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판 강제징집’ 녹화공작 피해 1192명 첫 확인
[단독] ‘전두환판 강제징집’ 녹화공작 피해 1192명 첫 확인
등록 :2019-12-23 04:59수정 :2019-12-23 07:37
군 과거사위 작성 전체명단 입수
학생 강제 징집해 ‘프락치’로 활용
39년 만에 진실규명위 꾸려 “처벌” 촉구
유시민·심재철·김선수 등 포함돼
학생 강제 징집해 ‘프락치’로 활용
39년 만에 진실규명위 꾸려 “처벌” 촉구
유시민·심재철·김선수 등 포함돼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 강제징집과 폭력을 당한 윤병기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 추진위원회’(추진위) 위원장이 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 집 앞에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의 책임자인 전씨의 처벌과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강제징집과 녹화공작 및 선도공작 등 피해자들은 이날 전씨 집 앞에서 신군부의 강제징집이 시작된 1980년 이후 피해자 모임을 처음 꾸린 뒤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2일 <한겨레>가 입수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녹화공작 및 강제징집 대상자 명단을 보면, 1천명이 훌쩍 넘는 피해자들이 교내 시위, 유인물 제작, 야학 운영, 동아리 활동 등의 이유로 강제로 휴학 등을 당해 군대에 끌려가거나 입대 뒤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 명단에는 유시민(60) 노무현재단 이사장, 심재철(61)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함께 김선수(58) 대법관, 한상혁(58)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강택(57) 교통방송 사장 등이 포함됐다.
김 대법관은 서울대 고전연구회 회장을 맡았고 1981년 5월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두달 뒤 강제징집을 당했다. 유 이사장은 1980년 5월 교내시위 참여, ‘농촌법학회’ 활동 등의 이유로 같은 해 9월 군대에 끌려갔다. 심 원내대표도 ‘농촌법학회’ 활동과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1981년 2월 강제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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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라 짓밟고 자술서·프락치 강요…“죽지 못해 산 지옥”
빨갱이라 짓밟고 자술서·프락치 강요…“죽지 못해 산 지옥”
“손톱 밑을 바늘로 찔렀던 고문 트라우마로 아직도 손톱을 짧게 못 깎아요. 초인종을 누르면 경찰인 것 같고, 아직도 누군가가 절 감시하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요.”
황병윤(58)씨는 1983년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 이후 3년의 기억이 아직도 꿈에 나올 정도로 생생하다. 1983년 7월 말께 대구대 4학년이었던 황씨는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경찰에 체포됐고, 대구남부경찰서에서 한달간 조사받았다. 황씨는 이후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곧 육군 50사단에 강제징집됐다.
황씨는 군에서 3년간 꼬박 고문과 폭력, 따돌림에 시달렸다. 출생부터 강제징집 전까지 만난 사람들과 친구, 가족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은 ‘자서전’을 쓰도록 지시받았고, 쓰지 않으면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15일간 돌연 휴가증을 끊어주며 학내에 간첩과 북한 찬양자를 조사해 전하는 ‘프락치’ 노릇을 강요받았다. “데모하거나 사회 서적을 읽었다는 내용의 편지만 받아도 불려가 귀싸대기를 맞았고 부대 안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집단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어요. 군대 안에 있는 3년 내내 제 일거수일투족은 기록돼 위로 보고됐고 추궁당했습니다.”
김현동(57)씨도 1983년 3월30일 밤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집에 서울동대문경찰서 형사가 찾아와 잠깐 조사할 일이 있다고 해 따라나섰다가 유치장에 갇혔다. 4월1일 밤 11시 김씨는 경찰서 지하실의 작은 방에 끌려갔다. 붉은 조명이 비추는 방에서 누군가 007가방을 열더니 징집 영장을 꺼내 사인하라고 했다. “싫다”며 저항하자, 형사인지 군인인지 모를 6~7명이 김씨의 몸을 짓누르고 포박했다. 그는 4월2일 경기도 의정부시 101보충대에 실려 갔고, 삭발당한 뒤 군인이 됐다.
김씨가 강제징집된 것은 성균관대에서 ‘휴머니스트’라는 사회과학 동아리를 하면서 교내 집회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5월 김씨는 보안부대에 끌려갔고, 황씨와 똑같이 2주일 동안 100쪽이 넘는 ‘자서전’을 대여섯번씩 새로 썼다. 보안부대는 대학 시절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고 캐물었다. 부대는 김씨 역시 황씨처럼 휴가를 보내준 뒤 학교 동료들의 동향을 파악해 서울 퇴계로 ‘진양상가’에 있는 국군보안사령부 분실에 가서 보고하라고 했다. “프락치 짓은 죽어도 못하겠으니까 친구들한테 저를 피해 다니라고 하고 바깥으로 빙빙 돌았어요. 보고 거리가 없으니 진양상가에 가면 ‘너 그러면 군 생활 재미없을 줄 알라’고 협박당한 뒤 다시 학교 주위를 빙빙 도는 일이 반복됐죠.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었으니 경찰에 잡혀간 경력이 있어서 군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 동아리 사람 이름 정도는 말할 수밖에 없었죠. 지옥에 있는 심정이었어요.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9월부터 1984년 11월까지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했고,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이들을 프락치로 활용하는 녹화공작을 진행했다. 2006년 7월 국방부 과거사위 발표를 보면, 강제징집자는 1152명, 녹화공작 대상자는 강제징집자 921명 등 모두 1192명이었다.
군대에서 동료를 배신하라고 요구하는 프락치 공작은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졌다. 1984년 종교·시민단체와 국회 등에서 녹화공작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은 뒤 강제징집은 중단됐지만, 군은 ‘선도공작’으로 이름을 바꿔 노태우 정권 때까지 수백명의 군인들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소 2천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군에서 고통을 당했다.
강제징집·녹화공작 당시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6명이다. 선도공작 등까지 포함하면 모두 9명이 프락치 강요 등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의심된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강제징집·녹화공작 과정에서 군에서 숨진 6명 가운데 4명의 죽음이 국가폭력과 관련있다고 인정했다.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후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맡았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2006년 녹화공작의 전반적인 규모 등을 조사해 발표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군이나 국가가 공식 사과하는 일은 없었고, 구체적인 피해자 명단도 확인해주지 않았으며, 피해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피해자들은 쉽게 나서지 못했다.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던 시대에 강제징집은 큰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되레 ‘군에 끌려가 프락치로 활용됐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억눌러온 고통이 지금은 울분이 되어 터지고 있다. 전남대 학생이었던 노영필(58)씨는 1983년 군에 끌려가 군인들에게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조사가 끝날 때쯤 목욕을 시켜준다는데,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니까 온몸이 엉망이더라고요. 그래도 참았죠. 동료들의 이름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니까….” 노씨는 이제 40년 전의 고통이 세상에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희생된 사람이 많았잖아요. 오히려 군대에 끌려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녹화공작 자체가 국가권력의 명백한 폭력인데 가만히 두고 넘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조종주(56)씨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사회과학 책에 대한 소감을 적은 편지가 경찰에 압수돼 대학교 2학년 때 대구북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조씨는 개학날 다시 경찰서에 끌려갔고 그길로 지프에 실려 대구 50사단에 간 뒤 군인이 됐다. 신병교육 때 강제징집된 동료들과 길거리의 돌멩이처럼 차이고 맞은 조씨는 2개월 만에 탈영했다. 하지만 몰래 만난 엄마가 “깔딱숨”밖에 쉬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군으로 돌아갔다. 최근 그는 그 기억을 글로 써 다른 피해자과 공유했다. ‘전두환과 끝까지 싸운다’는 내용이다.
“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에요. 실제 친한 친구가 죽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은 골프를 치고 쿠데타 날 잔치를 하더라고요. 40년이 지났지만 싸울 겁니다. 제 인생의 버킷리스트는 강제징집 문제 해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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