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념이 다른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있어도 말의 앞뒤를 못 맞추는 사람과는 대화를 못한다. 대화란 최소한 주어와 술어 사이에 상관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는 쓸모가 없다. 아니,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나는 훈련소에서 실시하는 화생방 훈련에 대해 학을 뗀다. 나도 논산훈련소에서 이 경험을 했고, 나중에 무한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니 10여 년 전에도 이 훈련을 했던 모양이다.
무한도전을 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 훈련의 백미는 가스를 틀어놓은 상태에서 방독면을 벗는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가스를 왕창 들이마신다. 훈련병들은 죽을 맛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가스 공격을 받으면 방독면을 써야지 왜 벗는 훈련을 하고 자빠졌나? 가스를 들이마시는 게 훈련이냐? 가스를 안 들이마시게 하는 게 훈련이지. 훈련이 고된 건 참을 수 있는데 이런 비논리를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비논리가 대통령 입에서?
그런데 이런 황당한 비논리가 대통령 입에서 남발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반국가 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 있다. 이게 얼마나 비논리적인 이야기인가?
‘활개치다’라는 말은 ‘제 세상처럼 함부로 날뛴다’는 뜻이다. 그러면 잡으면 될 거 아니냐? 그거 잡으라고 있는 게 공무원이고 경찰이고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걸 안 잡는다. 그리고는 활개를 친다고 지랄이다. 나는 논리구조가 벌써 이렇게 엉망진창인 사람을 보면 반국가세력이고 뭐고 말을 섞기가 싫어진다.
범어사 찾은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범어사를 찾아 “여러 힘든 상황이 있지만 업보로 생각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일하겠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고 덧붙였단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극도의 짜증이 치밀었다. 윤석열의 뻔뻔스러움 때문이 아니다. 그의 처참한 논리 수준 때문이다. 업보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뜻한다. 지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단다. 이건 또 잘못했다는 지적을 깡그리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을 하나로 이어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잘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보고 잘못했다고 지적하면 무시하겠다.” 이게 말이냐 항문 사이로 나오는 가스냐? 잘못했다고 인정을 안 하고 버티던가, 잘못했다고 인정을 했으면 숙이던가? 주어는 인정을 했는데 술어는 인정을 못한다. 이런 비논리적인 자들과는 말을 섞어도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는 윤석열의 말에 솔깃하기까지 했다. 내가 이래봬도 왕년에 돌 좀 던져본 사람이거든. 내가 진짜 마음 제대로 먹고 돌 한 번 던져줘?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돌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게 해봐?
매듭 자르기
논리학에는 ‘매듭 자르기의 오류’라는 게 있다. 논쟁의 앞뒤 맥락 다 자르고 “그냥 이게 결론이야”라고 우기는 태도를 말한다. ‘논점 배제의 오류’라고도 부른다.
알렉산더 대왕이 프리기아 왕국에 진출했을 때, 그 누구도 풀지 못했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발견한 일화가 있다. “이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전설이 붙은 매듭이었다. 그런데 그게 쉽게 풀리겠나? 쉽게 안 풀리는 매듭이니 그런 전설이 붙었을 것이다.
그걸 풀려고 끙끙대던 알렉산더는 해답을 찾지 못하자 단칼에 매듭을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봐라, 내가 매듭을 풀었다. 내가 전설이 말하는 아시아의 패자다”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
그런데 알렉산더 씨, 그건 자르라고 있는 매듭이 아니라 하나하나 풀라고 있는 매듭이라고요. 그런데 그걸 단칼에 잘라놓고 “나 문제 풀었어요” 이러면 말이 되나? 그래서 ‘매듭 자르기의 오류’라는 개념이 논리학에 등장한 거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내가 쓴 칼럼에 대해 “이 칼럼은 이런 점에서 잘 못 됐고 이런 점에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비판을 했다. 이때 내가 “그럼 읽지 마!”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해보자. 이게 매듭 자르기 오류, 논점 배제의 오류다. 칼럼의 논리와 수준을 이야기하는데 “꺼져”라고 한 마디로 정리를 해버리는 거다.
영화 평론가들이 어떤 영화에 대해서 비평을 했다. 그런데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그럼 보지 마”라고 씹는다. 이러면 무슨 생산적 논쟁이 되겠나? 내가 과거 동아일보 다닐 때 사내 통신망에 회사의 문제점을 몇 번 지적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임원이 날 보고 그랬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이러면 논쟁 자체가 안 된다. 이런 비논리는 논리가 설 최소한의 공간을 봉쇄한다. 윤석열-김건희가 뭘 잘 못 했는지 온 나라가 지적을 하는데, 당사자는 “돌 던져라, 맞으면 그만이지” 한 마디로 씹어버린다. 개야 짖어라, 바람아 불어라 식 태도이고 전형적인 매듭 자르기 오류다. 이 정도면 윤석열과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윤석열이 나라를 통치하는 한 대한민국에는 논리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는 논술 시험을 보는 것도 민망하다. 대통령 논리 수준이 저 지경인데 누가 누구 논리를 평가하겠나?
하루 빨리 이 비상식적인 세상이 끝나야 한다. 폭력이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나조차 ‘아 진짜 간만에 돌 한 번 제대로 던져봐?’라는 생각이 들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닌가?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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