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년 전부터 일출 명소, 그래서 이름도 영일이지요
'지금 거기에 가면 시즌2'는 사계절에 따라 나들이 가기 좋은 국내 명소의 여행 정보와 노하우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
▲ 호미곶 상생의 손 일출 바다 위에 솟아 나온 상생의 손 위로 보는 일출은 명품이다. ⓒ 홍윤호
[이전 기사] 새해 해맞이, 1일 말고 둘째 주에 가야 하는 이유
신라 아달라왕(154~184년) 때 동해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미역을 따고 있었는데, 홀연히 바위 하나가 나타나 그를 싣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갔다. 기이하게 여긴 일본 사람들이 "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하고는 그를 왕으로 삼았다.
연오랑을 기다리던 세오녀는 남편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를 발견하고 그곳에 올라갔다. 그러자 그 바위가 역시 같은 방법으로 바다를 건너갔다. 이렇게 부부는 다시 만났고, 세오녀는 왕비가 됐다.
같은 시간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 깜깜한 날이 계속됐다. 왕이 일관(日官, 무당)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 일본에 갔습니다. 그래서 이런 변고가 생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돌아오도록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연오랑은 바다를 건너온 것이 하늘의 이치이니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그 대신 왕비 세오녀가 짠 비단을 줄 테니 가져가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라 말했다.
사신이 이 비단을 가져와 연오랑의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비로소 해와 달이 빛을 찾았다. 그 후 이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다(<삼국유사> 기이 제1, 연오랑세오녀 조 참고).
▲ 연오랑세오녀상 포항시는 신라 아달라왕 때 일본에 건너간 연오랑세오녀상을 호미곶광장에 조성해 놓았다. ⓒ 홍윤호
아직도 경북 포항 영일만 일대에 전해질뿐 아니라 고려의 역사서 <삼국유사>에도 남아 있는 이 전설은 포항시 호미곶 광장에 연오랑세오녀 상으로 구현돼 있다.
약 2000년 전,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바다를 건너간 곳,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제사를 지낸 곳. 그 고장은 오늘날에도 해맞이의 명소이자 해마다 1월 1일에 축제를 여는 장소로 남아 있다. 제사가 축제로 바뀌었을 뿐, 그 역사와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설을 두고 신라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흥미로운 해석을 하기도 한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 세력 집단을 상징하며, 이 이주민 세력은 일본에 건너가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신라와 교류했다는 추론이다. 전설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 것인데, 꽤 그럴듯하다.
지금은 바다 위에 그어진 국경선이 두 나라를 철저히 구분하지만, 오히려 그 당시에는 수많은 집단의 자유롭고 복잡한 이동이 다양한 신화와 전설의 형태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해맞이 명소
전설에 나오듯 해와 달의 정기가 살아 있는 고장, 그래서 동네 이름도 해맞이, 영일(迎日)이다. <삼국유사>의 연오랑세오녀 조에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곳은 문헌상 가장 오래된 해맞이 명소인 셈이다.
이 영일만의 끝은 동쪽으로 튀어나온 육지의 끝이기도 하다. 전남 해남의 땅끝과는 다른, 또 다른 땅끝이다. 우리나라 지도 모양이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할 때 그 꼬리에 해당한다 해서 호랑이 꼬리, 호미(虎尾)곶이라 이름 붙인 고장, 이 호미곶 해맞이광장에서는 해마다 12월 31일부터 다음 해 1월 1일까지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한반도를 토끼 모양이라 하고, 이곳을 토끼의 꼬리라고 비하해 부르기도 한 곳이다. 이른바 상징 조작인데, 일제는 한반도를 초식 동물이자 순종적 이미지의 동물인 토끼를 닮았다 하여 우리나라의 강한 정기를 약화시키고 일본의 식민 지배에 순응하게 만들려 했다. 우리는 반대로 한반도를 육식 동물이자 기가 센 동물인 호랑이에 비유해 한국인의 정기를 살리고자 했다. 한쪽은 깎아내리고자, 한쪽은 이에 대항하고 극복하고자 서로 반대되는 성격의 상징 동물을 내세운 셈이다.
▲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지도 조형물 호미곶광장에 조성된 한반도 지도 모양의 조형물이다. 호랑이가 앞발을 쳐들고 포효하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도 좋다. ⓒ 홍윤호
이곳 명칭인 호미곶(虎尾串)은 호랑이 꼬리를 의미한다. 한반도를 호랑이가 앞발을 든 모양이라고 보고 호랑이 꼬리가 튀어나온 지점이라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호미곶 광장에 설치된 한반도 조형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호미곶으로 가는 운치 있는 드라이브 코스는 포항시 동해면에서 925번 지방도로를 따라 호미곶 반도를 완전히 한 바퀴 돌면서 구룡포읍을 거쳐 다시 동해면으로 들어간다. 맑고 푸른 바다와 때때로 해안에 툭 튀어나온 기암괴석, 간간이 나타나는 아담한 포구, 하얀 모래와 검은 몽돌이 깔린 부드러운 해수욕장이 내내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드라이브 코스를 낳은 도로가 동쪽으로 가고 또 가다가 더 이상 동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 길을 남쪽으로 돌리게 되는 지점에 대보리가 있고, 호미곶이 있다. 이 호미곶이 있는 대보면은 2010년 호미곶면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제 호미곶은 호미곶면에 있는 명소가 됐다.
멋진 해맞이를 할 수 있는 광장 앞바다에는 명물 '상생의 손'이 바다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다. 맑은 겨울날 아침, 이 상생의 손 바로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게 된다면 벅찬 감동을 느끼리라. 그래서 1월 1일 아침에는 해 뜨기 훨씬 전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펼쳐진다. 손가락 위로 뜨는 해를 보기 위해서. 이 경쟁은 예상외로 치열하다.
그러니 1월 1일을 피해 좀 여유롭게 해맞이를 하자. 차를 가지고 갈 경우, 1월 1일만 아니라면 맑은 날에는 상생의 손이 보이는 길가에 차를 갖다 대고 해 뜰 때까지 차 안에서 대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상생의 손 위의 일출은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해맞이 풍경으로, 일대 바위들과 잘 어울려 인공적이되 인공의 느낌이 덜한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 호미곶 등대 1903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역사적인 등대이다. ⓒ 홍윤호
해맞이광장 옆으로는 호미곶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이 있다. 온통 새하얀 색으로 칠해져 푸른 바다와 색채의 조화를 이루는 등대는 1903년 12월에 건립돼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동해안에서는 첫 번째)로 붉을 밝힌 역사적인 등대이다. 어떤 이들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호랑이 꼬리에 불을 붙여 혼비백산하게 했으니 이 등대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 국립등대박물관 호미곶에 조성된 등대박물관은 내부에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시설들이 있어 좋다. ⓒ 홍윤호
등대 옆의 국립등대박물관은 유물관과 체험관, 등대역사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등대의 역사와 등대 관련 장비, 사진과 문헌 자료들을 비교적 깔끔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체험관에는 아이들과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설들이 있다. 등대 탁본, 도장 찍기 체험, 보트 운전 체험 등 찬찬히 돌아보면 쏠쏠한 재밋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6시, 입장료는 무료, 홈페이지는 www.lighthouse-museum.or.kr).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의 아픈 과거
▲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구룡포항에는 1923년 구룡포항을 조성한 이후 들어와 살았던 일본인들의 거리가 남아 있다. 이 거리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 촬영지로 이용되면서 핫플레이스가 됐다.ⓒ 홍윤호
호미곶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구룡포와 감포를 거쳐 울산까지 이어진다. 구룡포항 바다 앞에 자리한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한 일본가옥 거리가 남아 있다. 2019년 하반기의 인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로 꽤 알려지면서 요즘 '핫플레이스'가 된 곳이다.
구룡포항은 1923년 일제가 동해안의 어업 전진 기지로 만든 항구이다. 그러다보니 항구 바로 앞에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조성됐다. 해방 후 7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일본식 가옥 몇 채만 남아 있던 거리를 포항시가 재정비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이곳에 살던 하시모토 겐이치의 집을 근대 역사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몇몇 일본식 가옥들을 정돈하여 규모는 작지만 아담한 근대 역사 거리로 재탄생했다.
바로 이 거리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유명세를 타고 널리 알려졌다.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구룡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룡포 공원 일대, 동백이집과 동백이의 가게 '까멜리아'로 활용된 문화마실, 게장골목으로 활용된 일본인 가옥 거리 등 드라마 여행길로 새로운 명소가 됐다.
▲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살았던 거리를 포항시에서 재정비, 복원했다. ⓒ 홍윤호
하지만 이곳이 일본인 거리였던 만큼 생채기도 남아 있다.
구룡포 공원으로 오르는 입구의 계단과 돌기둥들은 1944년 일본인들이 세운 것들인데,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해방 후 구룡포 주민들은 이 기둥에 시멘트를 발라 기록을 덮고 돌기둥을 거꾸로 돌려세웠다. 구룡포항에 살던 한국인들의 반일 의식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다 1960년 주민들이 이 기둥의 앞뒤를 돌려세운 다음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한 충혼각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명단을 새겼다.
돌기둥 자체는 죄가 없건만, 거꾸로 세워지고 앞뒤로 돌려지는 사건을 겪었다. 이 돌기둥의 운명이 역사의 상처를 되새기게 해주는 셈. 현재 공원 오르는 길 계단 양옆에 서서 기구한 운명을 증언하고 있다.
구룡포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은 길고 긴 동해안을 따라 줄곧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동해안에서도 대표적으로 오염이 적고 한적한 코스이다. 조용한 바닷길을 원한다면 이 코스를 따라 겨울 동해안을 맘껏 즐기기를 권한다. 이 길에는 요즘 잘 알려진 경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도 있어 들렀다 갈 만하다.
[여행 정보]
- 호미곶광장 뒤로 500대 이상을 수용하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주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상생의 손 앞까지 제법 걸어가야 한다. 평일의 경우 상생의 손 바로 앞 해안 길가에 차를 세울 수 있어 평일에 갈 수 있다면 좀 더 편하게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 호미곶 입구에 몇몇 숙박업소들이 있으나, 가능하면 포항 시내나 구룡포 쪽에서 묵고, 아침 일찍 호미곶으로 오는 것이 좋다.
- 구룡포 일대는 겨울 과메기의 본고장이다. 오가는 길에 과메기를 먹어볼 만하다. 호미곶 일대의 대게 요리와 전복죽, 포항 시내 죽도 시장의 물회도 좋다.
[가는 길]
- 자가용으로 호미곶에 갈 경우 포항에서 국립등대박물관 주소를 치고 가자(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 해맞이로 150번길 20).
- 대중교통으로는 포항 시내 시외버스터미널, 고속버스터미널 등에서 200번, 210번 버스를 이용, 구룡포에 간 다음, 구룡포에서 호미곶행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종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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