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문명은 인종주의 지배체제
[제3세계 눈으로본 서구열강](24) 반인륜적 망령의 인종주의 해악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3/03/17 [23:45] 최종편집: ⓒ 자주민보
인종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1930년대에 있었던 독일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전에는 인종주의가 없었는가? 아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적 사건 이전에도 역시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서구문명의 역사에 존속되고 있었다.
<인종주의>의 고대적인 역사의 기원을 히브리인의 신화에서는 노아 할아버지의 세 아들 <야벳의 자손>, <셈의 자손> 그리고 <함의 자손>들이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번창하여 서로 상이한 인종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해 주고 있다.(BC 3,800, 구약성경 창세기 10장) 하지만 히브리인의 신화적인 고대의 설화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의미로 오늘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인종주의 역사와 문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고대인들은 주로 피부, 머리카락, 눈동자의 색깔, 얼굴의 모양 그리고 종교적 우월성을 가지고 인종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특히 기독교시대에 들어와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하여 인종적 적대감을 고취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1800년대에 “반유대연맹”이라는 단체가 등장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서유럽에서 인종주의를 선동한 역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분쟁과 전쟁의 역사는 <인종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반인륜적인 망령의 <인종주의>에 대한 올바른 관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 500년 동안 유럽의 국가들이 인종주의를 전 세계로 확대시켜 다른 지역 사람들을 살육하고 착취하면서 노예화 했다. 인종주의적 망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뿐만 아니라 냉전이라고 하는 비도덕적인 이데올로기로 되살아나 인종간의 갈등과 증오를 고취하고 있었다. 오늘 미국에서는 정치적으로 이른바 “신보수주의”와 함께 망령의 인종주의 현상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인종주의를 생물학적인 면에서 신체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오늘의 인종주의는 사회과학 분야와 함께 정치적 분야에서 계급과 자본,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이득쟁취의 직능적 과제 등이 가장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인종주의는 경제와 정치적인 관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인종주의가 사회적 집단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개인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열등한 문명과 인종들을 예속시키고 때로는 멸절시키기도 한다.
1. 중세 서유럽의 인종주의
AD 7세기 이후에 있어서 중세 유럽의 정치적 세계를 지배한 제국은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이슬람제국>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AD 476년에 동서로 분열되어 두 개의 제국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제국은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1054년까지 578년 동안 명목상으로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통치 하에서 하나의 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세 유럽에서 오직 <이슬람제국>만이 비기독교제국으로서 단독으로 정치와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면에서 두 개의 기독교제국과 대립하여 막강한 이슬람제국의 두각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슬람제국을 일명 <사라센제국>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제국은 고대로부터 사라센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라센족의 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설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BC 2000년 경의 신화적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후손을 출산하지 못함으로 아브라함이 이집트 출신의 하녀 하갈이라는 여인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브라함이 100세에 본부인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러므로 이집트 출신 하녀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추방을 당해 쫓겨났으며 거기서 방랑자의 조상이 됐다고 한다. 사막의 방랑자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사라센 민족을 형성하였다고 한다.(구약 창세기 16장 참조)
이와 같은 좋지 못한 전설적 구전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제국은 한때 세력이 팽창하여 유럽에서 대제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세속적 성취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 서유럽의 기독교국가들 보다 더 앞서 있었다. 이슬람제국은 그리스 철학과 자연과학을 받아들임으로써 국력을 확대시켜 로마제국을 제치고 고대문명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1187년에 이슬람제국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슬람제국의 세력이 서유럽과 비잔틴제국을 제치고 상당 기간 동안 문화와 군사적으로 우세한 통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서유럽의 기독교제국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었다. <서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은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다급해진 서유럽의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은 막강한 이슬람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명분으로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연합하고 단합하여 1095년에 십자군을 창설하였다. 십자군을 창설한 목적은 이슬람의 통치하에 있는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함이었다. 1096년에 제1차 십자군전쟁을 시작하여 1279년까지 제9차 십자군전쟁을 시도하여 183년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183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싸운 십자군전쟁은 결국 예루살렘 탈환을 성취하지 못하고 실패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은 서구의 기독교제국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고 하는 허황된 주장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며 사실은 이방종교의 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인종주의>적 전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중세기의 십자군전쟁은 상이한 인종 사이에서 우열을 판단하기 위하여 우등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인종이 열등하다고 판단한 인종을 지배하려는 전쟁이었다. 동시에 유럽의 기독교제국은 이러한 전쟁을 신의 섭리에 따른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스마엘- 사라센- 이슬람- 마호메트로 연결되는 이슬람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부정적인 인종주의적 편견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십자군전쟁을 183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하지만 서구의 기독교제국은 정반대로 주장하기를 우리는 신의 뜻에 충성하고 종교적 봉헌심을 통하여 악마와 싸우는 고상한 정신적 인종주의자라고 자신의 우월감을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 이후에 들어서서 십자군 전쟁이 점점 난관에 빠지게 됐으며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또 다시 사라센- 이슬람에게 빼앗김으로써 서유럽의 인종주의적 우월감과 낙관론은 완전한 실패로 사라지게 되었다.
예루살렘이 또 다시 완전히 이슬람의 손으로 넘어간 후 1254년에 이르러 유럽의 인종주의적 낙관론자들은 무력으로는 이슬람인들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기독교와 이슬람교, 유럽인과 아랍인 등 서로 다양한 형태의 인종들이 상대방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접촉하는 길 밖에 별 도리가 없음을 중세기 십자군의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터득한 셈이다.
중세기 서유럽 기독교제국이 이슬람제국과 당면했던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오늘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12-13세기에 있어서 평화적인 공존을 위하여 기독교국가와 이슬람국가 사이에 서로 관용적인 화해의 관계를 모색하여 평화를 유지한 역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두 개의 종교가 상호 존중의 정신으로 <예수>와 <마호메트>의 이름을 빼버린다면 <하느님>은 모든 인종들에게 평등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의 세계가 원하는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지혜는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길에 있을 뿐이다.
2. 식민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서구유럽의 역사에서 중세기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그런데 15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인들의 선박들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넘어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진출하면서 유럽인들의 인종주의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유럽인들이 이번에는 종교와 관련된 인종주의가 아니라 정복자로서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인종주의자로 변장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유럽인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점령과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인종주의가 필요하고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점령지의 원주민을 “저열한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유색인들의 생명, 토지, 문화,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신의 뜻”을 수행한다고 정당화하고 있었다.
영국인 법률학자 브레캔리지(H. Brackenridge)는 주장하기를 “인디언들이 토지를 경작하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고 있음으로 인디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라고 법률적 괴변을 주장했다. 유럽의 식민지 인종주의자들은 인디언들이 19세기 말에는 거의 멸절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사실에 있어서 인디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거의 절멸되고 말았다.
15세기 말에 아메리카를 점령한 유럽인들은 처음에는 원주민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인디언들을 노예로 삼으려면 싸워야 했으며 싸우다 서로 죽는 위험이 많았다. 인디언들은 노예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아프리카 흑인 노예노동력을 확보하는 노예제도였다. 흑인 노예제도는 1700년대 초까지 북미 식민지 사회구조 안에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흑인 노예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방법이었다. 흑인은 생리학이나 심리적인 면에서 인종적으로 열등한 인종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인종주의적 노예제도가 만들어 지는 것을 확고히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유럽인들은 인간을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으로 나누어 태생적으로 우열을 논하는 인종주의적 도식을 주장했다.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의 헌법을 기초한 제퍼슨은 노예제도의 폐지에 대하여 관심이 전혀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제퍼슨은 오히려 흑인의 내적이며 자연적인 열등성을 지적하면서 흑인들은 더위에 강하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생물학적으로 적합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모순은 하느님이 인간의 조상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고 하는 성경을 믿는 미국인들에게 자기모순적인 과오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인종을 다른 인종과 구분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인 생물학으로 인종주의를 부인하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현실에 있어서는 인종차별이라고 하는 “인종주의”가 그대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늘 서구문명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종주의는 유럽의 식민지 자본주의를 확립시키는데 있어서 잔인한 정복전쟁과 인종학살을 정당화시켰으며 또한 산업에 필요한 자본축적을 위하여 비인간적인 노동의 착취를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미국을 위주로 하는 유럽의 자본주의 지배세력은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주축으로 삼는다.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야만적 억압과 탄압으로 미국의 유색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탄압하며 비백인들을 이방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미국의 백인 인종주의는 제3세계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민중의 자의식을 퇴보시키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방법을 다하고 있다.
인종주의가 비인간적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서 제국주의 식민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방어책을 찾아내야 했다. 19세기가 되면서 식민 자본주의자들은 인종주의를 다윈의 진화론의 언어를 빌어 <자연법칙에 의한 선택>이라고 변명했다. 한편 기독교인들은 인종주의적 인간의 억압에 대하여 변명하여 유색인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정복자들과 억압자들에게 다른 뺨도 내주어라>라고 요청했다.
식민 자본주의 인종주의자들은 소수가 미개한 대중을 지배하는 개척자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1890년에 3억이나 되는 인도인들을, 영국의 겨우 7만명의 군인과 6천명의 영국인 정치인들이 통치했다. 19세기 미국의 최고 동물학자인 아가시즈 박사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하여 인종주의적인 멸시의 말을 했는데 <흑인들의 뇌는 백인이 어머니 자궁에서 7개월 된 태아의 불완전한 뇌와 같다>라고 악담을 했다.
식민 자본주의와 백인의 인종주의적 우월성은 유색인을 열등인종으로 규정해 놓고 멸종, 괴멸, 노예와 흡수 등을 수세기 동안 계속해 왔다. 식민 자본주의는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제3세계를 억압하고 착취하면서 그 원인과 결과를 오히려 뒤집어 거꾸로 주장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피압박자들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식민 자본주의가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경제적 착취를 강요하는 핵심적인 수단과 방법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식민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위에 올라 앉아 있는 백인 자본가들은 아래를 굽어보면서 인종주의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있다.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사이에는 언제나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인종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그 주요한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 질서가 인종주의를 보존해 주면서 합리화시킴으로써 상호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종주의는 미국의 식민 자본주의 착취체제도와 연결된 유기체이다. 따라서 미국의 인종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의 투쟁은 자본주의 뿌리를 뽑아내는 혁명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 이 길만이 인류의 고질적인 인종주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
3. 프랑스의 인종주의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는 프랑스의 문화와 종교가 완전히 다른 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으로 인하여 발생했다. 프랑스와 인접해 있는 유럽의 외국인들 중에 예술가, 기술자, 상인과 노동자들이 수없이 많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으나 프랑스인들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프랑스인과 같은 종교와 같은 문화권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에 프랑스에는 아프리카에서 이른바 제3세계의 이민의 물결이 파도처럼 프랑스에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문화와 종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빈민에 속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의 오랜 식민통치의 부산물로써 난민들이 되어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아프리카의 난민들에게 프랑스의 인종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왜 아프리카인이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식민통치를 수 세기 동안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편의상 ㄱ, ㄴ, ㄷ순으로 살펴본다.
ㄱ. 프랑스는 1830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오스만 세력을 밀어 내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1830년 이전 시기에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는 식민지 쟁탈전을 북아프리카 에서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는 알제리를 독점하였으며 알제리의 청년 17만 3,000명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내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알제리 청년 15만명을 프랑스군으로 둔갑시켜 전쟁터에 내보냈다. 알제리는 청년들의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재산과 경제적 착취를 백년동안 계속하여 당했다. 프랑스로 인한 알제리의 비극의 역사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알제리 민중들의 독립투쟁운동은 계속됐는데 약 100만명이 죽임을 당했고 70만명이 투옥됐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잔악성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인의 모습과 기독교 전통의 성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1962년 7월 5일에 수십년 동안의 치열한 투쟁 끝에 알제리는 드디어 독립을 쟁취했다. 다른 북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독립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알제리가 독립은 쟁취하기는 했지만 알제리의 고질적인 문제는 20만 명의 친프랑스인들, 즉 <하르키>의 문제였다. <하르키>란 무었인가? <하르키>는 알제리 민중을 반역한 악질적인 <친프랑스 매국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친일파와 같은 족속들을 알제리에서는 <하르키>라 부른다.
<하르키>들은 혈통으로는 알제리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프랑스인처럼 행세한 민족반역자이며 매국노들이다. <하르키>들은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한 후 알제리에서 발붙일 자리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르키> 20만명이 살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식으로 프랑스로 밀려갔다. 프랑스는 20만명의 알제리인 <하르키>들은 냉정하게 불청객으로 취급을 했으며 그들은 골칫덩어리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르키>들은 버림받은 채 프랑스 도시의 어두운 빈민굴에서 비참하게 일생을 살아가고 있다.
ㄴ. 튀니지는 1,300년의 찬란한 문화재를 자랑하는 이슬람 나라였다. 하지만 1881-1956년 까지 75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45년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인 144,000명이 튀니지에 상주하면서 식민통치를 집행하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튀니지인들이 프랑스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붙잡혀 왔으며 훗날에 프랑스에서 제3세계 난민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6년에 튀니지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튀니지 정권은 여전히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 하에 놓여져 있었다. 튀니지의 대통령 벤 알리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친프랑스 경향의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벤 알리 대통령은 36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정권으로 통치를 하다가 튀니지 민중들의 저 유명한 <제스민 혁명>에 의하여 권좌에서 축출되고 35년의 징역형 선고를 받았다.
프랑스는 친프랑스 독재정권을 이용하면서 튀니지 착취를 정당화했다. 내 것은 내 것이요, 네 것도 내 것이다라고 하는 착취 방법을 계속했다. 튀니지 노동자들이 프랑스에 많이 끌려와 상주하면서 노동의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ㄷ. 코트디부아르는 1904년에 서아프리카 프랑스령에 편입되어 있다가 1958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안에서 한 개의 자치주가 됐다. 1960년에 독립투쟁의 결과로 독립국이 되기는 했으나 프랑스 공동체 안에서라는 말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고 집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브와니 대통령은 33년 동안 친프랑스 독재로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기업체들이 건설, 물, 통신, 교통 등 모든 산업체들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통치를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는 두 나라가 아니라 한 개의 나라인 모양으로 항상 잡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2002년에 북쪽의 반군세력이 수도인 아비쟝과 전국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2003년에 코트디부아르는 독립이 아니라 북과 남으로 분열됐다. 북과 남 사이에 유혈전이 벌어지자 유엔군 8.000명과 프랑스군 8,000명이 코트디부아르에 주둔했으며 무기는 약 300만정이 코트디부아르에 유입됐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임기와는 관계없이 계속하여 집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바그보 대통령은 2010년에 프랑스에 배신을 당하여 드디어 권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의 종속관계가 100여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코트디부아르의 다수의 난민들이 프랑스에 흘러 들어가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문제는 오늘의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의 난민들에 대하여 어떻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인종주의 문제를 처리하는가를 국제사회는 주목하고 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최고의 문명국이며 신사숙녀의 나라로서 카톨릭 전통을 과시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북아프리카의 이주민들로 인하여 프랑스 사회에서 인종주의가 표출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주목을 일으키는 매우 경악스러운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이와 같은 인종주의 문제에 대하여 정책적인 면에서 대표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민족전선, Le Front National>이라고 하는 정당이다. 민족전선은 1972년에 창당하여 1990년 이후부터 프랑스에서 제3당의 위치로 격상하여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면 <민족전선>은 프랑스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와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가? 알제리의 <하르키>를 비롯하여 프랑스의 도시마다 가득차 있는 북아프리카 피식민지인들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민족전선>은 인종차별적인 인종주의에 대하여 어떠한 정책을 가지고 있는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는 프랑스의 주류사회가 북아프리카의 피식민지 흑인노동력이 프랑스로 유입됨으로 인하여 한때 프랑스의 경제가 발전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인들이 흑인들을 반가운 손님으로 환영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1962년에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하고 또 다른 북아프리카 식민지 나라들이 줄을 이여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프랑스와 종주국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에 있어서 프랑스의 경제는 내리막길로 떨어졌으며 실업자의 수가 증가함으로 인하여 북아프리카 나라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프랑스의 기존의 정치세력인 극우파 보수주의가 정치력을 확대하는 좋은 기회로 삼고 인종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정치적 변동기에 있어서 제3의 대안으로 등장한 정당이 있었다. 이 정당이 바로 <민족전선, Le Front National>>이었다.
그런데 <민족전선> 뿐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인종주의를 주장하는데 대안으로써 <신인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또 제3의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인종주의>를 논의하면서 동상이몽으로 흑인문제의 해결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1993년 현재에 프랑스에는 약 440만 명의 북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129만 명이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전선>과 <공화국 민족운동> 그리고 <제3의 방법>을 주장하여 프랑스의 인종주의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ㄱ. <민족전선>의 창시자 르 갈루 (Le Gallou)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프랑스에 정착하는 이민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족전선>은 인종주의 보다는 오직 <문화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프랑스 문화는 절대로 아프리카 문화를 흡수할 수 없으며 또 흡수되어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족전선>은 아프리카 문화가 프랑스의 문화와 전통을 보전하는데 있어서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순된 면도 노출하고 있다.
어쨌든 <민족전선>은 프랑스 문화의 우월성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으며 단지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은 다른 문화와 다르며 동시에 각 국가는 다른 문화의 권리를 갖고 있음으로 그것은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족전선>은 프랑스 민족의 정체성을 역설하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면서 또 다른 문화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이중성의 비판을 받고 있다.
ㄴ. <민족전선>에 반대하여 극우파인 <공화국 민족운동>이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이 단체는 매그레(B. Magret)가 주동이 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유럽인은 종교, 역사, 관습 및 도덕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프랑스인의 민족정체성은 형이상학적인 가치로부터 유래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공화국 민족운동>은 보편주의적인 <민족전선>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프랑스가 이슬람과 아프리카인을 통합시키기 위하여 수정주의 또는 어떠한 재구성을 시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발상이며 절대로 반대한다고 외치면서 우파적인 보수주의를 주장한다.
ㄷ. 프랑스 인종주의 문제에 있어서 제3의 방법을 주장한 사람은 르펜(Le Pen)이다. 르펜은 극단적인 우파 보수주의자로서 다른 단체들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배격한다. 르펜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우리 조상의 땀과 피로 형성된 나라임으로 프랑스의 자부심과 우월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외국의 이주자들은 자신들의 피를 흘리는 희생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그들의 육체와 영혼이 프랑스 영토에 섞여 먼지가 되어 프랑스에 통합될 때, 그때에 비로소 그들이 자신의 조국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르펜은 프랑스의 혈통적 우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신앙, 문화, 사회적 전통에 조금이라도 배치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두려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결론으로 르펜은 프랑스의 고귀한 역사와 다른 길을 걸어온 아프리카 출신인 난민들은 프랑스 사회로부터 추방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 프랑스에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인종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의 이민문제가 심각하다고 시인하는 사람과 특히 북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에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의 비율이 상당이 높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프랑스 경제의 어려움에 따른 실업문제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큰 근원적인 문제는 문화차이에서 오는 인종주의적 갈등에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에서 문화적 갈등을 해소시키는 최선의 길은 두 개의 문화가 융합하여 둘 사이를 구분하는 특성을 사라지게 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가리켜 <신인종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신인종주의>의 길도 만일 오늘의 프랑스인들이 과거 프랑스가 수백년간 북아프리카에서 저지른 극악무도한 반종교적이며 반문화적인 식민지 침략통치에 대하여 참된 회개와 반성이 없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
인종주의는 서구 문명국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늘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세계화 침략의 영향권 하에 있으며 미국의 인종주의 질서에 편입된 조건 하에서 인종주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인종주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한국은 중소기업의 무리한 요구에 따라 값싼 노동력을 동남아의 빈곤한 나라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 관리정책을 올바로 실시하지 못하여 많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당황한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제도와 이데올로기로 부당하게 처벌을 가하면서 오히려 당연시 하고 있다.
정부와 마찬가지로 기업체들은 이주노동자를 채용하면서 서구식으로 노동자들의 주권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 기업주들은 이주노동자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한다는 구제의 대상으로만 보려고 하면서 응당 지불해야할 법적인 임금은 지불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은 인종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세계화 노동착취가 백인에게만 있는 이야기가 이제는 아니다. 한국의 방직회사가 과테말라에 투자하여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착취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 기업체는 과테말라 현지 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적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여 국제노동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언론의 기사를 읽어 보았다.
<수백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공장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일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 걸기조차 무섭다. 잡담하다 걸리면 한국인 관리가 와서 폭언을 하거나 머리를 마구 때린다. 체벌을 당하면 악취가 나는 화장실로 도망가듯이 가서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으나 그것도 쉽지 않다.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한국인 관리자가 면박을 주거나 또 때릴 수 있다. 한국인 관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늘 고함을 지른다. 그러나 “빨리 빨리-개새끼”라는 일부 단어들의 뜻을 과테말라 여성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위에 글들이 과테말라 한국 기업의 방직회사의 일상을 소개한 솔직한 일면이다. 과테말라에서 한국 기업들의 불법행위가 그 얼마나 심했기에 미국의 국무부가 현지에 와서 직접 조사를 했을까?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몰상식하고 추악한 인종주의적 사건들은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인들이 외국 노동자들에게 미국식 <인종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종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로 인하여 발생했는데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에 오염된 정부가 아니라 민간운동단체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투쟁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길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한국을 찾은 파키스탄의 여성으로서 <인종주의 연구자>인 아흐메드 여사가 외친 주장이다.
한국에서 인종주의가 문제시 되는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약육강식의 서구식 자본주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해야할 요점은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피지배자>의 심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백인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시선은 <더럽고 추하다, 가난하다, 위험하다, 불쌍하다, 돈만 주면 뭐든지 다 하는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는 어느 새 미국과 일본의 인종주의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라는 사회적 기현상이 이주노동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011년 현재 한국에는 55만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자본주 기업가들은 한국인 노동자의 고용을 기피하고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일본과 미국의 <인종주의>로 인하여 한 세기를 <피해자>로 살았다.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오늘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한국은 그들에게 인종주의적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다시 바꿔 뜻으로 언급을 한다면 한국은 <가해자>라기 보다는 오늘의 역사 속에서 미국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강력한 세계적인 영향권 하에서 한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집단적인 <인종주의>질서 안에 편입되어 피동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한국은 원숭이처럼 미국을 본받아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에 대하여 인종주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인종주의>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주동하는 사건이라고 설명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독단적으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미국 백인을 동경하고 미국이 주장하는 <인종주의> 정책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국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인종주의>를 미국식으로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큰 죄악에 빠지도록 유혹을 받는다. 미국 문화에 완전히 빠져 있고 미국의 막강한 힘에 완전히 사로 잡혀 있는 한국 사회는 미국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자유를 주장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미국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핵보유가 미국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으며 미국은 세계적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왜 그런가? 미국이 주도하는 <인종주의> 구조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덩달아 소동이다.
미국이 조선의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는데 가능한 주장인가? 미국은 조선이 핵무기를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 요구이다. 미국이 먼저 반인륜적이며, 비종교적이며, 반평화적인 <인종주의>를 앞세운 침략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세계적으로 평화에 공헌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 때에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동등한 위치와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비핵화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미국의 특징은 <인종주의>이며 미국의 패권은 <인종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사실에 있어서 서구 문명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인종주의>이다. 오늘 지구상의 문제는 서구 문명의 본질인 인종주의로 인하여 <배부른 세계>와 <굶주리는 세계>로 양분되어 있는 문제이다. 빈부의 격차로 양분된 세계를 고치는 방법은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2013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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