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지만 한국 현실 반영" 봉준호는 왜 제과회사 사고 언급했나
25.02.24 06:49l최종 업데이트 25.02.24 06:49l 이선필(thebasis3)
"타임 테이블(시간표)이 중요합니다. < 미키17 >은 2021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2022년에 촬영을 끝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유독 시간 순서를 강조했다. < 미키17 >이 영국 런던을 비롯, 국내 언론에 처음 공개된 직후 나왔던 반응 때문이다. 특히나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먼이 연기한 마셜-일파 독재자 부부의 모습을 두고 각국 기자들은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루마니아 독재자)를 언급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파가 귀엣말로 마셜을 조종하는 장면을 두고 12.3 내란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현 대통령 부부를 언급하는 단평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듯 의도했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만난 봉 감독은 각국 기자·평론가들의 반응을 소개하며 < 미키17 >으로 구현하고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을 제법 자세하게 언급했다.
< 미키17 >은 알려진 대로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쉬튼의 < 미키7 >을 원작으로 한다. 워너브러더스 측이 소설 출간 전 요약본을 배우 브래드 피트가 설립한 제작사 플랜B에 보냈고, 왠지 봉 감독이 좋아할 것 같다는 이유로 그에게 건너갔다. <옥자> 때 인연 덕이었다. 마침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실화 바탕 영화를 준비하다 접기로 한 직후였던 그에게 '휴먼 프린팅'이라는 소설 소재는 매력적이었다.
"작품의 절반이 SF... 나도 신기하다"
소재만 놓고 보면 영락 없는 SF다. 마카롱 가게가 망하면서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미키가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에서 '익스펜더블(소모품) 프로젝트'에 자원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몸은 물론이고 기억과 성격을 그대로 프린팅할 수 있는 기술 덕에 미키는 매번 죽음을 경험하면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17번째로 프린팅된 미키17이 죽은 걸로 알고 18번째를 프린팅했다가 두 존재가 마주치게 되면서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설정이다.
"미키는 굉장히 불쌍한 청년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원작은 좀 더 먼 미래고, 미키의 직업도 역사학자잖나. 영화에선 2054년으로 끌어당겼고, 미키도 극한 노동자 계급으로 표현했다. 마샬의 아내 일파는 원작에 없는 인물인데 만들었다. 독재자가 한 사람이 아닌 커플일 때 뭔가 더 시너지가 나오지 않나 생각했다. 역사적으로도 그 사례가 꽤 되지 않나.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부인인 엘레나도 그렇고,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아내도 구두를 무슨 천 켤레나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미국 시사에서도 자기들의 그분(도널드 트럼프)을 언급하는 등 각자 자국의 정치적 상황을 투사해서 질문하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모델로 삼은 정치인들이 있다. 마크 러팔로와 얘기할 때도 그는 미국 어느 주의 정치인을 말했고, 저도 한국의 과거 정치인을 말했다. 다 과거 인물인데 현재에도 이어진다는 게 아이러니다. 미국 기자들은 제게 크리스탈 볼(미래를 본다고 하는 도구)이 있냐고 묻는데 진짜 우연이다. 역사가 반복되니까 사람들이 현재나 미래를 계속 말하는 것 같다."
독재자와 그들을 옹호하고 부추기는 주변 캐릭터들이 있다면 감독 입장에선 미키를 각성시키고 그 시스템에 대항하는 캐릭터 설정이 중요했다. 감독 스스로도 첫 멜로 장면을 찍었다고 표현한 나샤(나오미 애키), 마셜이 새 정착지로 점찍은 행성의 원주민 크리퍼라는 외계 생물이 그렇다. 원작에도 등장하는 나샤를 통해 봉 감독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대부분 투영한 모양새다.
"미키17이 찌질하고, 너무 착하지 않나. 주변 상황이 가혹하고 무자비한데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나샤 때문이다. 영국 상영 때 나샤가 마샬에게 '쟤네 입장에선 우리가 외계인인데 왜 그들을 파괴하려 하냐'라며 대꾸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 그만큼 막힌 곳을 뚫어주는 캐릭터랄까.
미키는 소위 계속 죽어야 하는 직업이다. 잔인하게 표현하면 산업재해 전문인데 아무 것도 보상받지 못하고 죽기만 한다. 사람들은 그 한 명에게 모든 힘든 일을 몰아주고 열 몇 번씩 죽게 하면서도 죄책감을 전혀 안 느낀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젊은 노동자들 사망사고가 이어졌잖나. 스크린도어 사고, 제과회사 사고 등. 그 일은 다른 누군가가 지금 또 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미키가 전담하는 셈인데 참 무섭고 서글픈 일이다. 이 영화가 SF로 포장돼 있지만, 사실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시면 된다."
"관객들 핸드폰 보지 못하게 하고 싶어... 그게 영화의 힘"
원작 소설에서 크리퍼는 지네처럼 외형이 묘사돼 있다. 봉 감독은 이를 변형해 한 존재를 구하고자 집단행동을 불사하는 존재로 표현했는데, 크루아상과 아르마딜로, 순록 무리의 습성을 반영한 결과라고 한다. 크리퍼는 그 모양만 놓고 보면 혐오스러울 수 있지만 인간보다 오히려 고등한 존재로 묘사된다. <괴물>과 <옥자>에 참여했던 장희철 디자이너가 이번에도 참여해 직접 크리퍼를 디자인했다.
사실 나샤와 크리퍼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봉준호 감독이 보다 구체적으로 계급사회가 작동하는 원인을 포착해 제시했다는 점이다. 바로 혐오의 정서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만연한 혐오라는 정서가 곧 이 세상을 위기에 빠뜨리는 주요 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기자 질문에 그는 '맞다'며 응수했다.
"마샬을 위시한 인간 집단과 정반대인 게 크리퍼들이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과 달리 한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집단으로 움직이고 심지어 우주선 앞에서 시위를 한다. 크루아상을 앞에서 바라보면 생물체 같다. 라인이 묘하다. 크리퍼들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뭉치는 모습은 동물 다큐에서 순록 엄마와 새끼들이 함께 도는 장면에서 착안했다. 인간보다 장엄하고 위엄있는 모습이라 해야 하나. 그걸 묘사하고 싶었다.
마샬과 일파가 엄청난 혐오의 말을 쏟아내잖나. 특히 크리퍼들에게. 미키도 완전 루저에 쓰레기 취급한다. 본인들이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미키를 경멸하는 게 웃긴 건데, 그렇게 무시당하고 경멸당하는 애들끼리 서로 돕는다. 나샤가 그런 통찰을 미키에게 준 거다. 크리퍼들이 알고 보니 미키를 구한 거 아니냐는 말을 통해서 말이다. 그 경멸의 대상들이 서로 도와서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 혐오를 극복하는 게 이 영화에선 중요한 메시지다."
그러면서도 봉준호는 결국 중요한 건 영화적 재미임을 다시 한번 짚었다.
"핵심 목표는 극장에 앉아 있다고 가정하는 두 시간 내내 관객들이 절대 핸드폰을 못 들게 하는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도 그게 평생 목표였더라. 개봉하고 일반관 맨 뒷줄에 앉아 있곤 한다. 누가 핸드폰을 켜면 '누구지? 어디에 살지? 몇 살이지?' 하는 생각이 들며 상처가 되더라.
영화적 흥분으로 관객을 끌고 가고 싶다. 그리고 나서 그분들이 자려고 누웠을 때 몇몇 대사가 아른거리거나 주인공이 처한 처지가 왠지 본인과 비슷하게 느껴진다거나 어느 장면이 왠지 모르게 지난 뉴스에서 본 것과 겹친다거나 하면 좋은 거다. 하지만 극장에서 2시간만큼은 재밌어했으면 좋겠다."
< 미키17 >이 봉준호 감독의 전작과 달리 보다 희망적인 이유였다. 이 말에 봉 감독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기생충> 땐 시스템 안에서 슬프게 주저앉는 사람이 나오잖나. 안타깝지만 그걸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었다. <설국열차>는 좀 더 만화적이고 직접적이었다. 아예 기차 옆면을 뚫고 전복시켜 버리니까. 이 영화는 뭐랄까. <설국열차> 못지않게 가혹한 상황이지만 주인공의 죽음이나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조건을 개선해 나간다. 일부 시스템을 파괴하면서 말이다. 그런 긍정적 모습을 맺고 싶었던 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렇기에 감독 스스로는 이미 호불호가 갈리는 것, 그리고 평단이나 영화제 수상에 대해 이미 초연한 상태였다. "<살인의 추억> 개봉 때도 엄청 혹평이 이어졌는데 시간이 지나면 바뀐 경우였다"며 "영화는 완성하면 손을 떠나는 것이고 어떤 분들을 만나 어떤 부침을 겪을지 지켜보면 된다. 사실 제 주 업무는 다음 작품 준비"라고 말했다.
인터뷰 중간에도 현재 작업 중인 애니메이션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에 봉준호 감독 특유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내 여덟 번째 작품 < 미키17 >은 봉팔이가 만든 것이고, 그 전엔 봉칠이, 봉육이였다"며 "오스카상을 받은 게 만 50세였는데 그 전후로 저는 바뀐 것 없이 비교적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으로도 작업을 어떻게 이어가는지가 내겐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봉준호의 재치도, 영화적 에너지도 그렇게 꾸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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