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과 현실 속의 고구려 벽돌과 기와

[통일문화 만들어가며](202) 전설 《벽돌공 이사달》 중국시민 기사입력: 2013/11/17 [04:05] 최종편집: ⓒ 자주민보 [편집자주: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과 본지의 편집방향은 무관합니다. 다만 필자가 소개하는 북에 대한 정보를 통해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져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만든다. 한국의 국보 1호라는 숭례문이 전하는 소식들은 반가울 게 하나도 없다. 단청들이 하도 심하게 파괴되어 “너덜너덜”하다는 혹평을 받는데 사실은 기와도 걱정거리란다. 어느 전문가의 설명에 의하면 공사기일에 맞추느라고 기와제조를 강행했으므로 겨울에 동파(얼어터짐)될 위험이 있다 한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숭례문을 복구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글쎄 문화재청이 단청파괴를 예상하고서도 대책 없이 작업했다니까 기막히지 않는가. SBS 권란 기자의 11월 6일자 단독보도 “‘숭례문 단청 벗겨진다’ 미리 알고도 강행”에 의하면 문화재청이 단청에 쓸 천연 안료를 구하러 2010년 일본에 갔다가 작성한 보고서에 “직사광선과 대기오염에 따른 색조의 불가피한 타락(탈락?) 현상이 확인됐다”고 적혀 있고, 그 이듬해부터 일본에서 사 온 천연 안료로 문화재연구소에서 실험한 결과도 변색과 탈락을 증명했건만, 제한된 시간과 예산, 그리고 전통 방식으로 복구하려다 보니 대안이 없어서 복구 작업이 강행됐다 한다. 필자가 머나먼 중국에서 바라보면서 신기하게 생각되는 게 10월에 단청파괴사건이 공개되면서부터 1개월이 넘도록 왜 처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느냐이다. 옛날의 단청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고 어느 정도 기간 아름다움을 유지했는지, 현대 다른 나라들에서는 단청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 정도 보존이 되는지도 알고 싶다만(특히 그놈의 천연 안료 원산지라는 일본에서) 그따위 부실공사를 하고서도 성공을 요란스레 기념한 사람들이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고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느냐야말로 진짜 관심사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꼬리를 무는 정치이슈들 때문에 경황이 없더라도 말이다. 처벌이 솜방망이면 악순환은 끊어질 리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는 일을 잘하지 못한 사람들을 사형에까지 처했다는데… ▲ <대성산이야기>(리영규 지음, 문예출판사, 1978) [자료사진= 중국시민] 소장한 조선(북한)출판물들을 정리하면서 뒤적이다나니 예전에 흥미롭게 보았던 《대성산이야기》(리영규 지음, 문예출판사 1978년 4월 출판발행, 도합 140쪽, 사진)에 벽돌과 기와를 다룬 이야기들이 나오기에 이번 [통일문화 만들어가며]에서 다루기로 마음 먹었다. 이 책은 30여 명의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여교원의 인솔하에 평양의 대성산유원지를 돌아보면서 경치 및 유물들과 관련된 전설들을 듣는 형식으로 엮어졌다. 우선 차례를 옮긴다. 1. 사랑의 해발 2. 미천호 3. 구룡못 4. 잉어못에 대한 이야기 5. 형제못 6. 수난의 력사 7. 산성이야기 8. 안학궁 9. 벽돌공 이사달 10. 사슴못 11. 장수못에 대한 이야기 12. 장수각 13. 참을수 없는 분노 이 가운데서 “12. 장수각”이 다룬 달메와 범다리의 전설은 1981년 예술영화 《달메와 범다리》로 각색되었고, 30여년 전 소년이었던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자봉와”의 전설을 담은 “2. 미천호”였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정비극을 만든 “자명고”는 잘 알려졌지만 적군이 침범하면 절로 불길이 타오른다는 “자명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적은 모양이라 이제 기회를 찾아 소개하려 한다. 단 이번에는 67~ 76쪽에 실린 “9. 벽돌공 이사달”을 소개한다. 책의 “8. 안학궁”에서 교원을 따라 안학궁터를 답사한 학생들은 다음 절에서 여교원이 이야기하는 전설을 듣는다. 안학궁터는 광복 후에 발굴된 유적으로써 당시 그 터 안에 살던 40여 호 주민들을 새로 지은 문화주택에 이사시킨 다음 발굴과 연구가 여러 해 걸쳐 진행되었다 한다. 1500여년 전의 고구려 장수왕시기에 지은 안학궁에 대해서는 흥미를 갖는 이들이 자료를 찾아서 보시기를 권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전설을 책에서는 여교원이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므로 “습니다”따위 입말체가 많은데 뒷날 다른 책들과 사이트에서 전하면서 서술체로 바꾸어진 자료도 있다. 《벽돌공 이사달에 대한 이야기》를 아래에 전문 첨부한다. 《자주민보》의 독자분들이 전설부터 보시기를 바란다. 여기서는 전설을 간추린다. 안학궁을 건설할 때 궁전바닥에 산호마루를 깔려고 했으나 수량부족으로 산호와 꼭 같은 빛을 내는 벽돌을 만들어 깔기로 했다. 벽돌공으로서 가장 우수한 기술자이지만 노비에 불과한 이사달에게 임무가 내려지면서 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면천한다는 조건부가 붙었다. 10년을 애쓴 이사달이 나중에 산화철이 많이 섞인 진흙에다 동광에 가서 복대기를 가져다 섞어서 구워 만들어 그중 산호빛에 가까운 적자색벽돌을 내놓았으나 인정받지 못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망나니가 이사달의 목을 겨누고 내리친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이사달이 적자색벽돌로 칼을 막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망나니의 칼도 부러졌다. 그런데 칼을 두 번 막은 벽돌은 손톱만한 흔적도 나지 않았다. 궁전건설에 동원되었다가 사형장에 불리어 온 노비들과 하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이사달을 죽이면 그만한 벽돌도 얻지 못할 것 같아 관리들은 이사달의 목숨을 살려줬다. 하여 하도 고생하다나니 머리가 새하얗게 세버린 이사달은 애인인 노을아기와 함께 노비살이에서 벗어났다 한다. 책에는 67~ 73쪽에서 전설이 소개된 다음 일본에서 귀국한 노인과 학생들 그리고 여교원의 대화가 4쪽 가까이 이어진다. 예컨대 첫 부분은 이런 대화다. 귀국노인: “백발이 되도록 고생한 대가로 궁중에서나 놓여나면 뭘하겠어요. 봉건적신분제도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할것이니 처지가 달라질게 없잖아요…” 여교원: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전설은 그 시대의 사회생활의 한토막을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전설은 또한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들은 모두가 이사달이와 같은 피착취계급인 근로하는 <천민>들의 수많은 희생과 헤아릴수 없는 고역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피땀의 결정체라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있지 않습니까.” 귀국노인: “그렇습니다. 인류문화는 력사의 창조자인 인민대중의 지혜와 로동의 산물이라는것을 이 전설은 증명해주고있습니다.”(73쪽) 뒤이어 어떤 유물들이 여기서 출토되었느냐는 노인의 물음에 여교원은 많지 못하다면서 “깨여진 기와와 벽돌들뿐이고 저쪽 내전자리에서 순금귀고리와 유리로 만든 장식품이 하나씩 나왔을뿐이랍니다. 평양성을 쌓고 궁성을 새로 지은 다음 평화적으로 옮겨갔기때문에 이 궁전에는 남겨놓은 물건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 궁전들은 그후 시기에 헐어다가 다른데 리용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불이 붙어 없어졌다든가 그냥 무너져버렸다면 숯이 있어도 있을것이고 나무 썩은 흔적이 있어도 있겠는데 전혀 발견되지 못했답니다.”(73~ 74쪽) 여기서 잠깐 필자의 말을 끼우는데, 나무는 특성상 기존건물에 쓰였던 것을 옮겨다가 쓰는 게 여러 모로 편하다고 한다. 숭례문 단청이 문제점들을 많이 낳은 원인의 하나가 아직 충분히 마르지 않은 새 목재에 직접 단청을 그린 것이라 하지 않는가. 뒤이어 학생이 유리제품에 대해 물어보고 여교원이 고대 유리는 지금의 유리만큼 질이 높지 못해 지금 병을 만드는 막유리정도지만 그때에 유리가 있은 사실은 증명되었다고 해석한다. 또한 야금기술들도 설명되고 안학궁건설을 시작했을 광개토대왕이 완공을 보지 못하고 412년 세상을 뜬 다음 장수왕 15년 즉 417년에야 평양으로 천도했으니까 줄잡아도 안학궁을 20여 년 걸려서 건설했으리라는 추론이 소개된다. 이어 여교원은 이런 말들로 소개를 마친다. 앞의 8절에 의하면 여교원은 안학궁발굴사업이 거의 끝날 무렵에 구경왔다가 발굴사업을 지도하는 학자에게서 설명을 들었으므로 아래 말에서 들었다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하기야 그 당시 이렇게 웅장한 건설을 하자면 그렇게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처럼 오랜 시일과 막대한 로력이 들었으리라는것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자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 궁전에 사용한 기와는 보통기와처럼 흙으로 빚어서 구운것이 아니고 활석을 보드랍게 빻아서 쳐가지고 무슨 점착제를 섞어 이겨서 구운 기와랍니다. 그 기와는 조금도 변질이 되지 않았고 이끼도 끼지 않았답니다. 얼마나 보드랍고 반드러운지 그 파편들은 고급숫돌로 쓸수 있답니다. 바위를 깨여 가루를 만들어서 그 숱한 기와를 구웠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도 얼마나 많은 로력이 들었겠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기와와 함께 여기서 나진 벽돌도 보았습니다. 그 벽돌의 빛갈은 적자색입니다. 그 벽돌은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에도 모서리가 조금도 닳지 않았을뿐아니라 칼날처럼 모가 선채로 있었고 쇠소리가 나는데 강도가 매우 높습니다.”(75~ 76쪽) 고급숫돌들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현대에 기와를 숫돌로 쓸 정도까지 만들 필요는 없더라도 반도 중부수준의 추위 때문에 얼어터질 걱정을 한다면 그 품질이 너무 한심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중국 북부의 혹한환경에서 나서 자랐지만 기와가 얼어텨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어쨌든 이번 숭례문복구작업의 부실로 한국문화재보호와 복원의 한계점들이 충분히 드러났으니까 여우도 같은 덫에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같은 실수들이 중복되지 말기를 바란다. 돈이 되지 않는 연구에도 인력과 물력을 투자하고, 당분간 성과가 없더라도 정부차원에서 충분히 지지하며, 정치적 요소가 다분한 공사기일을 맞추느라고 급급해하지 말고 역사적 안목을 갖추어 알뜰공사를 진행하는 풍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문화재복구경험을 조선과 공유하는 것도 필수적이겠다. 연구도 공사도. 그러지 않고 지금식으로 밀어붙이다가는 국제적 망신거리들이 자꾸만 나올 테니 말이다.(2013년 11월 16일) 첨부파일 1종: 대성산전설 《벽돌공 이사달에 대한 이야기》 안학궁을 건설할 때 본래는 궁전바닥에 산호마루를 깔기로 되여있었으나 우리 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산호를 구할수 없다는데로부터 산호대신 벽돌을 꼭 산호와 같은 빛이 나도록 구워서 깔기로 했다. 그래 그 벽돌을 구울 과업이 벽돌공으로서 가장 우수한 기술자인 이사달이란 사람한테 내려졌다. 이사달은 대대로 궁중에 속한 노비로서 아버지한테서 우수한 기술을 물려받은 30이 넘은 총각이였다. 대도감(궁성건축을 총지휘하고 감독하는 관리)은 이사달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산호벽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에 너는 살기를 바라지 말아라. 그대신 그것을 만들어내면 네 소원을 다 풀어줄것이다.》 이사달은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우선 그 벽돌을 만들어내면 자기 소원이 이루어질수 있다는것으로 하여 기뻤던것이다. 노비로서 첫째 소원은 노비에서 해방되여 자유민이 되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사달에게는 이밖에 또 다른 소원도 있었다. 그것은 노을아기라는 궁녀와 정이 깊어진것이다. 이 눈치가 알려지는 날에는 두사람 다 목이 붙어있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두사람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난 사이이고 노을아기가 궁녀로 들어온 다음 이따금 만나게 되는사이에 서로 아끼게 되였던것이다. 사실 궁녀들이란 겉보기에는 잘 입고 잘 먹고 별로 힘드는 일 하는것 없이 사는것으로 호화로와보이지만 실상은 조롱속에 든 새와 같이 완전히 갇히운 생활로서 일생을 혼자 늙어야 하는 기막힌 신세였던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고달프고 굶주린대도 궁중을 벗어나 살고싶은것이 가장 큰 소원이였다. 이사달은 산호벽돌만 만들어내면 궁중에서 해방되여 노을아기와 같이 자유민이 되여 살아갈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뻤다. 그러나 한편 자기 기술이 높다하지만 산호벽돌을 만들어낼수 있겠는가 하는것이 걱정이였다. 그것이 두려웠다. 이사달이 산호벽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지혜와 정력을 소모했던지 10년동안에 백발로인이 되였다. 그는 수천곳으로 돌아다니며 각가지 흙을 파다가 구워보았고 유약도 수백종이나 자체로 만들어 칠해보았고 화력조절을 해보느라고 수백종의 나무와 숯도 써보고 천오백여리나 되는 머나먼곳에서까지 진흙을 가져다 구워보았다. 그러나 산호벽돌은 구워지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산화철이 많이 섞인 진흙에다 동광에 가서 복대기를 가져다 섞어서 구워 만들어보았는데 그것이 그중 산호빛에 가까운 적자색벽돌로 되였다. 이사달은 적자색벽돌을 내놓았다. 벽돌을 받아본 대도감은 이게 어디 산호벽돌이냐고 하면서 자기 명령을 어기고 태공을 한 이사달을 릉지처참하겠다고 야단을 쳤다. 이사달은 천여번 실험해 구워낸 벽돌을 모조리 가져다놓았다. 그 벽돌들가운데는 검은것, 붉은것, 푸른빛 나는것, 누런것, 닭알빛 나는것, 젖빛같이 흰것 등 각가지 색갈들이 있었다. 그 벽돌들을 대도감앞에다 늘여놓고난 이사달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이 벽돌들을 구워내는동안에 제 머리가 이렇게 세였습니다.》 그러나 대도감은 산호빛벽돌을 못만들었다는것으로 해서 이사달을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였다. 대도감은 궁전건설에 동원된 노비들과 하호들을 징계할 목적으로 이사달을 사형하는 마당에 전부 모이게 하였다. 이사달을 가운데 끌어다놓은 다음 대도감은 군중을 향하여 말했다.《너희들 듣거라. 이 이사달은 내 명령대로 산호벽돌을 만들어내지 못한 죄로 오늘 사형에 처한다. 너희들도 언약을 어길 때에는 이사달이와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 거기에 모인 노비들과 하호들은 이사달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들은 이사달의 높은 기술을 알뿐아니라 그가 10여년동안 그야말로 침식을 잊고 갖은 고생을 다하여 연구한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이때 이사달밑에서 같이 벽돌을 굽던 노비가 이사달옆에 나가 엎드려 자기도 사형을 받겠노라고 했다. 그는 이사달이 죽으면 그가 받았던 과업이 자기한테 맡겨지겠는데 이사달이가 못만들어낸 산호벽돌을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낼수 있겠는가, 결국은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애만 쓰다가 사형을 당할터이니 그럴바엔 미리 죽는것이 좋다고 말했던것이다. 그러자 벽돌공들이 하나 둘, 열, 스물씩 이사달이와 같이 사형을 당하겠노라고 나가 엎드렸다. 벽돌공들뿐만아니라 목수도 석수도 금은세공쟁이도 나가 엎드렸다. 이렇게 되자 사형장의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사형을 자청해 나가 엎드리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분노에 떨고있었다. 그것은 통치배들에 대한 원한이 서리고 쌓였기때문이였다. 10여년동안 강제동원되여 집의 식구들이 굶어쓰러지건만 돌볼수조차 없었고 사나운 도감놈들의 무서운 채찍밑에서 고역에 시달리는 그들의 한결같은 원한의 표시였던것이다. 대도감은 슬그머니 겁이 났다. 폭동이라도 일어날것 같았기때문이였다. 그는 일단 자기가 내린 명령을 취소할수도 없어서 이사달만을 죽이라고 사형집행리에게 명령하였다. 사형집행리가 검을 추켜들었다가 이사달의 목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그런데 이사달의 목이 떨어진것이 아니라 사형집행리의 검이 젱거덩하고 부러져나갔다. 그것은 이사달이가 자기가 구운 적자색벽돌로 검을 막았기때문이였다. 다음번 사형집행리의 칼도 보기좋게 부러져나갔다. 그런데 두번이나 칼을 막아낸 이사달의 벽돌에는 손톱자리만한 흔적도 나지 않았다. 이것을 본 부도감은 대도감에게 귀속말로 말하였다. 분위기가 험악하니 이사달을 죽였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수 있다는것과 또 이사달을 죽이면 그만한 벽돌도 구워낼수 없겠으니 죽이지 말고 살려주는것이 좋겠다는것이였다. 대도감도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이사달의 사형을 중지하고 하는수 없이 그를 궁중에서 내보내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노을아기궁녀가 이사달한테로 달려왔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동안 마주서서 서로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이사달이가 백발로인이 되였을뿐만아니라 노을아기도 파파로파로 되였기때문이였다. 노을아기는 궁중에 있으면서 산호벽돌을 연구하노라고 바삐 돌아가는 이사달을 10여년동안 한번도 만나보지는 못하고 대성산 선녀바위앞에 칠성단을 쌓아놓고 밤마다 빌었다. 이사달이가 굽는 벽돌에 자기의 심혼이 담겨져 진한 노을빛이 어리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하느님도 궁녀나 노비의 간절한 소원같은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주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식은 이사달이가 매번 실패했다는 소식뿐이였는데 천여번이나 이사달이가 실패를 거듭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노을아기의 머리칼은 세여갔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갔던것이다. 드디여 이사달이가 사형을 당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구중궁궐에 갇혔던 몸이 놓여나 이사달이와 같이 자유롭게 살아보겠다던 간절한 희망이 무참히 깨여지고말았으니 살고싶지 않았다. 이사달이 죽는 시간에 자기도 죽을 각오를 하고 비수를 품고 그 시각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사달의 사형이 중지되고 그의 소원을 들어주게 되였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던것이다. 이사달이 먼저 노을아기를 알아보았으나 말을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흐느껴울던 노을아기는 눈물을 닦으며《그래도 죽기전에 노비살이에서 벗어났으니 죽어도 한이 없어요.》라고 했다. 백발로인이 된 두 사람이 서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자유민이 되여 나가는것을 보는 군중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였다. 기뻐서 우는 눈물인지 슬프고 억울해서 우는 눈물인지 모를 눈물들이 하염없이 흘러내리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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