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기 쉬운 말이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서 쉬운 말로 느낌, 생각, 뜻을 막힘없이 주고받으며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토박이말을 널리 알리는 일을 지며리 하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일곱 돌 토박이말날 기림 잔치를 알려드렸습니다. 알리는 말씀을 보신 한 분께서 ‘돌’이라는 말을 옛날에는 많이 썼는데 요즘 쓰는 사람을 보기 어려웠는데 볼 수 있어 반가웠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돌과 아랑곳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생일(生日)’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다보니 생일이라는 말이 한자말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고 생일과 비슷한 뜻을 가진 토박이말이 무엇인지 아는지 물으면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돌이라는 토박이말이 있다고 말해주면 돌은 태어나서 처음 맞는 생일 때만 쓰는 말 아니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일이라는 말을 많이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말을 쓰며 살게 된 데는 말집(사전)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라는 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름씨(명사)로 ‘어린아이가 태어난 날로부터 한 해가 되는 날’이라고 풀이를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흔히 쓰는 ‘생일’의 뜻으로는 쓸 수 없게 해 놓았습니다. 우리 토박이말의 쓰임새를 이렇게 가두어 놓지 말고 두루 쓸 수 있도록 ‘돌’이 ‘생일’과 뜻이 비슷한 토박이말이라고 풀이를 해 놓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돌’의 둘째 뜻은 ‘매인이름씨(의존명사)’로 “생일이 돌아온 횟수를 세는 단위. 주로 두세 살의 어린아이에게 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토박이말의 쓰임을 가두는 풀이하고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몇 살이냐고 물으면 “두 돌 지났어요” 또는 “세 돌 지났어요”라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네 돌’, ‘다섯 돌’, ‘열 돌’, ‘스무 돌’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돌 잔치만 ‘돌잔치’라고 하고 요즘 아이들이 ‘생파’라는 말을 쓰는 것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되는 것도 참일입니다. 저 말고도 다른 많은 분들이 함께 걱정을 해 주신다면 바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겠는데 많은 분들이 걱정도 하지 않는 게 저는 더 걱정입니다. 말은 바뀌기 마련이고 그걸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생일 파티’를 줄여서 ‘생파’라고 하고 ‘생일 선물’을 줄여서 ‘생선’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고 어른들이 앞장서서 ‘돌잔치’ ‘돌손씻이’이라는 말을 쓴다면 아이들도 그런 말을 쓰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나아가 생신(生辰), 탄신(誕辰), 탄신일(誕辰日)일과 같은 말도 ‘오신 날’, ‘나신 날’처럼 쉽게 풀어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성탄절’은 ‘예수님 오신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만든 달자취(달력)에는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쓰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절로 쓰게 될 거라 믿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돌’의 셋째 뜻은 ‘특정한 날이 해마다 돌아올 때, 그 횟수를 세는 단위’라고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토박이말날이 ‘일곱 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의 ‘돌’의 뜻입니다. ‘몇 회(回)’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몇 돌’이라는 말을 많이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돌’이라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알맞게 쓸 수 있도록 잘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길을 튼튼히 해야겠습니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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