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한국인이 외면하는 제국주의 미국
미국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은 너무 크고 깊다. 미국의 정책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주고 있다. 미국의 정책과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위상과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취한 수많은 정책은 대부분 우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다만 관심의 초점을 우리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건에 국한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조선정부는 청나라가 아편전쟁(鴉片戰爭, Anglo-Chinese Wars, 1차:1839-1842, 2차:1856-1860)에서 영제국에게 참패하여 약 2만 명의 막대한 인명 피해와 더불어 국권을 상실하는 참극을 보면서도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1842년 8월 체결된 남경조약 또는 장닝조약(江寧條約)이라고도 하는 조약이 당시 난징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號)상에서 청나라 전권대사 기영(耆英)·이리포(伊里布)와 영국 전권대사 H. 포틴저(1789-1856)가 조인하였다.
13조로 되어 있고, 1843년 6월 홍콩에서 비준서가 교환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② 광저우(廣州), 샤먼(廈門:Amoy),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의 5항(港)을 개항한다.
③ 개항장에 영사(領事)를 설치한다.
④ 전쟁배상금(戰費賠償金)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한다.
⑤ 행상(行商) 즉 공행(公行)과 같은 독점상인을 폐지한다.
⑥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를 제한한다.
⑦ 청나라와 영국 두 나라 관리의 대등한 교섭 등이었다.
청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조선은 의지할 나라도 없어지고, 자체적으로 외세를 물리칠 능력도 없었다. 할 수 있는 방법이라야 국경을 굳게 닫는 길 밖에 없었다.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났으나 경제는 황폐해 지고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었다. 패배한 남군들은 약탈자가 되거나 강도가 되어 떼를 지어 다녔다. 형편은 북군도 비슷해서 실업자가 되거나 마지막 남은 식민지, 아시아로 가서 한탕하려는 자들로 넘쳤다. 영국에서도 아편전쟁의 승리를 기회로, 떼돈을 벌려는 자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이들 중 일부는 남북전쟁이 끝나자 잉여 선박을 불하받았다. 그들은 이를 개조해 만든 배를 타고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지역에서 용병 노릇을 하거나 약탈, 강도행위와 유사한 행위를 하였다.
제너럴셔먼호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배로 원래 이름은 로열 프린세스(HMS Royal Princess)호였다. 미국의 면화 수입 가격 인상이 우려되자 남군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와 전쟁 물자를 수송하는 것으로 배의 용도가 바꾸어졌다. 이 과정에서 1863년 1월 29일 북군에 포획되어 북군의 함정으로 사용된다. 전후 이 배는 민간에 불하되어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다가 남북전쟁 당시 가혹하기로 유명한 북군의 셔만 장군(William T. Sherman, 1820–1891)의 이름을 따서 제너럴 셔만(USS General Sherman)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이 배를 과연 상선이라 부를 수 있는지 매우 의문이다. 이 배는 포신구경 9.32mm, 포탄 무계 0.91 kg, 사정거리 4,000 m의 패로트(Parrott) 포 2대와 총열이 6개 또는 10개로 손잡이를 돌리면 돌아가면서 발사되는 게틀링 기관총 2대로 무장되었으며 선원들은 모두 소총과 대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는 상선이라기보다는 군함 또는 해적선(black pirate ship)이라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제너럴셔먼호의 모습. 상선으로 팔리기 전에는 USS Princess Royal 이었다. ©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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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8월 21일(고종3년, 음력 7월 12일) 이 배가 허락도 없이 영해를 침범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렸다. 이들은 조선 관원을 인질로 삼아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가 하면, 주민들과 관원들을 향해 무단 발포를 해 7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와 관원들이 합세하여 셔먼호를 불살랐다.
이 때 영국 무역회사 메도스(Meadows and Co.)의 통역으로 왔던 영국인 토마스 (Robert Jemain Thomas, 1840-1866)는 배에서 탈출하였다. 토마스는 영해를 침범한 이유와 목적을 확인하러 승선했던 중군 이현익의 신분증인 인신(印信)을 가지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 인신을 창끝에 매달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살해당한 백성의 가족들과 관원들에게 참살 당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토마스를 순교자라며 우상시 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71년 6월 10일(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이어져, 미국은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에게 콜로라도와 모노카시 전함을 위시해서 대규모 해군 함대를 동원해 조선 원정을 명했다. 어재연 장군 형제를 비롯한 조선군은 장비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저항하였으나 참패하였다. 미국 역시 강압적으로 문호를 개방시키려던 의도는 실패했다.
11년 후인 1882년(고종19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으로 미국과 통상조약을 한다.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리엄 슈펠트 간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이와 같이 외부의 강압과 권고로 체결된 이 조약은 최혜국 조약과 치외법권 등 모순적이고 굴욕적인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는 불평등 조약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국과의 관계는 강압과 불평등으로 시작되었다.
하와이와 조선
미제국의 하와이 병탄사건은 우리나라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1778년경 하와이의 인구는 약 800,000 명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하와이가 미국에 병합되는 1893년경 하와이 원주민 수는 백인들이 가져온 독감, 폐병, 성병 등으로 1/20인 약 4만 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탕수수 재배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선교사의 가족들은 중국, 일본, 조선 등 아시아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명칭은 노동자이지만 근로 조건이나 임금 수준은 인간 이하의 농노 수준이었다. 당시 아시아에는 엄청난 흉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주한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 공사 1887-1907)은 조선으로 귀임하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경작자 협회이사인 어윈(William G. Irwin)을 만나 하와이의 노동력 부족문제를 알게 되었고, 그 후 한국인 이민 계획을 맡게 되었다.
그는 호놀룰루에 직접 가서 관계자들과 협의하였다. 사탕농장주들은 알렌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알렌은 고종황제를 설복해 이민 허락을 받아낸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미국인 데쉴러(Deshler)다. 알렌과 같은 미국 오하이오(Ohio)주 출신으로 은행가 집안의 후손이었는데, 일본 고베(神戶)에서 활동하다가 1896년 제물포로 건너와 사업을 모색하고 있던 25살의 젊은이였다. 알렌과 친밀했던 그는 인천에 '동서개발주식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 내리교회 인근에 있었다고 함)를 차린 후 하와이에서 일할 노무자를 모집했다.
또 하와이 이민에 필요한 재정보증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데쉴러 은행(Deshler Bank)을 세우고 보증업무를 하였다. 처음에는 낯선 땅에 대한 거부감 탓에 응하는 이들이 없었다. 이 때 인천 내리교회 제2대 담임 존스목사(George Hebert Jones, 한국명 조원시, 1867-1919)가 나서 "하와이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설교해 교민 50명과 인천항 부두노동자 20여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알렌은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근로조건이나 임금이 농노 수준임을 직접 파악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사탕수수밭의 노동자로 가는 것을 낙원으로 가는 것처럼 속여서 보낸 것이다. 후에 이민자들의 참상이 알려져 문제가 생기자 존스 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하와이 이민 주선으로 어느 정도의 이익을 챙겼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알렌이 조선에서 챙긴 이권들로 미루어 상당한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알렌이 챙긴 이권들은 대략 아래와 같다
①운산금광 채굴권
당시 평안북도 운산 금광은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으로 조선의 금생산량 중 총생산량의 1/4을 차지하던 대규모 광산이었다. 동양광업주식회사를 세우고 미국인 감독관, 일본인 기술자. 말레이시아와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운산 금광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였다.
미국은 운산금광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정확한 자료는 아니지만 당시 미국인 감독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897∼1915년 사이의 금 생산액만도 약 4,95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 금액은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금액으로써 그 무렵, 한강철교 공사에 든 비용이 약 40만 원이었다고 하니 4,950만 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10년 당시 조선 정부가 일본에 진 빛이 4,500만 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산 금광 하나만 미국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면 일본에 진 빚을 갚을 수가 있고, 전국에 걸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을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는 뜻이다. 알렌은 당시 1,500만 달러의 국부를 유출했다.
② 경인철도 부설권
알렌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내 자신의 친구이자 무역 브로커인 모오스에게 부설권을 넘겨주면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모오스는 미국인 사업가 헌트에게 팔았다. 헌트는 다시 일본인에게 부설권을 팔았다.
③ 알렌은 첫 발전소 계획을 세우고 이권을 챙겼다.
④ 미국 기업체들로부터 전화 및 수도시설을 끌어들이면서 이득을 취했다. 알렌 이외에도, 유명한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한국명, 원두우, 元杜尤)는 석유와 석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하여 이득을 취했다. 마펫(Samuel A. Moffett, 1864-1939)은 압록강 주변의 산림 채벌권을 얻어 거대한 이권을 얻기도 하였다.
차관법 (Lend-Lease Act, 1941)과 우리의 운명
미국과 영국이 키워 후발 산업국이 된 일본은 점점 더 야심을 키워 1910년 조선을 강점하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다. 일본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침략행위를 계속하여 열강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동쪽 해안 도시들을 거의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경대학살을 위시한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1940년에는 프랑스 비시 괴뢰 정권의 동의로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월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가담함으로써 일본은 미국과 영국과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가 일본에 침략을 당하자,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 등으로 일본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미 국무장관 헐(Cordell Hull, 1871–1955, 최장수 미 국무장관, 재임 1933-1944)의 1941년 11월 26일자 통지문을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대부분의 석유를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결국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3안을 채택하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의 영토인 하와이 진주만과 웨이크 섬을 폭격하고 괌을 점령하였다. 필리핀에도 선전포고와 함께 폭격하였다. 또 같은 날 샴(타이), 말레이와 홍콩도 침략하였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확전되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무기)임대법, 미국중립법안 등의 법을 내세우며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고 있었다. (무기)임대법(Lend-Lease Act, 1941년-1945년)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소련·중국 등 연합국에게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제공할 수 있게 만든 법이다. 이 법은 미국이 1941년 12월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하기 약 9개월 전인 1941년 3월 11일에 발효되었다. 그 동안 미국은 1937년의 미국중립법안(American Neutrality Act)에 따라 전쟁 중인 국가에 무기 수출을 금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1939년 이 법안을 수정하여 중립법안(Neutrality Act)을 시행하였는데 이 법은 무기 수출을 허용하는 대신에 무기 수입국은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무기를 구매하는 국가의 선박으로 수송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 때문에 현금(지불)과 (구매국에 의한)수송이라고 해서 캐시 앤 캐리법(Cash and Carry Law)이라고도 부른다.
이 대여법의 시행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온 고립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미국이 국제 정세에 개입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총 501억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와 전쟁물자가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 연합국에 제공되었다. 이 막대한 금액은 현재 가치로 약 7천억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주요 수혜국이 받은 액수는 아래와 같다. 영국 314억 달러(총 78억 달러 상당 상환액 중 영국이 68억 달러 상당 상환), 소련 113억 달러, 프랑스 32억 달러, 중국 16억 달러
이 법안을 시행한 이유는 영국이 전쟁과 독일의 공습으로 경제가 피폐해져 더 이상 무기를 구입하고 운송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대일 승전일인 1945년 9월 2일에 만료되었다. 이 법으로 소련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받은 내역은 아래와 같다.
항공기(14,795대) 탱크(7,056대) 지프차(51,503대) 트럭(375,883대)
모터사이클(35,170대) 트랙터(8,071대) 소총(8,218정)
기관총(131,633정) 폭약(345,735 톤)
건축자재(10,910,000달러 상당 분) 기차,화차(11,155 량)
기관차(1,981 대) 화물선(90 척) 잠수함 추적선(105 척)
어뢰정(197 척) 선박엔진(7,784 대) 식품(4,478,000 톤)
기계 및 장비(1,078,965,000 달러 분)
비철금속(802,000 톤) 석유제품(2,670,000 톤) 화학물품(842,000 톤)
면화(106,893,000 톤) 가죽( 49,860 톤) 타이어(3,786,000 개)
군화(15,417,000 켤레)
수치까지 제시하는 이유는 미국이 취하는 정책 또는 정략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매우 자의적이고 일관성이 없음을 알리고자 함이다. 미국과 영국은 청일전쟁(1894.7-1895.4)이나 러일전쟁(1904-1905)에서 자국의 식민지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으로 하여금 대리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쉬프(Jacob Henry Schiff, 1847–1920)로 하여금 3천만 파운드의 채권을 발행하도록 하여 일본의 승리를 도와주었다.
게다가 일본에 주요 정보를 제공하고 수에즈 운하를 러시아 함대가 통과하지 못하게 하여 엄청난 먼 거리를 우회하도록 한다든가 심지어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한 인도적인 구원조차 거부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채권의 이자로 상당한 액수를 챙겼고,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러시아를 큰 비용이나 전력(戰力)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을 이용함으로써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전쟁 즉 제2차 세계대전에선 소련을 시켜 일본을 제압하려는 것이다.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Pact of Neutrality Between Union of Soviet Republics and Japan)을 모스크바에서 1941년 4월13일(소화16년) 소련 외상 몰로토프(Molotov)와 일본 외상 마츠오카(Matsuoka)가 5년 유효인 이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의 크리미아 반도 남쪽에 위치한 얄타에서 회담을 열어 미국, 영국과 소련이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면 소련이 대일 전쟁을 하도록 권고하였다. 불가침조약 같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그동안 무기 대여법으로 미국에 의존하던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면 대일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1945년 8월 5일 주 소련 미국대사 해리먼(William Averell Harriman, 1891–1986)이 소련의 대일 참전을 독려하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주소 일본대사 사토가 8월 8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를 만나 조건부 항복을 주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몰로토프는 1945년 7월 26일자 미국, 영국과 중국이 요청한 무조건 항복을 일본이 거부하였으므로 일본정부가 소비에트공화국에 요청한 극동에서의 전쟁 중재 요청은 모든 근거를 상실한다고 선언하고 8월 9일자의 대일 선전포고를 사토에게 전달하였다.
이미 패전이 가까움을 알고 있던 소련은 일본군을 공격한다. 이로써 소련은 승전국이 되어 사할린을 포함한 일본의 북방 4개 도서를 차지하는 등의 이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소련과 미국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비극을 당하게 되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점령하고 각각 미국과 소련이 후원하는 정권이 들어선다. 이 후에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한다. 미국 외교관이자 정치과학자이던 키난(George Frost Kennan, 1904–2005)이 익명으로 포린 어훼어즈(Foreign Affairs)라는 잡지에 소련을 봉쇄(containment)하자는 기사를 게재한다. 이 정책은 냉전시대(Cold War, 1947-1989)에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으로 미국의 대 소련정책이 된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을 시켜 소련을 견제하다가, 2차 대전 때는 소련을 시켜 일본을 제압한다. 청일 전쟁 때는 일본을 도와 중국을 패배시킨다. 그러나 2차 대전 때는 중국을 도와 일본을 제압한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이제는 미국이 직접 중국을 제압하려 한다. 바로 이것이 미 제국의 외교정책이다.
미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과 전쟁
제국들은 식민지를 포기할 때 그 식민지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거나 아니면 분열시킨다. 이런 일은 또 다른 비극과 갈등을 초래한다.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1950년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대부분이 철수하고 소수의 군사고문단만이 남았고 3·8선 부근에서는 남·북 군대간의 충돌이 잦았다.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이때,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1971)이 1950년 1월 12일 내셔널 프레스클럽(National Press Club)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반도(월남, 라오스와 캄보디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19세기 이전부터 러시아(소련)의 팽창주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이런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발언을 한 것은 전쟁을 유발하려는 고의이던, 무식하거나 부주의이던 간에 전쟁을 부추긴 발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비참한 비극을 겪게 된다. 결국 미국의 자국 중심적이고 자의적인 정책과 전략 때문에 약소국가들은 참을 수밖에 없고 끝없는 고통과 슬픔만을 멍에처럼 지며 살고 있다.
미국의 정책과 전술은 해당 국민의 생명이나 생존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미국은 월남전에서 초강력 발암 물질인 다이옥신(고엽제, Agent Orange) 2천만 갤런을 투하해 당시는 물론 지금도 고엽제가 살포된 지역에서는 2세, 3세, 심지어 4세까지 후유증으로 아무런 보상도 없이 고통을 겪게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나라를 그들의 전리품으로 취급한 맥아더와 미군정의 정책으로 인해, 지금까지 우리민족은 분단이란 상처를 지닌 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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