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2022.11.14 ⓒ뉴시스‘
담대한 구상’이 담대한 착각까지 낳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인 ‘담대한 구상’의 핵심은 북한이 핵을 먼저 포기하면 경제적인 해법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을 그대로 답습했다 것이 주된 평가다.
그동안 북한은 이러한 선제적 비핵화를 조건으로 한 접근 방식에 단 한 번도 호응한 적이 없다. 그나마 최근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건 문재인 정부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가동됨과 동시에 미국 트럼프 정부가 동시 행동에 의지를 보였을 때였다. 현재까지 경험에 비춰봤을 때 북한의 마지노선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 일부 완화를 맞바꾸는 ‘스몰딜’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다.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결정적인 원인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어느 정도 합의를 봤던 ‘스몰딜’이 무산되고, 볼턴 등 강경파들이 내세웠던 ‘리비아식 빅딜’, 즉 선제적 비핵화를 요구하며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실패한 접근 방식을 대북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을 넘어, 외교 무대에서 이를 지지해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다.
국제사회가 과연 이 ‘담대한 구상’을 실현 가능한 접근법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이번 동남아 순방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포괄적 성격의 공동성명을 채택하며 강화된 안보협력을 약속한 미국과 일본마저도 이 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지 못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 일본 기시다 총리가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인 ‘담대한 구상’의 목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다는 내용이 한미일 공동성명에 담겼는데, 이는 미국과 일본이 ‘담대한 구상’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 ‘목표’인 ‘북한의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담대한 구상’에 대한 확증편향 탓인지, 이에 대한 착각마저 담대해지고 있는 모습이다.
대통령실이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 반응의 의미를 곡해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있었던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은 ‘담대한 구상’에 대해 “북한의 의향이 관건이다. 북한이 호응해 온다면 잘 이행되도록 적극 지지하고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의중을 모를 리 없는 시 주석이 “북한의 의향이 관건”, “북한이 호응해 온다면”이라고 전제한 이유는 ‘담대한 구상’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 뒤에 따라붙은 “잘 이행되도록 적극 지지하고 협력할 것”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 막연한 이야기다. 나아가 시 주석이 ‘우린 북한이 먼저야’라고 입장을 분명히 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담대한 구상’을 밀어붙이는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윤 대통령이 면전에서 저런 말을 들은 데 대해 불쾌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더군다나 중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남북이 합의하는 평화적 해결 방안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늘 유지해왔다. 따라서 이번 시 주석의 언급도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 이상을 갖기 어렵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2022.11.16. ⓒ뉴시스
그러나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16일 시 주석의 ‘담대한 구상’ 반응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시 주석 (발언의) 요지는 ‘담대한 구상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설득을 해봐라. 그러면 북한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중국이 전폭적으로 거기에 대해 힘을 보태겠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로 읽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이 발 벗고 나서겠다는 그런 어떤 적극적인,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당시 회담장에 있었던 분들이 그런 식으로 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시 주석 발언의 요지는 정확히 파악해놓고, 해석은 전혀 엉뚱하게 한 것이다.
‘담대한 구상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잘 설득을 해봐라. 그러면 북한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중국이 전폭적으로 거기에 대해 힘을 보태겠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면 그때 돕겠다’는 말과 같다. 대통령실은 이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라고 해석했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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