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8일 중앙일보 트위터에 <속보, 샤이니 종현, 청담동서 숨진 채 발견>이라는 기사를 링크한 트윗이 올라왔습니다. 이 트윗에는 ‘#종현자살’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렸습니다. 네티즌들은 해시태그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비판을 했습니다.
언론사 SNS 계정에서 검색이 쉬운 해시태그를 다는 것이 뭐가 문제이냐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트윗을 올린 시각은 오후 7시 15분이었고, 정확히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중앙일보는 해당 트윗을 삭제했습니다.
자살과 연관된 사망 사건 보도는 신중해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자살보도 권고안’까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샤이니 종현씨의 사망 사건 뉴스는 기준도 없이 보도됐습니다. 언론의 자살보도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자살 사건, 반복적으로 보도하거나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지 마라’
▲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에는 기사에 나왔던 ‘갈탄’이 계속 상위권에 노출됐다.
WHO의 ‘자살보도 권고안’을 보면 ‘자살 관련 기사를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하거나 반복 보도하는 것을 피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언론은 ‘기회는 이때다’라며 클릭 장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특히 연예 관련 기사를 주로 보도하는 매체의 뉴스를 타 언론사가 제목만 바꿔 올리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조선닷컴>은 <종현, 10년간 무대서 빛났던 샤이니..이젠 하늘의 별>이라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원래 <OSEN>의 <종현, 10년간 무대서 빛났던 샤이니..이젠 하늘의 ★> 기사를 그대로 보도한 것입니다.
WHO는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 자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을 피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샤이니 종현씨의 사망 당시 ‘갈탄’이 방 안에 있었다고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네이버 급상승 검색어를 보면 ‘갈탄’이 계속 상위권에 등장했습니다.
‘연예인 자살 사건 이후, 자살 급증’
▲ 연구팀은 “미디어의 유명인 자살보도가 일반인 중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쳐 모방 자살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WHO는 ‘연예인 자살을 보도할 때는 특별히 더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연예인 또는 유명인의 자살 이후 자살이 급증하기 때문입니다.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전홍진 교수팀이 2005~2011년 사이 국내에서 자살로 사망한 94,8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내 자살 사건의 18%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 후 1개월 이내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7년의 연구기간 동안 자살 사건으로 TV와 신문 매체에 1주일 이상 보도된 유명인은 총 13명이었는데, 이들의 사망 후 1개월 이내에 자살한 사람은 17,209명으로 전체 자살 사건의 18.1%를 차지했습니다.
유명인의 자살 전 1개월간 하루 평균 자살자가 36.2명이었습니다. 유명인 한 명이 자살한 후 1개월 동안 하루 평균 자살자는 45.5명으로 무려 9.3명이나 늘어났습니다.
전홍진 교수는 “유명인의 자살이 일반인의 자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유명인이 사망한 경우에는 언론에서 감정적이나 자극적인 보도를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간된 이후 유럽 전역에서 소설과 유사한 방식으로 발생한 연쇄 모방 자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베르테르(Werther) 효과’라고 부릅니다.
독일에서는 “어느 학생의 죽음(Tod eines Schülers)”이라는 자살 다큐멘터리가 방송된 이후 철도 투신자살이 175% 증가했습니다. 파라세타몰(Paracetamol) 과다복용으로 인한 자살 보도 이후 첫 주에만 동일 방식의 자살률이 17%나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 오스트리아의 지하철 자살률이 갑자기 급증했습니다. 학자들은 자살률이 높아진 이유가 미디어가 자살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987년 지하철 자살에 대한 ‘보도 권고안’이 도입됐고, 언론사들이 이를 따르자 지하철 자살률이 줄어들었습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이 나왔지만, 변하지 않는 한국 언론’
▲자살 보도 권고 기준안은 신문, 방송, 인터넷 신문 등 언론 미디어뿐만 아니라 블로그, 인터넷 카페, SNS 등을 통해 사회적 소통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됩니다
한국에서도 언론의 자살 보도가 자살 빈도와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2004년에 ‘한국기자협회 자살보도 윤리강령’이 만들어졌습니다. 2013년에는 ‘자살보도 권고기준 2.0’도 제정됐습니다.
그러나 언론은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반복적인 자살 보도 관련 기사를 쏟아냅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자살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합니다. 동료 연예인을 동원해 연예인의 자살을 부각하거나 추측성 기사를 남발합니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2013년 ‘자살보도 권고기준 2.0’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쓴 자살 사건 기사로 누군가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면 쓰십시오.’
자살에 대한 보도는 무조건 자제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큰 보도의 가치는 없습니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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