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인정하자. 적지 않은 민주시민들이 한 때 윤석열이라는 사람에 열광했다. 그 ‘한 때’가 짧긴 했지만, 칼잡이 이미지를 가진 그가 검찰총장에 임명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하지 않았던가? 이 말은 적어도 검사 시절 윤석열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의 윤석열은? 가스통과 태극기로 대변되는 보수 세력의 편에 딱 붙어 온갖 헛소리를 난사하는 그는 어떤 이미지인가? 검찰총장 시절의 윤석열은? 국민이 아니라 검찰의 편에 딱 붙어 조직 보위에만 온 힘을 쏟았던 그는 어떤 이미지였나?
이 엄청난 격차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종 혼란에 빠진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은 어마무시하게 잦다. 예를 들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어떤가? 백신 만들 때의 안철수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안철수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천지차이 아닌가?
피터의 법칙
피터의 법칙(Peter Principle)이라는 게 있다. 1969년 교육학자인 로렌스 피터(Laurence J. Peter)가 정립한 이래 경영학 인사관리 분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론이다.
교육학자인 피터는 일선 학교의 교장들 중 무능한 이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했다. 그런데 세상을 돌아보니 무능한 교장만큼이나 무능한 리더들이 곳곳에서 사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피터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의 공통점을 찾아 나섰다.
수백 건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단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됐다. 비효율적인 조직은 리더를 뽑는 방식이 엉망진창이었다는 점이었다. 리더는 조직을 잘 이끌어야 하는 사람인데, 정작 리더로 승진하는 사람 대부분은 조직을 잘 이끌어본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속한 기자 사회만 해도 그렇다. 훌륭한 기자란 취재를 잘 하고 기사를 잘 쓰는 기자다. 이런 기자들이 인사고과를 높게 받고 데스크(차장이나 부장)로 빨리 승진을 한다.
문제는 데스크가 취재를 잘 하고 기사를 잘 쓰는 능력만으로 잘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전혀 아니라는 데 있다. 데스크는 기사를 거의 쓰지 않는다. 취재도 별로 하지 않는다. 데스크는 부서원들을 융합시키고, 전체적인 판단을 하고, 조직의 효율을 높여야 하는 관리자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경선 후보가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한국교회 대표연합기관 및 평신도단체와 간담회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1.09.03ⓒ국회사진취재단
이 말은, 리더십이 있고 관리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데스크로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작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그런 인물을 데스크에 앉히는 게 아니라 취재를 잘하는 기자를 데스크에 앉힌다. 이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번에 윤석열 캠프에 언론특보로 영입됐다가 일주일 만에 해촉된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도 그렇다. 이 전 사장은 다른 건 몰라도 중동 취재로는 날렸던 기자였다. 종군기자로 이름을 얻어 좋은 인사고과를 받았고,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임원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이 전 사장의 보수적인 이념과는 별개로, 그가 임원을 지내던 시절 MBC의 조직 분위기는 그야말로 멍멍이 판이었다. 내가 알기로 해코지를 당한 진보적 기자들은 물론이고 보수적인 기자들조차 이 전 사장에 대해 “뭐 저런 리더가 다 있냐?”고 수군댔다고 한다.
그가 대전MBC 사장을 할 때 대전MBC 지역 뉴스에 중동 뉴스를 내보낸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혹시 이 사람, ‘지역 뉴스’의 말뜻을 몰랐나? 아니면 ‘지역 뉴스’를 대전 ‘지역’ 뉴스가 아니라 중동 ‘지역’ 뉴스로 이해한 건가? 아니면 ‘중동’이 아랍의 그 중동이 아니라 대전 동구 중동이라고 생각한 건가?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질까? 사장이 조직을 관리하고 경영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아는 게 중동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미친 짓을 버젓이 저지른다.
나는 그의 보수적 세계관과 출세 지향적인 기자관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이런 인물은 리더로서 기본적이 자격이 아예 없는 거다. 임원의 자격이 있는 자를 임원으로 뽑은 게 아니고 사막에서 취재를 잘하는 자를 임원으로 뽑으면 조직이 이렇게 멍멍이 판이 된다.
최소한 몇 년의 훈련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피터는 “모든 승진이란 자기가 잘하던 일에서 못하는 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조직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은 승진을 한다. 하지만 승진한 지위에 오른 그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고, 그 업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신입사원이 된다”라고 지적한다. 이게 바로 피터의 법칙이다.
검사로서 윤석열과 검찰총장으로서 윤석열,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윤석열의 엄청난 괴리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검사로서 윤석열은 “검사가 수사권 가지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는데, 검찰총장으로서 윤석열은 국기문란에 해당하는 고발사주 의혹에 휘말린다. 대통령 후보로서 윤석열은? 이건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뭘 더 평가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정치를 하려면, 비례대표로 특정 계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되려면, 최소한 대통령에 걸맞은 자격 검증을 혹독하게 거쳐야 한다. 검사로서 유능했다거나, 학자로서 유능했다거나, 판사로서 유능했다거나, 이런 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국가적 상황을 종합하는 리더로서 유능한 사람인지가 검증돼야 한다는 뜻이다.
또 본인이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소양을 훈련해야 한다. 내가 좋은 검사였다고, 내가 좋은 판사였다고, 내가 좋은 학자였다고 단번에 좋은 정치인이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정치인이 아니라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정치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취재기자와 데스크만 해도 하는 일이 다른데, 검사와 대통령이 어찌 같은 일일 수 있겠나?
그래서 좋은 검사, 좋은 판사, 좋은 학자가 굳이 좋은 정치를 하고 싶다면(나는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쪽이어서 주위에서 누군가 이런 시도를 한다면 말리는 편이지만) 최소한 자기가 좋은 정치인에 걸맞은 사람인지를 냉정히 평가한 뒤 훈련을 해야 한다. 좋은 기자라고 좋은 데스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죽어도 안 된다”라고 단언할 일도 아니다.
만약 그가 “나는 좋은 기자야”라는 오만을 버리고 리더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열심히 훈련하면 좋은 데스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윤석열 후보는 그럴 확률도 매우 낮지만, 그래도 굳이 대통령 후보가 되고 싶다면 최소한 몇 년은 대통령의 소양과 정치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한국 야구에서 불세출의 스타였던 선동렬 전 감독은 고향 팀인 기아 타이거즈 감독으로 대실패를 겪은 뒤 나이 60이 가까워서 선진야구 데이터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공부가 얼마나 치밀하고 열정적이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위대한 선수’였다는 오만을 버리고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해 새롭게 학습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선동렬 전 감독은 현직으로 북귀하지 못하고 있다.
냉정히 말해 전성기 야구선수 선동렬과 비교하자면 전성기 검사 윤석열의 명성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위대한 선수조차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해 수 년 간 공부에 매진하는데, 검사 윤석열이 지금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친다고? 실로 웃기는 이야기다. 만약 이게 된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로렌스 피터가 말하는 비효율적이고 무능력한 조직으로 전락할 것이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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