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의원들이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 상정에 반발하며 퇴장하고 있다. 2022.12.11. ⓒ뉴스1
설 연휴를 맞는 마음이 편치 않은 시민이 많을 것같다. 고금리, 고물가, 난방비 폭등, 일자리 불안, 쌀값 하락, 남북관계 악화 등등. 삶을 더욱 팍팍하게 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생활비는 늘어나는데 소득은 늘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와중에도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서 말로 사고를 치고, 내년 총선을 염두에 둔 국회의원들은 사탕발림같은 문자나 보내고 현수막이나 걸고 있다. ‘정치의 부재’ 또는 ‘정치의 실종’ 상황이다.
이런 상황인데 명절에 가족들과 친인척들이 모이면 정치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다. 평소에는 관계가 좋다가도, 정치 얘기만 나오면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 얘기의 주제가 어느 정당이 어떤 문제를 해결했고, 다른 정당은 또 다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긍정적인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는 어떤 잘못을 했고, 어느 당은 이래서 안 되고’ 하는 부정적인 얘기가 명절 밥상 위를 뒤덮고 있다.
무능, 독선, 부패의 원인인 승자독식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 각자가 지지하는 정당을 가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정당도 존재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좀더 나아가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표도 공정하게 인정되어야 하고, 내가 싫어하는 정당의 표도 공정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권력도 득표에 따라 배분되어야 한다. 그게 공정한 시스템이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한 시민이 투표를 하고 있다. 2022.06.01 ⓒ민중의소리
지금의 정치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만 키우는 역할을 하는 배경에는 승자독식의 정치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만약 51%의 지지를 받으면 51%에 해당하는 권력만 가지는 시스템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소수파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불만이 적을 것이다. 소수파의 지지를 받는 정치세력들도 그만큼의 권력을 나눠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51% 또는 그 이하의 지지를 받았는데, 100%의 권력을 가지게 되는 시스템이 있다. 그러면 당연히 불만이 생긴다. 소수파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대변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이 100% 권력을 가지게 된 쪽에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권력에 취해 독선을 저지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면 권력을 가진 쪽을 지지했던 유권자들 상당수도 실망해서 돌아서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50%도 안 되는 득표율로 집권한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마음대로 대통령실을 이전하는가 하면, 민생 대신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 여당 대표 선거까지 개입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것은 여당인 ‘국민의 힘’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대통령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회의원의 대부분도 1표라도 더 많이 받는 쪽이 당선되는 시스템이다. 2등, 3등 후보를 찍은 표는 사표가 된다. 그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생각과 마음은 반영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선거에서 진 쪽도 더 잘해서 다음번 선거에서 이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권력을 쥔 쪽이 잘못하는 것만 비판ㆍ비난하려고 한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정책으로 경쟁할 이유가 없다. 정책을 연구하고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무능ㆍ독선ㆍ부패를 지적하면서 심판하자고 하는 편이 훨씬 쉽다.
비수도권 지역의 어려움도 승자독식 때문
이것은 국가 단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역에서도 일어난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승자독식의 구조에 지역주의까지 작용하면서, 한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수십 년 이상 집권하는 상태가 지속되어 왔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서 100% 권력을 가진 쪽은 나태하고 게으르기 쉽다. 어차피 자신들이 선거에서 이길 것이고,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회까지 장악하고 있다.
정치세력 간의 ‘의미있는 경쟁’이 없다 보니, 정책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지배정당의 공천을 누가 받느냐만이 중요하다. 그러니 선거 때마다 낙하산 공천, 줄서기 공천이 등장한다. 그래서 지역현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선출직들이 권력을 잡는다.
이런 지역일당 지배체제가 흔히 ‘지방소멸’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낳았다. 지역정치에서 경쟁이 상실되다 보니, 천편일률적이고 구태의연한 사업들만 펼쳐진다. 예산은 낭비되고 대안은 논의되지 않는다. 지역에서는 사람이 빠져나가고 지역 자체가 침체하고 정체되어도, 선출직들은 오로지 차기 선거에서 ‘한번 더 해 먹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다.
중앙에서 예산이나 개발사업을 따 온다고 해도, 생색내기에 그치거나 근시안적인 대책에 불과하다. 지역에 사람이 모이고 지역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니,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특정정당이 지역을 일당 지배하고 있지만, 100% 유권자들이 이들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은 아니다. 대구ㆍ경북에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표가 20-30% 정도 있고, 호남에도 국민의 힘을 지지하는 표와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표가 상당수 있다. 그러나 그 표들은 대부분 사표가 되니, 정치적 영향력이 없다.
이처럼 ‘의미있는 경쟁’이 사라진 지역정치는 비수도권 지역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1950년대 선거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등장했었다. 그 당시의 구호는 도저히 못 살겠으니 정권을 바꿔보자는 구호였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사람이 바뀌어도, 정권이 바뀌어도 정치는 희망을 주지 못해 왔다.
총선을 이틀 앞둔 13일 국회 사무처에서 21대 국회의원 뱃지를 공개하고 있다. 2020.04.13 ⓒ민중의소리
지금의 집권세력이 너무나 싫어서 ‘일단 바꿔보자’는 얘기에 공감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집권세력을 바꾼다고 해서 지금 한국 사회의 문제가 해결될까?’ 라는 질문에 과연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동안의 경험을 보면 사람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지금 가장 먼저 갈아치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승자독식과 지역일당 지배체제를 낳은 선거제도이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표심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제도로 바꿔야 한다. 또한 지역에서의 일당 지배체제를 타파하는 제도로 바꿔야 한다. 그 방안으로 거론되는 여러 제도들이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접점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통령도 최소한 결선투표제로 뽑아야 한다. 대통령의 권력남용을 막을 수 있는 장치도 강화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시민혁명은 이런 시스템의 개혁으로 이어져 왔다. 4.19. 혁명은 헌법개정으로 이어졌고, 1987년 6월 민주항쟁도 헌법개정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군사쿠데타로 퇴보를 했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한계를 맞았든, 그래도 당시에는 제도 개혁의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6년-2017년의 촛불은 제도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것이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최대 실책이다. 충분히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지금의 윤석열 정권을 낳은 원인이기도 하다.
만약 탄핵에 참여했던 ‘탄핵연합’을 선거제도 개혁과 헌법개정의 ‘정치시스템 개혁연합’으로 이어갔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맞고 있을 것이다.
[우리말 바루기] 들렀다, 들렸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머무르는 일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들렀다’고 말하기도 하고, ‘들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들렀다’와 ‘들렸다’ 둘 중 어떤 것이 바른 표현일까. ‘들렀다’와 ‘들렸다’를 혼동해 쓰는 이유는 기본형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어딘가에 잠시 머무르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는 ‘들르다’이다. ‘들르다’는 ‘들르고, 들르며’ 등과 같이 활용되는데, ‘-아/-어’ 앞에서는 매개모음인 ‘으’가 탈락한다. 따라서 ‘들르-’에 ‘-어’가 결합하면 ‘으’가 탈락하면서 ‘들러’가 되고, 과거형은 ‘들렀다’가 된다. ‘들렀다’를 ‘들렸다’고 틀리게 쓰는 이유는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기본형으로 잘못 알고 활용했기 때문이다. ‘들려’는 ‘들리+어’가 줄어든 형태로, ‘들르다’가 아닌 ‘들리다’를 활용한 표현이다. ‘들리다’는 ‘듣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나, ‘들다’의 사동사와 피동사로 사용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부모님 댁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켓에 들렀다”는 바르게 쓰인 표현이므로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귀가길에 항구에 들려 바닷바람을 쐬고 왔다”는 ‘들려’를 ‘들러’로 고쳐 써야 바르다. # 우리말 바루기
[우리말 바루기] ‘결실’은 ‘맺지’ 말고 ‘거두자’ 중앙일보 입력 2024.02.08 00:11 지면보기 새해에 세운 계획을 잘 이행하고 있는지 중간 점검해 보자. 작심삼일로 끝난 이들도 있겠지만, 서서히 결실을 ‘맺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의 결과가 잘 맺어지거나 또는 그런 성과를 이루었을 때 많은 이가 이처럼 “결실을 맺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복된 표현이 숨어 있다. ‘결실’은 ‘맺을 결(結)’ 자와 ‘열매 실(實)’ 자로 이루어진 낱말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어 보면 ‘결실’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미 단어를 이루는 한자에 ‘맺다(結)’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결실을 맺다”는 ‘맺다’를 두 번 연달아 쓴 중복된 표현이 된다. 그렇다면 ‘결실’을 쓸 때 어떤 낱말을 덧붙이는 게 좋을까. “결실을 맺다” 대신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고 쓰는 게 더 적절하다. 우리말 바루기 다른 기사 이전 [우리말 바루기] ‘물렀거라’ ‘물럿거라’? 실생활에서 ‘살아생전’ ‘처갓집’과 같이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기도 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 “평생을 성실하게 생활하신 부모님의 덕분으로 자식이 모두 성공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예문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듯 중복된 표현이 꼭 문법적으로 틀렸다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의미가 중복된 표현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쓴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중복된 표현을 쓰기보다 “결실을 거두다” “결실을 보다”라고 쓰는 게 더 바람직한 언어생활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명료하고 간결한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힘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법이다. 김현정 기자 nomadicwriter@naver.com 더 중앙 플러스 이상언의 오늘+ 온난화 해법 ‘우주 차양막’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유료 전문공개 민주 공관위원장에 “유퀴즈!” 尹정권 탄생 공신 누구입니까 ...
[박세열 칼럼] '서초동 권력'이 접수한 한국사회 세계관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08. 04:09:34   한국은 '삼권분립'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권력 지형을 갖고 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의 틈새에 제 4부라 할 수 있는 '검찰 권력'이 존재한다. 검찰은 행정부 소속이지만 스스로를 '준사법기관'으로 여긴다. 한국 검찰은 행정부이면서 행정부 포함 3부의 권력을 모두 견제하는데, 이 '검찰 권력'의 핵심은 수사와 소추의 독점 권한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범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1차적으로 판단하는 권력이다. 원래 검찰은 법을 집행하는 행정권의 '절제'와 '인권 보호' 등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 원님 재판을 막기 위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판사와 동등한 수준의 법률전문가를 국가에서 고용해 '형사 절차'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지만 '기소독점권'과 같은 막강한 권한으로 '수사와 소추'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한국 검찰은 3권의 사각지대에서 독특한 포지션에 자리를 비집고 들어앉아 한국 사회를 호령해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는 3권 분립이 아니라 독특한 권력 분류법이 구전을 통해 존재한다. 이른바 '한국사회 세계관'이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여의도 권력(정치)과 서초동 권력(검찰), 그리고 강남 권력(재벌)의 '삼권분점'으로 이뤄진다. 서울의 유명 지명들을 딴 이 권력 분류법은 '삼권분립'과 같은 따분한 학술적 규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한국사회를 설명해준다. 비유하자면, '삼권분립'이 낮의 권력 지형도라면, '삼권분점'은 밤의 권력 지형도다. 교과서와 필드매뉴얼의 관계라고 할까? 이 '구전설화'의 세계관에서 '행정부'를 따로 뺀 이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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