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 의장 운명… 영원한 우리들의 ‘의장님’이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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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술 기자 epoque@vop.co.kr
발행 2019-12-08 01:54:06
수정 2019-12-08 10: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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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 의장은 진보운동을 경험한 이들에겐 영원한 ‘의장’이었다.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광주전남연합 의장을 시작으로 전국연합 상임의장, 한국진보연대 총회 의장에 이르기까지 항상 민중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한 그는 언제나 노동자 민중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전선운동을 함께했던 많은 동지들이 보수정치권에 몸을 담으며 곁을 떠났지만, 오 의장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의장직을 맡지 않고 있을 때도 ‘의장님’이라고 불렀고, ‘의장님’이란 호칭엔 그를 향한 믿음이 담겨 있다.
“수십 년 동안 전선 사업을 해왔다. 분단된 이 땅에서 전선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에 영합한 사대주의로부터 민족자주성을 되살려내고, 반파쇼반독재민주화에서 시작해 반독점경제민주화를 종국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일제식민지 연장선인 분단구조를 해소하는 데서 이뤄진다는 절박성으로 자주민주통일을 함께해 왔다. 그래서 자주민주통일을 정치 강령으로, 민중생존의 방책으로, 미래의 평등복지사회를 건설하는 토대를 만들어가는데 중심에 두고 모든 부문과 지역의 일꾼, 사람들이 전선으로 모였다. 그 전선운동이 사실은 1945년 해방정국에서 태동했다가 무참히 깨졌고, 수십 년 황무지로 있다가 우여곡절을 거쳐 낮은 단계이지만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이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었다.”
지난 2013년 통합진보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 의장은 전선사업에 헌신해온 지난 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당시 오 의장은 7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에서 총회 의장으로 다시 일선에 돌아왔다. 이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평생 자주민주통일을 외쳐온 오 의장의 지난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전교조 창립에 몸을 던지다
“교사는 노동자다.
참교육실현은 우리의 생명이다.
교사의 사회적 경제적 권익을 보장하라.
교육의 주체는 학생 학부모 교사이다”
“교사는 노동자다.
참교육실현은 우리의 생명이다.
교사의 사회적 경제적 권익을 보장하라.
교육의 주체는 학생 학부모 교사이다”
오 의장은 1938년 11월 28일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여운형과 박헌영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아버지 오정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5년 광주사범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교육학 학사)를 졸업한 오 의장은 초등, 중등 교원 자격을 취득했고, 전남 고흥에서 중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해 이후 금산초등학교 교사, 광주 동명여자중학교 교사, 전남대학교 사대부속고등학교 교사, 전남고등학교 교사, 전남여고 교사로 활동했다.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활동을 시작해 이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대회 의장, 광주교사협의회회장,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광주지부장 등을 지냈다. 오 의장은 지난해 쓴 글에서 “8.15와 조국분단, 4.3항쟁과 4.19혁명, 5.18과 6월항쟁을 넘어온 이 땅 대중의 민주 염원은 한결같았다. 이에 호응한 교사들도 교육민주화는 사회민주화의 단초이자 그 성과라는 결의에 따라 자주적 민주교원단체를 대중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는 노동자다. 참교육실현은 우리의 생명이다. 교사의 사회적 경제적 권익을 보장하라. 교육의 주체는 학생 학부모 교사이다… 드디어 1989년 지금까지 쌓아온 역량을 모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탄생시켰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투옥
“노역 생활은 지식분자의 관념적 낭만주의,
그런 껍질을 벗기는데 도움이 됐어요”
“노역 생활은 지식분자의 관념적 낭만주의,
그런 껍질을 벗기는데 도움이 됐어요”
오 전 의장은 지난 1989년 전교조 관련자로 구속 해직됐다. 당시 구속돼 집행유예로 풀려나기까지 3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짧은 구속기간이었지만, 오 의장에겐 커다란 변화의 시간이었다. 오 의장은 2007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같은 교도소 안에 담장을 경계로 미결수 사동과 기결수 사동이 엄격하게 나뉘는데, 저쪽 담장 너머에서는 30~40년 수용생활한 장기수들이 있었지. 그전에도 장기수분들이 계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심부름하는 교도소 복역수 등에 의해서 (제대로) 알게 됐어요. 고문 당하고, 불구자 되고……. 이런 끔찍함 속에서 30년을 넘게 살아온 거야. 나는 일평생 동안 지울 수가 없어. 그것을 몰랐던 나의 몽매함, 야만에 가까운 고매함……. 그 아픔을 잊을 수가 없어”라고 그때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는 구속 기간 동안 스스로 ‘노역’을 자청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느꼈을 고통과 절망이 어두컴컴한 물 밑에 있는 것처럼 그를 압박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감, 부끄러움이 그를 괴롭혔다. 스스로는 그 때의 ‘노역생활’이 구원이었다고 말한다. “그 노역 생활은 지식분자의 관념적 낭만주의, 그런 껍질을 벗기는데 도움이 됐어요.”
광주 광역의원에 당선
대쪽같은 성격과 활동으로 우수의원 선정
시의원 활동 중 구속돼 2년 8개월 투옥
대쪽같은 성격과 활동으로 우수의원 선정
시의원 활동 중 구속돼 2년 8개월 투옥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광주전남민주연합 공동의장을 역임하는 등 1991년 12월 결성된 전국연합 결성에 앞장섰고, 전국연합 산하 광주전남연합 의장을 지내며 전선운동과 민중운동을 이끌었다. 아울러 오 의장은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광주 북구6선거구에 출마해 제1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시의원 재직하면서 교육 분야 개혁안을 발의하는 등 활동했다. 1995년 광주기독교청년회 시정지기단은 그를 우수의원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 오 의장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의 시의원이었다. 이런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991년 8월 8일 광주광역시의회는 본회의장에선 교육위원 선출 투표가 있었다. 당시 광주광역시의원들은 교육위원 가운데 1명 이상은 반드시 전교조 출신으로 뽑겠다고 약속했다. 오 의장은 회의에 앞서 동료 시의원들에게 “현장에서 교육민주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오다 교단을 떠난 후보가 소외되지 않게 해달라”며 전교조 광주지부장 출신인 정해숙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지지를 약속했던 광주시의원들이 배신을 했고, 결국 정 후보는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오 의장은 본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시의원들을 향해 “동료 시의원 여러분, 참 훌륭하시네요. 예끼”라고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당시 야당 시의원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꾸짖은 당시 오 의장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며 화제가 됐다.
이런 대쪽같은 성격과 전선운동과 민중운동에 앞장서는 활동이 공안기관엔 늘 누엣가시였다. 시의원 활동에 한창이던 지난 1994년 12월30일 오 의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광주전남연합 상임의장으로 활동하며 남총련 등이 벌인 각종 시위의 배후, 그리고 그해 6월 범민련 광주시, 전남지역본부 결성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그는 2년 8개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98년 전국연합 상임의장으로 선출
10년 넘게 활동하며 한국진보연대 건설
10년 넘게 활동하며 한국진보연대 건설
1997년 출소한 그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전선운동과 민중운동의 최전선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그는 1998년 전국연합 상임의장으로 선출된 뒤 지난 2008년 전국연합이 공식 해산할 때까지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다. 오 의장이 상임의장에 선출된 1998년 전국연합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전국연합이 위기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전선운동의 맥을 한국진보연대로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건 오 의장이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 의장은 전국연합 창립 10주년이었던 지난 2001년 자주민보와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돌아봤다. “민족민주운동진영은 또 한 번 큰 시련을 겪습니다. 95년 이북에 큰 물난리가 있었지요. 북은 가장 긴 시간 미국의 경제봉쇄정책 속에서 살아왔어요. 쿠바와 이라크와의 그것과는 비견도 되지 못할 만큼. 이것을 두고 3년 안에 붕괴될 거라는 주장들이 여기저기 무시무시한 전염병처럼 창궐했고, 이런 흐름은 운동진영에 마지막 결정타를 안겨주었습니다 또한 젊은이들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96년 연세대 사태, 97년 한양대 프릭치 사망 사건을 거치며 내부분열과 상극의 현상을 보았어요. 97년 출소 후 내가 본 전국연합은 전세계 민족해방 전사들이 세계의 빛으로 우러르던 모습은 없고 산산히 부서진 난파선의 모습이었어요. 그러나 민족의 명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강인하고 확실한 자주민주통일의 전사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이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자주민주통일의 강령을 없애버리려는 그 자리에 다시 깃발을 들었어요. 너무나 심한 상처 때문에 그 회복이 상당히 더디기는 합니다.”
여중생 촛불부터 한미FTA 반대까지
민중이 싸우는 현장이라면 언제나 함께
민중이 싸우는 현장이라면 언제나 함께
흔들리던 전국연합을 다시 일으킨 오 의장은 민중이 싸우는 현장에 늘 앞장섰다. 지난 2002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주한미군의 탱크에 의해 당시 중학생이던 효순이와 미선이가 사망하자 여중생 범대위 공동대표를 맡아 촛불집회를 이끌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자 탄핵무효부패정치청산 범국민행동 상임 공동대표를 맡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일선에서 뛰었다. 아울러 이라크 파병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자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 공동대표를 맡아 2004년 7월 파병반대 릴레이 단식을 이끄는 등 반전평화를 앞장서 외쳤다. 당시 오 의장은 릴레이단식을 시작하며 “이라크의 민간인만 1만 명 이상이 죽은 더러운 전쟁에서 이제는 이 짓거리를 우리 아들들이 하게 되었다”면서 “피에 피를 부르는 보복의 악순환이 벌어지게 될 것”라고 경고했다.
참여정부 집권 기간 동안 오 의장은 2004년 민중연대 상임대표와 2005년 ‘전쟁과 빈곤을 확대하는 아펙 반대 부시 반대 국민행동(반아펙·반부시 국민행동)’ 상임대표를 거쳤다. 지난 2005년 전국농민대회에서 전용철 농민이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하자 전용철 농민 살인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또 평택미군기지 확장 이전에 반대하며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해 투쟁에 나섰다. 2006년엔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를 강행하려 하자, 한미FTA에 반대하며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7년 한미FTA저지 범국민대회를 주도하는 등 반대 투쟁을 이끌다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같이 활동한 고 정광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과 함께 구속되기도 했다.
오 의장은 당시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가면 나라는 끝장입니다. 한미동맹이라고 말합니다. FTA, 이라크 침략전쟁도 한미동맹 때문입니다. 한미동맹이면 어떠한 것도 다 연결되어 있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종놈밖에 되지 않습니다. (중략) 미국이 시키는 대로 다하고 있습니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등뼈를 세워야 합니다. 아닌건 아니라고 이야기 해야 합니다. (중략) 문제는 미국을 추종하고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따라서 영달과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이땅에 쫙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깨어나야 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의 주권을 세워야합니다.”
“대국인 미국에 예속된 나라의 조건에서
전선을 잇몸으로, 진보정당은 치아로
발전해 가야 민생도, 복지도 보장될 수 있는
자주통일의 틀을 만들 수 있다”
전선을 잇몸으로, 진보정당은 치아로
발전해 가야 민생도, 복지도 보장될 수 있는
자주통일의 틀을 만들 수 있다”
구속됐던 오 의장은 보석으로 풀려나자 마자 지난 2007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빈민연합, 민주노동당,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민주노동자전국회의 등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한 상설연대체인 한국진보연대를 만드는데 힘을 쏟았고, 상임대표를 맡았다. 2007년 9월 16일 열린 한국진보연대 출범식에서 오 의장은 “이랜드·뉴코아 투쟁으로 터진 비정규직 철폐투쟁, 논두렁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농민투쟁, 아스팔트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빈민투쟁, 청년실업문제를 제기하며 촉발되고 있는 청년투쟁, 여성해방 평등투쟁 등 모든 계층과 부문에서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들이 전개되고 있다”며 “이제 진보연대를 중심으로 미국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민중해방을 안아오자”고 호소했다.
오 의장은 이후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투쟁과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투쟁, 2014년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에 함께하며 민중운동을 이끌어왔다. 아울러 오 의장은 2002년 서울시장 이문옥 후보 선대위원장, 2002년 대선 권영길 후보 선대위원장, 2004년 총선 선대위원장을 맡는 등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 운동에 힘을 실었다. 오 의장은 2013년 통합진보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과 같은 특수한 사회(분단이면서 분단이 정상으로 도착된 시각, 가치) 속에선 진보정당만 갖고는 우리의 희망을 달성할 수 없다. 전국연합 시절에는 민족민주운동에서 투쟁의 구심이자, 정치적 대표체를 자임했다. 전국연합이 그것을 일시적, 한시적으로 할 수 있었지만 현실정치 세계에 진출해 우리의 정치적 이해와 요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정치부대가 있어야 했다. 그것이 진보정당이었다. 분단된, 실제로 강대국인 미국에 예속된 나라의 조건에서 전선을 잇몸으로, 진보정당은 치아로 발전해 가야 민생도, 복지도 보장될 수 있는 자주통일의 틀을 만들 수 있다”며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통합진보당이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해산될 위기에 처하자 오 의장은 각계 원로들과 함께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반대와 민주주의수호를 위한 원탁회의’를 제안해 진보정당 수호를 위해 앞장섰다. 오 의장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통합진보당 선대위 출범식에서 “민중의 행복, 민중의 해방을 말하면 ‘종북’이라 욕질하며 내치려든다.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정당을 지향하는 진보정당을 내란음모로 몰아 해체하려든다”며 “아름다운 지역공동체를 책임지고 보살피며 가꾸기 위해 나선 여러분 자신의 신심을 믿고, 동지들의 사랑을 믿고, 그 무엇보다도 주민의 마음을 믿고 전진하시리라 믿는다. 여러분의 이 실천철학 필승전술은 화를 복으로 바꿔낼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바꿔낼 것”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이후 통합진보당이 해산된 뒤 오 의장은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에 따른 비상원탁회의’를 만들어 민주주의 회복을 외쳤다.
“저것이 바로 민중입니다.
뿌리깊은 민중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모두 개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뿌리깊은 민중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모두 개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평생을 진보운동과 민중운동에 헌신해온 오 의장은 후진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 마지막 힘을 쏟았다. 지난 2015년 오 의장은 백기완 선생, 함세웅 신부 등과 함께 ‘5·18민족통일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을 맡았다. 5월정신을 계승하고 평화적 민족통일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국립5·18민주묘지 부근에 문을 연 ‘5·18민족통일학교’는 오 의장이 정부로부터 받은 민주화운동보상금과 강의료, 대출금 등을 모아 내놓은 2억 원 가량의 돈으로 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그가 중심이 돼 학교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각계의 후원이 이어졌고, 900평 부지에 연건평 180평, 4층 건물이 세워졌다. 2015년 6월 28일 열린 ‘5·18민족통일학교’ 준공식에서 오 의장은 고천문을 통해 “5월 정신 계승 발전 없이는 어떤 민주주의도, 인권도, 평화도 마침내 어떤 복지사회도 다 허상일 수밖에 없다”며 “깨우치고 일어서는 민중이 곧 메시아요, 미륵이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라고 강조했다.
‘5·18민족통일학교’를 위해 오 의장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힘을 쏟았다. 투병 중에도 지난 9월 21일 열린 5.18민족통일학교 제 4차 정기총회에 직접 나가 개회사를 했다. 그리고 그날의 말은 우리들 모두를 향한 그의 마지막 당부처럼 다가왔다. “내가 여러분을 얼마나 기다렸는 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찾아줘서 참 좋습니다. 내 몸이 비록 이렇게 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여러분들에 의해서 뜻이 다 이루어지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민중을 위하여, 민중과 더불어, 민중과 함께! 조국통일의 자주성을 확실하게 확보합시다. 모든 것은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발, 날마다 새로운 출발, 여러분에게 기대합니다. 저(학교) 뒤에 보면 대숲이 있습니다. 저 자라나는 대숲을 나는 날마다 바라보며 연명해갑니다. 저것이 바로 민중입니다. 뿌리깊은 민중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손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모두 개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들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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