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호 경찰국장은 정말 노동운동 하다 변심해 경찰이 됐을까?

 

  • 최지현 기자 cjh@vop.co.kr
  • 발행 2022-08-11 23:12:55
  • 수정 2022-08-12 07:54:10
    •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행정안전부 경찰국을 찾아 근무자들을 격려한 뒤 나서고 있는 가운데, 
    • 김순호 경찰국장이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 (자료사진) 2022.08.02. ⓒ뉴시스

    33년 전인 1989년 1월, 인천과 부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간부와 회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2월에도, 4월에도, 5월에도 경찰의 연행은 이어졌다. 인노회가 느닷없이 이적단체로 낙인찍히면서다. 6월 사건이 법원으로 넘겨지면서 인노회라는 조직은 와해됐다. 일명 ‘인노회 사건’은 훗날 재심을 통해 이적단체라는 누명을 벗은 대표적인 조작 사건이었다.

    그런데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 과정에서 돌연 모습을 감췄던 인노회의 부천지역 조직 책임자인 김순호가 두 달 뒤에 경찰관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김순호는 오늘날 행정안전부 초대 경찰국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인노회 회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경찰에 붙잡히기는커녕 오히려 경찰이 되어 돌아온 ‘동지’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성균관대 81학번 김순호
    학생운동하다 강제징집→녹화사업 당해
    전역 후 노동운동하다 인노회 가입, 부천지역 조직 책임자까지
    “김순호 열심히 활동했다” 동료들 증언
    이듬해 곧바로 인노회에 경찰 탄압 시작
    그 사이 김순호 돌연 잠적
    인노회 사건 끝나자 경찰로 특채


    민중의소리 취재에 따르면 광주 광산 농민의 아들이었던 김순호는 80년 광주고를 졸업하고 81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곤 83년 3월 학내 운동권 동아리인 ‘심산연구회’에 가입했다. 심산연구회는 김순호보다 한 학번 선배들이 만든 동아리였다. 심산연구회 회장을 지냈던 김순호의 선배 A씨는 “저도 순호를 되게 예뻐했다. 순호가 활동도 열심히 하고 착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를 이어 김순호가 심산연구회 회장이 된 이유였다.

    민주화운동에 나선 학생들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여전히 악랄하던 그 시절, 김순호도 이를 피할 순 없었다. 과거 전두환 정권은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 중심으로 퍼진 민주화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시위 현장에서 학생들을 잡아다 군에 강제징집했는데, 김순호 역시 83년 4월 친구들과 함께 강제징집됐다. 그리고 2년이 흐른 85년 7월에 전역한 김순호는 학교로 곧장 돌아가지 않고 그해 9월부터 같은 학교 친구들과 함께 부천지역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김순호가 인노회에 가입한 건 88월 3월 인노회가 창립된 지 한 달여 지난 시점이었다. 김순호에게 인노회 가입을 제안했던 사람은 성균관대 한 학번 선배이자 심산연구회를 만들었던 최동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동 역시 김순호를 굉장히 아꼈던 선배였다고 한다.

    인노회에는 ‘현장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김순호는 공장에서 일했던 만큼 곧바로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김순호가 부천지역 조직 책임자가 된 건 그해 11~12월경이었다. 인노회는 회장단, 사무국, 조직국, 그리고 조직국 산하에 부평·주안·부천지구위원회로 구성돼 있었는데, 김순호가 부천지구위원장이었던 것이다. 부천지구위원회 아래에는 8개 정도의 분회가 있었고, 회원들은 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인노회에 대한 경찰의 탄압이 시작된 건 이듬해인 89년 1월 말이었다. 1월 26일 부부회원이 강제 연행된 데 이어 2월 8일엔 인노회 사무국 소속 회원 6명이 강제 연행됐다. 2월 16일엔 5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4월 28일 김순호의 선배였던 최동이 강제 연행됐다. 다음 날엔 김순호의 친구 두 명이 강제 연행됐다. 5월 이후에도 인노회 회장단 3명과 사무국원 6명, 대외활동이 많았던 부서 회원 중심으로 강제 연행이 이어졌다. 이 ‘인노회 사건’은 6월에 15명이 구속된 상태에서 기소되면서 일단락됐다. 이후 인노회는 와해됐고,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정작 부천지역 조직 책임자였던 김순호의 이름이 이 ‘인노회 사건’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인노회 회원들도 모두 의아해하고 있는 지점이다. 당시 김순호와 같이 인노회 활동을 했던 동료들은 김순호가 4월 초쯤 돌연 ‘잠적’했다고 입을 모았다. 인노회 간부뿐만 아니라 회원까지 줄줄이 연행되다가 잠시 잠잠해진 시점이었다. 당시 김순호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동거인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4월 말부터 김순호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줄줄이 연행됐다.

    김순호의 대학 동기이자 인노회 부천지역위원회 분회장을 맡고 있던 B씨도 그때 연행된 사람 중 한 명이다. B씨는 민중의소리와 만나 “제가 연행되고 진술을 거부하고 있었는데도, 이미 치안본부가 너무 많은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저희 분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며 “A3용지로 전체 조직도까지 보여주는 걸 보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알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저도 모르던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순호를 아꼈던 선배인 최동도 그때 연행됐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후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세를 얻어 그해 구속된 지 4개월여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나이 겨우 서른 한 살이었다. 최동 역시 생전에 누군가 자신을 밀고를 했을 것이라는 의심 때문에 정신적 압박감을 많이 호소했다고 한다.

    경기도 이천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 위치한 최동 열사의 묘. ⓒ민중의소리


    김순호 잠적 등 근거로 ‘경찰에 동료 밀고’ 의심 짙어져
    김순호, 인노회 사건 후 수사 책임자 찾아가 사실상 자수했다고 주장
    그런데 핵심 혐의자가 입건은커녕 오히려 경찰로 특혜
    경찰 내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 의문 제기
    홍승상, 김순호가 인노회 사건 증거 분석했다며 엇갈린 주장
    김순호 해명도 명확하지 않아

    당시 인노회 회원들은 김순호가 자신들을 밀고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강하게 했다고 한다. 경찰이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은 조직 책임자였던 김순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던 내용이었다는 점, 하필 그때 김순호가 잠적했다는 점 등이 근거였다. B씨는 “부천지역의 그 조직표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실 그 친구(김순호)밖에 없었다. 그 당시 (먼저) 잡혀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그런 조직도를 그릴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며 “게다가 김순호가 그때 잠적했기 때문에 가장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대체 김순호는 4월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인노회에 대한 경찰의 탄압이 시작됐던 만큼 잡히기 전에 어디론가 도피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랬다면 김순회의 도피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김순호가 그 당시 경찰에 붙잡혔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김순호 역시 경찰이 자신을 검거하기 위해 찾으러 다닌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경찰에 잡힌 적이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김순호는 경찰에 붙잡히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피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김순호는 11일 MBC라디오에 출연해 “4월에 제가 주사파로부터 단절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고향으로 내려간 건데 공교롭게도 이제 ‘인노회 사건’이 되면서 도피가 돼버린 것”이라며 “그래서 저 역시 고향집에 있지 않고 은신할 만한 곳에 있었다. 제가 있었던 곳은 사설독서실이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순호는 4월 들어 갑자기 잠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그전부터 (운동권에 대한) 회의와 갈등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순호는 인노회 사건이 기소로 일단락된 이후인 7월에 서울 홍제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직접 찾아가 인노회 사건 수사 책임자에게 그동안의 활동을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김순호는 MBC라디오에서 “인노회 사건이 마무리가 됐는지, 진행이 되고 있는지는 제가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가서 그것에 대한 진술을 했다”며 “4일 정도 조사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상한 점은 그때 김순호가 핵심 혐의자로 입건이 되기는커녕, 한달 뒤인 8월에 경찰로 특별채용이 됐다는 것이다. 그것도 순경보다 더 높은 직급인 경장으로 직행했다. 이에 대해 김순호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 책임자가 조사하면서 주사파에 물들까 걱정된다는 고백을 들은 뒤 역으로 ‘대공 특채’를 제안하면서 곧바로 경찰의 길을 걷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순호는 노동운동 조직 정보를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경찰 특채를 받는 ‘거래’를 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자수하러 간 핵심 혐의자를 수사 담당자가 입건조차 않고 오히려 특채를 제안해서 실제로 채용까지 했다는 것인데, 이는 경찰 내부에서도 납득이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익명을 요구한 총경급 경찰관은 민중의소리와의 전화통화에서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불법에 가담했다면 형사입건해야 하고, 그렇게 안 하면 직무유기죄로 경찰이 처벌받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혐의자가) 자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혐의 감면 사유일 뿐”이라며 아예 면책이 될 수는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김순호는 MBC라디오에서 “그 면책 부분은 어떻게 됐는지 그때는 제가 잘 알 수가 없었던 상황”이라며 합리적인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다면 김순호는 어떤 근거로 특채가 된 것일까. 법적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이성만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김순호는 경찰공무원법과 경찰공무원임용령에 따라 ‘임용예정직에 상응한 보안업무 관련 전문지식을 가진 자’로 인정돼 특채됐다. 경찰청이 구체적으로 근거로 든 법률과 훈령 가운데 경찰공무원임용령 16조 4항 4호에 따르면 ‘대공공작업무와 관련 있는 자를 대공공작요원으로 근무하게 하기 위해 경장 이하의 경찰공무원으로 임용하는 경우’가 가능하다.

    김순호도 MBC라디오에서 “전문지식이 있는 자로 해당돼 특채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학위도 없는데 어떤 게 전문지식이냐’는 질문에 김순호는 “주사파로 오래 활동을 했다. 주사파가 되기까지는 주체사상에 대한 학습, 북한의 대남혁명노선에 대한 학습, 이런 것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 러시아 혁명을 성공한 레닌의 혁명론 등 공산주의 혁명 이론에 대한 학습들이 전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이것이 자신이 가진 ‘전문지식’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김순호의 말대로라면 그 당시 운동권 서클에 가입을 해서 이념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전문지식을 가진 자’로서 마음만 먹으면 경찰에 특채될 수 있다는 것이 되므로, 설득력을 얻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지적이 나오자 김순호는 “그건 채용을 하는 기관에서 평가하는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이처럼 경찰 특채 과정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다 보니 인노회 동료들을 ‘밀고’하는 공적을 쌓아서 특채가 된 게 아니냐는 의혹만 더 커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김순호가 경찰이 되어 처음 일하게 된 곳도 인노회 사건을 담당했던 치안본부 대공수사3과였다.

    그러나 김순호는 ‘공적’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김순호는 ‘대공공작업무와는 상관이 없다’며 경찰청이 근거로 공개한 경찰공무원임용령 적용 사실마저 부인했다. “대공공작업무라는 건 하위법령에 규정돼 있던 것”이라고 둘러대면서다. 김순호는 앞서 KBS와의 인터뷰에서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으로 주사파가 됐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나를 중심으로 얘기했다”며 인노회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인노회 사건(경찰 수사)에 영향을 준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 내부에선 이런 김순호의 주장 역시 수긍하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마산동부경찰서 양덕지구대장인 류근창 경감은 MBC라디오에 출연해 “과거 희대의 도주범 신창원을 검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 신고자였다. 그분이 원래는 케이블TV 기사였는데 꿈이 경찰관이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경찰에서 그분을 순경으로 특별채용한 사례가 있다”며 “아주 큰 공을 세우면 그렇게 경찰관으로 특별채용하는 사례가 있긴 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순경보다 더 높은 직위인 경장으로 특채가 되려면 그에 상당하는 ‘공적’이 분명히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순호가 찾아갔다는 ‘인노회 사건 수사 책임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증언도 김순호의 주장과 엇갈린다. 그는 내무부 치안본부 대공수사3과 소속 홍승상 경감이었다. 홍승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경위서에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문장을 쓴 당사자로 지목된 인물로, 대공 수사 분야에서 악명이 높다.

    홍승상은 최근 TV조선과 익명으로 인터뷰를 했다. TV조선에 따르면 홍승상은 1989년 초 김순호가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와 “제가 운동권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김순호는 1989년 7월에 홍승상을 찾아갔다고 밝혔는데, 홍승상은 그보다 앞선 시점인 1989년 초라고 언급한 점이 일단 눈길을 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노회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될 때부터 김순호가 도움을 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홍승상은 “(김순호가) 운동권에서 이념을 많이 배운 사람이라, 운동권 사건 관련 증거물들이 오면 분석을 시킨 거야. 그래서 그 사람한테 많이 도움을 받았다고. 대표적인 사건이 인노회 사건인데”라며 “그 사건(인노회 사건)을 할 때 많이 (김순호) 도움을 받았어. 안보 정국을 전환시키는 데 내가 봐서는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국장이 운동권에서 완전히 빠져나왔고, 수사에 도움까지 줬잖아”라며 “그래서 내가 특채로 그렇게 받아준 거야”라고 강조했다. 인노회 사건에 영향을 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김순호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셈이다.

    앞서 김순호도 YTN에 “자신은 운동권에 몸담은 경험으로 증거물 분석에 특기가 있었기 때문에 대공 특채가 된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증거물 분석’ 특기가 김순호에게 있다고 경찰이 어떻게 확인했는지 의문이 남았는데, 홍승상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의문은 풀리는 셈이다. 이에 대해 김순호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한 상태다. 김순호는 MBC라디오에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고만 말했다. 현재 홍승상 인터뷰 기사 전문은 삭제된 상태다.

    김순호가 8월 경장으로 특채된 뒤 10월에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회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터졌다는 점을 봐서도, 김순호가 과거 몸 담았던 단체 등에서 얻은 정보를 수사에 이용한 게 아니냐는 의혹에 힘이 실린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인노회 사건 이후 사망한 최동이 87년 6월항쟁 이후 조직화에 가담한 노동자 단체였기 때문이다.

    민중의소리 취재를 토대로 정리한 사건 일지 ⓒ민중의소리


    김순호는 정말 노동운동 도중 변심한 걸까?
    녹화사업 이후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의혹 짙어져
    녹화사업 내용 담긴 개인 자료는 공개 거부
    결국 김순호가 직접 밝혀야 하는 문제

    돌이켜보면 민간인이었던 김순호가 대공수사 분야에서 경찰 간부급이었던 홍승상을 직접 찾아가서 만난 것부터 부자연스럽다. 김순호가 홍승상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느냐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김순호는 MBC라디오에서 ‘사전에 무슨 교류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제가 알고 찾아간 게 아니라, 찾아가서 만나보니 그랬다(홍승상이었다)”고만 답했다. 누군가가 ‘어디로 가보라’고 해서 찾아가본 것인지도 모를 일인데, 김순호는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순호가 노동운동 도중 변심한 것이 아니라, 일찍이 ‘프락치(끄나풀)’로 활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그 외에는 김순호와 홍승상 사이에 연결고리가 특별히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순호는 강제징집이 됐던 83년 11월 ‘녹화사업’ 대상자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강제징집된 학생들을 고문과 협박, 회유를 통해 학내 동향 수집 보고 활동 등을 강요했는데 이를 ‘녹화사업’이라고 한다. 적화된(불온한) 사상을 녹화(온건화)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군은 녹화사업 대상자들에게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진술을 강요하고, 생각과 이념을 바꾸고, 나아가 반성문까지 작성하도록 강제했다. 특히 서클 활동 등에 대해 조사하면서 동료, 선⋅후배들의 활동사항을 진술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프락치’ 활동까지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종주 강제징집녹화공작 진실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은 격리-심사-순화-활용 단계로 나아간다”며 “제대 후에도 계속 국가로부터 관리받으며 소위 ‘프락치’로 활용되는 사례가 꽤 존재한다”고 증언했다. 실제 2006년 7월 발표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강제징집·녹화사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녹화사업 대상자를 ‘제대 후 학원안정 요원으로 활용’하는 사후관리도 했다는 내용이 당시 문교부와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바 있다.

    만약 김순호 역시 실제로 ‘프락치’로 활동한 것이라면, 조직 책임자였음에도 경찰에 잡히지 않았던 점, 자백하러 직접 수사 책임자를 찾아갔음에도 아예 면책까지 된 이유가 모두 설명이 된다. 인노회 회원이란 가면을 썼을 뿐 실제론 인노회 회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김순호가 ‘프락치’였다면 홍승상 역시 이를 대외적으로 인정하긴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홍승상이 인터뷰에서 ‘김순호가 다짜고짜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던 배경도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인노회 사건’ 전, 김순호에 대해 이상한 낌새를 주변에서 느끼진 않았을까. 오히려 김순호는 운동권 활동에 회의를 느껴서 4월에 인노회를 떠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그의 내적 갈등을 옆에서 체감했던 동료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김순호를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잘하는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순호의 대학 동기인 C씨는 “보통 학생운동을 하다가 그만두는 경우 고시 같은 시험 공부를 하러 가거나 한다. 그런데 김순호는 그런 단계를 건너뛰고 갑자기 경찰이 됐다.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순호의 이후 돌변한 행보가 동료들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인다.

    ‘프락치’는 함정수사·위장수사의 일종으로, 현재 법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의 총경급 경찰관은 “범죄집단에 들어가서 그렇게 (‘프락치’ 활동을) 하는 건 영화에 나올 법안 소재일 뿐이지 지금은 그렇게 수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 만큼 과거 ‘프락치’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가 ‘경찰국장 자격’이 있느냐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이 경찰관은 “그동안 경찰국 신설에 경찰들이 반대한 것도 녹화사업이란 명분으로 정당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이에 가담한 사람을 승진시키는 등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됐던 암울한 과거로 회귀하면 안 된다는 목소리였다”며 “과거에 그런 의혹이 많은 인사가 경찰국장이 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고 비판했다.

    김순호는 자신은 “녹화사업 피해자”일 뿐이라며 ‘프락치’ 활동 의혹에는 “억측으로 구성된 소설 같은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다. 김순호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녹화사업 당시 공작 활동과 관련해선 누굴 만난 뒤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친구들과 술 마신 내용 등만 보고해 별일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김순호는 MBC라디오에서 “제가 진짜 밀고를 했거나 프락치였다면 왜 사라지겠나”며 “제가 진짜 프락치이고 밀고했다면 정말 의심 받을 게 뻔한데 인노회 사건이 끝나자마자 어떻게 특채가 되느냐”고 되레 목소리를 높였다. 

    이성만 의원이 국가기록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요구 답변서에 따르면, 과거 국군안보지원사령부에서 작성한 김순호에 관한 ‘존안자료’를 지난 2020년에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관리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존안자료’는 보안사가 녹화사업 대상자들을 관리하며 작성한 개인 파일을 지칭한다.

    2006년 7월 발표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강제징집·녹화사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녹화사업의 개인별 ‘심사(審査)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자료엔 대상자가 작성한 ‘자필 진술서’, ‘반성문’, ‘서약서’뿐만 아니라 보안사에서 작성한 ‘심사결과보고서’, 학원정보 수집에 협조한 경우는 ‘활용결과 보고서’까지 포함돼 있다. 심지어 ‘프락치’ 활동사항까지 일련의 과정이 기록돼 있다.

    이 의원은 “’존안자료’ 안에 김순호 국장이 학교 내 동향을 보고하거나 주변 인물과의 관계에 대해 진술한 내용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며 “‘존안자료’에 실제로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면 그가 제대 후 노동운동 등에 참여한 행적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은 “개인에 대한 사찰기록”이라며 정보공개법 규정에 따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은 김순호가 직접 밝혀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김순호는 “그런 프레임을 씌운 분들께서 그 프레임을 입증하고 설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며 책임을 돌리고 있다. 

    인노회의 간부였지만 사건이 커지기 직전 사라진 김순호. 경찰은 그를 찾지 않았고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경찰로 특채돼 승승장구했다. 과연 이것이 그가 이념적으로 동요하고 변심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영화 ‘무간도’나 ‘신세계’에나 나올 법한 오랫동안 묻어둔 프락치는 아니었을까. 풀리지 않은 의혹은 있지만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제 김순호 스스로 진실의 상자를 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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