 결혼이 수없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위계승 문제에 있어서도 이해관계가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 왕족들 사이에 혼혈이 성행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가의 여자가 결혼을 할 때 거액의 부동산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영국으로 왔기 때문에 이로 인한 재산권문제가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의 문제로 항상 발생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양국 왕가들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영국 윌리엄 왕조의 헨리 2세는 프랑스를 방문하는 기회에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의 왕비인 엘리노아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이후 엘리노아 왕비는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인 남편과 이혼하고 영국의 왕 헨리 2세와 결혼을 하여 영국으로 왔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엘리노아가 결혼 지참금으로 남프랑스 지역을 몽땅 가지고 영국으로 왔다고 한다. 남프랑스를 소유하게 된 영국의 헨리 2세는 프랑스의 왕보다 더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서 소유하게 되었으니 “꿩먹고 알먹는 행운아”가 됐다.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정치적인 원인과 종교적인 이유 그리고 왕가들의 영토 싸움이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 사이에서 항상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른바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이었다. 2.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 1337년에 시작됐는데 그보다 9년 전인 1328년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는 프랑스 왕위계승 문제로 극심한 대결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 왕이 아들 계승자가 없이 사망했는데, 프랑스는 후계자 없이 사망한 샤를 4세 왕의 사촌형제인 필리프 6세를 왕의 계승자로 선정하여 국가적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게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가 반기를 들고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후손으로 후계자 없이 사망한 샤를 4세 왕의 친누이가 된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의 혈통으로 프랑스의 사망한 샤를 4세가 외삼촌이 된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3세 자기자신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엉뚱한 주장을 하면서 프랑스에 반기를 들고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의 엉뚱한 주장을 거부했다. 이에 분개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프랑스에서 중요한 양모의 공급을 중단했다. 뿐만 아니라 그 때 당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던 영국이 포도주 공급까지 중지해버렸다. 프랑스는 영국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이 소유하고 있는 막대한 왕족들의 주요한 부동산들을 몰수한다고 선포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이른바 “영국 프랑스 100년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열전과 휴전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장장 116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이어갔다.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 발발의 최초의 이유와 원인을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ㄱ. 프랑스의 샤를 4세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에 프랑스 왕의 계승권을 놓고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의 핏줄을 이유삼아 프랑스 왕위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에드워드 3세의 왕의 계승권 주장을 거부하고 사망한 샤를 4세의 후계자를 프라스 가문 중에서 왕의 사촌형제인 필리프 6세를 프랑스왕의 후계자로 선정해 세웠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의 새로 세운 왕인 필리프 6세 사이에 불화와 반목과 대립이 날로 심화되고 있었다. ㄴ.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게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끼치기 위하여 양모와 포도주의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유럽의 최대 양모생산지 프랑드르와 포도주의 최대생산지인 사스코뉴 지역은 본래 프랑스 땅이었다. 하지만 노르망디의 윌리엄 장군이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왕이 되어 통치하게 된 후부터 이 모든 중요한 지역을 영국이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프랑스 땅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자원을 다시 회복하기를 오래 전부터 원하고 있었는데 100년 전쟁의 이유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ㄷ. 프랑스의 북부지역의 노르망디 출신인 윌리엄 장군이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점령하고 영국의 왕이 되여 통치를 시작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영국에서 윌리엄 왕조를 형성하여 800여년을 통치했다. 수세기 동안 프랑스의 왕족과 영국의 왕족 사이에 결혼이 성행하였음으로 영국의 왕족과 왕비들이 프랑스에서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많은 땅을 놓고 영국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이에 맞서 반대하고 있었다. 프랑스 안에 있는 땅은 무조건 프랑스가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프랑스의 당연한 국가의 주권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역사적 맥락에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두 나라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100년 전쟁의 이유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위의 세 가지를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에 대한 좁은 의미에서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와 원인은 경제적인 손실문제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도권 문제와 그리고 종교적으로 로마카톨릭 교황청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상반된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두 나라의 분쟁의 또 하나의 이유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을 4기로 분류한다. 제1기(1337-1360) 개전과 동시에 영국이 우세하여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모든 영토의 통치권을 공식 인정했다. 제2기(1369-1389) 프랑스가 우세하여 영국이 통치권을 주장하고 있는 땅의 일부를 프랑스가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제3기(1415-1429)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이 우세한 가운데 영국의 왕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권의 계승자가 된 것을 인정해 프랑스는 큰 위기에 빠진다. 제4기(1429-1453) 큰 위기에 빠져 있는 프랑스를 “잔 다르크”라는 애국 여성이 혜성처럼 나타나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다.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란, 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영토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영토전쟁의 핵심은 중세에 유명했던 양모 생산지와 포도주 생산지에 대한 쟁탈전이었다. 1453년에 100년 전쟁이 끝난 이유도 역시 양모와 포도주의 주요 생산지가 완전히 프랑스의 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1475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100년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큰 문제점이 남아 있었다. 이 큰 문제점은 영국이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영국은 완전히 섬나라가 되고 만다는 문제였다. 그것은 영국은 본래부터 섬나라였기 때문에 평화협정은 곧 영국이 섬나라로 원상복귀를 한다는 뜻이었다. 영국이 대륙을 소유하려던 꿈은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음으로써 완전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1475년에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영국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영국이 끝까지 고집스럽게 주장했던 것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 건너편에 있는 육안으로도 바라 볼 수 있는 프랑스의 칼레(Calais)라는 항구도시만은 영국이 끝까지 통치권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고집스러운 주장이다. 영국이 끝까지 항구도시 칼레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려고 하는데 대하여 프랑스가 양보함으로써 영국은 일단 성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10년 후인 1558년에 영국의 고집스러운 통치권의 욕심은 종결되고 말았다. 영국이 유럽 대륙의 작디작은 일부에 대한 통치권을 끝까지 주장했지만 영국의 대륙에 대한 욕심과 미련은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리하여 영국은 본래대로 작은 섬나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3. 항구도시 칼레의 비극적 위기를 구출한 6인의 영웅이야기 영국과 프랑스 100년 전쟁 초기에 영국은 프랑스의 북부지역에서 크게 승리하여 북부 전지역을 영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북부 도시인 항구도시 칼레만은 시민들의 결사항쟁으로 난공불락이었다. 프랑스 북부지역이 모두 다 영국군에게 정복을 당했는데, 유일하게 칼레시만은 11개월 동안 극심한 기근에도 불구하고 버티면서 항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분노해 칼레 시민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만일 칼레 시민들 중에서 아무나 6명이 11개월 동안의 항쟁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교수형을 받으려 나온다면 칼레시 전체에 대한 사면을 허락하겠노라고 에드워드 3세는 특명을 내렸다. 에드워드 3세의 특명에 대하여 첫번째로 교수형을 받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은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로 알려진 “생피에르”였다. 생피에르의 희생정신에 감동 받아 “내가 죽겠소”라며 나선 사람들이 속출했다. 법률가 “장 테르라”, 카레시의 시장 “외흐타슈”, 상인 “장 테르”와 그의 아들 한 사람, 무명의 일반 시민 2인. 칼레시를 구원해 내기 위하여 교수형에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들은 모두 6명인데 생피에르는 6명에서 자가자신까지 합치면 7인이 되여 1인이 초과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생피에르가 그 날 밤에 자기 집에서 혼자 스스로 자살을 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에드워드 3세는 교수형을 받으러 오는 6인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렸다. “칼레시를 구하려고 교수형을 받으려 올 때 6인들은 옷을 입지 말고 내복만 입은 상태로 오라. 목에는 교수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동앗줄을 각자 목에 걸고 오라.” 이제 내일이면 교수형을 받아 죽음이 임박하고 있는 그날 밤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필립파의 눈물의 호소가 놀라운 기적을 초래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기적이었나?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필립파는 임신 중이었는데, 만일 에드워드 3세의 명령으로 인하여 6명이 처형된다면 그들의 죽음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기에게 불길한 전조를 가져다 줄지 모르니 그들을 살려달라는 필립파 왕비의 눈물의 호소였다. 왕비의 눈물의 호소에 감동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다음날 집행예정이던 6인에 대한 교수형을 정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필랍파 왕비의 눈물의 호소는 기적을 나타냈다. 칼레시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자청했던 6인은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칼레시의 전체 시민들의 생명도 구해낼 수 있었다. 이 놀라운 칼레시의 기적적인 사건은 1337년에 “100년 전쟁”이 시작된 후 바로 10년째 되는 1347년 8월 3일에 발생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1347년 8월 3일에 칼레시는 기적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면하기는 했다. 하지만 영국은 칼레시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하는데는 성공했다. 영국은 1558년까지 211년 동안 도버해협 근처 프랑스 영토에서 노른자위인 노르망디 칼레시를 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칼레시의 고위층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6명이 보여준 살신성인의 애국심과 죽음을 감수하는 희생정신으로 칼레시를 구출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조각가들은 전승의 기념으로 조각 작품을 제작하지만 로댕은 정반대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6인의 정신에 감명을 받아서 교수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질 운명을 자청하고 나선 모습을 담은 동상을 제작했던 것이다. 로댕은 1880년에 6인의 모습을 담은 조각을 제작했으며 오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12개 박물관에서 로댕의 6인의 조각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450년대에 조선반도의 역사에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사육신들이 비참하게 처형을 당한 비극적 사건과 프랑스 칼레시의 6인들의 이야기는 대조가 된다. 4. 프랑스를 구출한 여성영웅 잔 다르크 이야기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이 제1기와 제2기를 지나 제3기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1429년경에 이르러 프랑스는 영토의 반을 이미 영국에게 빼앗기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왕권마저 영국에게 강탈당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왕위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그 때 당시 프랑스의 수도인 렝스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가는 길마저 영국군에게 점령당하여 대관식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위기에 처해 있는 프랑스에 잔 다르크가 등장했다. 잔 다르크는 16세 때 “천사의 계시로 프랑스를 구출하라는 사명을 받았다”라고 주장한다. 잔 다르크는 거침없이 군부의 사령관에게 달려가서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샤를 7세는 신하의 옷을 입고 왕세자의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왕세자를 곧 알아보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장담했다. 결국 잔 다르크의 용기와 지혜로 인하여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잔 다르크는 여장부로서 샤를 7세를 설득시키고 그에게서 받은 군부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다. 여장부 사령관의 용기에 감동을 받은 프랑스 군대는 그동안 영국군에게 빼앗겼던 프랑스의 중요한 지역인 오를레앙을 탈환했으며 계속하여 영국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라고 선언하고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흰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 용감히 서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 그녀가 이끄는 프랑스 군인들은 치솟는 사기로 영국군을 상대하는 곳마다에서 승리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쟁으로 초토화된 프랑스와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서 잔 다르크는 기적과 같은 존재였으며 “승리의 여신”이자 “행운의 여신”이 되고 있었다. 잔 다르크의 명성과 인기는 프랑스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러 샤를 7세의 인기를 능가하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잔 다르크를 “성녀” 또는 “신의 증인”, “여장군”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민중의 추앙을 받고 있는데 대하여 영국은 물론 프랑스 편에서도 잔 다르크에 대한 평가와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잔 다르크는 1430년 5월 23일에 프랑스 콩비에뉴 방어전투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잡혔다.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 포로로 잡힌데 대하여 프랑스는 침묵을 지키고만 있을 뿐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에게 몸값을 지불하면 그 대가로 잔 다르크를 석방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영국에게 아무 응답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대학 신학교는 잔 다르크에 대하여 “이단”이라는 혐의를 걸어 종교재판을 요청했다. 영국 왕가측도 종교재판에 동의하여 잔 다르크를 영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2월 21일 부터 시작하여 14회의 심리를 거듭하면서 계속됐다. 종교재판은 잔 다르크가 교회의 성직자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적인 접촉을 주장하는 것은 심리적 착각이며 우상숭배의 성격이라고 논증했다. 만일 잔 다르크가 그의 잘못을 시인하고 종교재판의 판정을 받아들인다면 영국교회는 그의 죄를 단순죄로 인정하고 용서를 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법정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녀는 자기의 순수한 참된 신앙적인 사명감과 프랑스를 위한 양심의 절개를 끝까지 주장했다. 1431년 5월 28일에 잔 다르크는 결국 이단으로 선고를 받아 화형당했다. 잔 다르크가 영국의 종교재판에서 화형의 처형을 받게 된 것에 대하여 프랑스는 끝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 샤를 7세 왕가와 프랑스 교회는 25년이 지난 후인 1456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이 잔 다르크를 화형으로 처형한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잔 다르크에게 선고한 재판을 파기한다고 선언하고 잔 다르크의 명예를 회복한다고 선언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정치쇼이며 종교적 위선인가? 뿐만 아니라 이 보다 더 웃기는 것은 로마카톨릭교회는 영국교회가 잔 다르크에게 부당한 화형을 선고한 잘못에 대하여 일언반구의 비판의 말 없이 다만 로마카톨릭교회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앙한다고 1920년에 발표했다. 이것도 역시 카톨릭교회의 허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글을 맺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은 순전히 동질의 백인들끼리 100년 동안이나 싸운 단지 “영토분쟁”과 “왕위다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왕족들과 귀족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터에서 무명의 수백만, 수천만 민중들이 희생을 당한 사실도 알게 됐다. 어쩌면 백인들이 창조해낸 비극적 세계사를 보며 또 하나의 악마를 보는 듯 하다. 프랑스에 잔 다르크라는 성녀가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유관순”이라는 성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칼레시의 비극적 운명을 구출해 내기 위하여 죽음을 감수하기로 자발적으로 나셨던 “6인 사건”이 1347년에 발생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1456년에 구국적 사명감으로 죽음을 각오한 “사육신” 사건이 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러운 것은 칼레시의 “6인 사건”은 조각가 로댕의 작품으로 승화되어 세계 역사의 조명을 받고 있는데 비하여 우리나라의 “사육신” 사건은 그들의 유골이 한강변 노량진에 안장되어 있을 뿐이다. 하루 속히 우리의 소원인 조국통일의 그 날이 오면 로댕의 솜씨 이상 가는 우리 민족의 우수하고 멋진 솜씨로 자랑스러운 “사육신”의 조각상을 전 세계에 과시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2012년 8월 15일) 관련기사 소련 내쫓자 발트3국 뒷문으로 들어온건? 카스피해 자원독점 노리는 미국의 전략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숨겨진 자원패권 중세기 분쟁일으킨 성상숭배와 성상파괴 중세기 서구 기독교제국 망친 십자군전쟁 중세카톨릭교회의 수도원과 영성운동 로마의 분열과 비잔틴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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