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판사의 사죄 “국가를 대신해 제가 사과드립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드디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1980 사북>이다. 1980년 강원도 사북탄광에서 벌어진, 이른바 ‘사북항쟁’이 다큐로 만들어졌다. 당시 계엄군과 언론은 사북 광부 집단난동이라 불렀던 바로 그 사건이다. 한국에는 영화로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거나, 여전히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조차 만들어지지 못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꽤 있다. 문세광 저격 사건, 아웅 산 테러, KAL기 폭파 사건 등이 그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지는 것이 바로 이 사북사태이다. 아웅 산 테러 이슈는 배우 이정재가 직접 감독을 한 <헌트>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기적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나머지의 뼈아픈 역사는 여전히 영화적으로 정리 중이며 사북사태는 이번 <1980 사북>으로 마침내 대중적 정사(正史)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다. 사북 이슈는 이번 다큐가 물꼬를 텄으니 언젠가 극영화로도 만들어져 아픈 역사를 좀 더 치유할 것이다.
광부들 항의를 권력 찬탈극에 악용한 군부와 언론의 합작
당시의 이른바 사북사태는 사진 한 장이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태 당일 <신아일보>가 찍은 사진 한 장은 중앙 일간지들에게, 언론 용어로 ‘풀(pool)’이 됐다. <조선> <한국> <중앙일보>에 공유돼 대서특필됐다는 얘기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온 국민에게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 여인이 전봇대에 철삿줄로 묶여 있는 사진이다. 여인은 속옷을 미처 추스르지 못해서, 말 그대로 적나라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린치당하고 있었다. 신문을 본 사람들은 강원도 광부들이 폭도가 돼 난동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군중들에 의해 사람이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가상의 공포를 줬다. 당시의 계엄군 지휘부가 만들어 놓은 이 교묘한 언론 플레이(보도지침)는 사북사태를 이용해 권력 찬탈극을 완성시키려는, 전두환 군부가 환호할 만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됐다.
군부와 언론은 사건을 확대했다. 불법 체포와 감금, 온갖 고문(구타와 물고문)이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용공사건(고정간첩, 불순분자, 과학적 사회주의 건설, 남조선 민족해방 전선 등 자생 조직, 심지어 김대중이 배후라는 등등)으로 몰아갔다. 1980년 4월 23일에 벌어진 노사분쟁은 5월 8일 그렇게 ‘빨갱이 사건’으로 전환됐고, 열흘 후 광주로의 공수부대 투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사북’은 ‘광주’의 전초전이었으며 테스팅 모델이었다. 사북탄광에서 벌어진 고문 조작 사태는 안타깝게도 5.18이라는 거룩한 항쟁의 역사를 조명하느라 그간 뒷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직업 혁명가이기는커녕 어용 노조지부장에게 기만당한 광부들
사북 사건은 순전히 어용 노조 때문이었다. 당시 이재기 전국 광산노조 사북탄광 지부장은 회사(동원 탄좌=탄광)와 정부, 정보기관(동해물산=보안사의 위장회사) 등과 결탁해 임금 협상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루어냈다. 노조원들, 비노조 광부들 모두 이에 격분했고, 이재기를 찾아 노조 지부로 갔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단순하다면 단순했던 이 사건은 곧 사라진(도망친) 노조 지부장 이재기의 부인 김순이 씨에 대한 린치 여부로 일파만파 확대된다. 국가가 주도하는 인권유린이 시작됐다. 국가 폭력이 자행됐다. 27명이 끌려가 모질게 당했다.
소요와 투쟁은 늘 변화의 쌍곡선을 오간다. 경제적 소요가 먼저다. 살아가기에 너무 빠듯한 월급(1980년 기준 13만 6395원)은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의 소비자물가지수(CPI) 기준으로 2025년의 약 76만 원에 해당한다. 노동강도나 재해사망률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실태다. 여기에 축사보다 못한 사택 환경(여성 전용 목욕탕도 없었다) 등 광부들은 진정 인간 막장의 삶을 살았다. 오죽하면 당시의 광산을 막장이라 불렀겠는가. 경제적 불만이 억압되면 노동자들은 대개 경제투쟁을 벌인다. 임금 인상 협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정치투쟁으로 이어 가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정해진 순서일 수 있다. 하부 구조(노동 생산 현장)의 문제, 생산력의 문제는 종종 상부 구조(법과 시스템)와 생산 관계로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쟁의 광부들을 광주항쟁 배후로 만든 국가폭력과 언론
그런데 그 과정(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바꾸는 것)은 어찌 보면 직업적 혁명가들이 쓰는 ‘수법’일 수 있겠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불만’을 경제투쟁으로 불붙이고 이후 정치투쟁으로 전환시켜 권력의 틀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노동자들이 직업적 혁명가이기는커녕 그 같은 전략 전술을 잘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을 정치투쟁가로 만드는 것(몰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억압자, 가해자들이다. 사북의 광부들이 바로 그랬다.
단순히 임금 인상에 불만이 있었던 사람들을 11공수(부대)를 동원해 개 끌듯이 끌고 가 광주항쟁의 배후인 것처럼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받아쓰기’의 대명사인 언론은 왜곡 보도를 통해 혹세무민했으며 전두환에게 협조했다(이들의 핫뉴스는 고작 1980년 7월 서울에서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파시즘의 정치체제가 순진무구하고, 심지어 어리숙한 이들을 40년간 정치 투쟁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사북은 한국민에게 언제부턴가 정치 투쟁의 사건으로 전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0여 년간 비교적 철저하게 어둠 속에 묻힌 투쟁사였다. 문재인 정권 말기인 2022년 고문의 피해자였던 강윤호 옹(翁)은 한 판사로부터 ‘국가를 대신해 제가 먼저 사과 드린다’는 말과 함께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사북 사태의 정의는 윤석열의 등장과 함께 다시 파묻혔다. 이번 다큐의 노력은 다시 퇴행하고 있는 역사의 문턱에서 이를 회복하려는 한 화자(황인욱, 정선 지역사회연구소 소장)의 기획과 다큐멘터리스트 박봉남의 제작으로 빛을 발하게 됐다. 사북의 진실은 이제 40여 년 만에 가까스로 세상에 나오게 된 셈이다.
기억도 못하는 어두운 이야기가 흥미로울 수 있을까?
기억 속 빛이 희미하게 명멸하는 사건일수록 (50, 60대 상당수가 사북사태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그걸 새로 기록해 내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관건이 있다. 하나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사료, 푸티지(스틸 사진과 영상)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 돈의 문제다. 박봉남 등은 4억에 이르는(광고·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순제작비만 3억 6000만 원) 예산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 관련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하루빨리 증언 녹취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수의 관련 피해자들이 인터뷰 후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보관하고 있던 <신아일보>의 원판 사진들을 무더기로 찾아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런 다큐조차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라는 말은 분명 어폐가 있지만 후세대들이 이를 수용해 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흥미를 유발하게 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과거에 관심이 없으며 어두운 과거에는 더욱 흥미가 없거나 그들(686) 만의 리그라 치부하기 일쑤다. 그들은 더욱 더, ‘재미없는 과거’는 싫어하거나 혐오한다. 오죽하면 공중파에서 역사 프로를 제작하면서 연예인들을 출연시켜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라는 가벼운 아이템을 만들겠는가. 그런 면에서 이 영화 <1980 사북>은 젊은 세대가 가장 기피할 작품이며 ‘꼬꼬무’에도 편성되지 못하거나 선정적으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큰 이슈일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이 작품을 누가 볼 것인가의 문제는 관심거리 정도가 아니라 걱정거리라는 사람들까지 있다.
증인들이 까발리는 ‘치부’가 유발하는 흥미진진한 긴장감
그 점을 의식한 듯, 이번 다큐는 ‘적나라함’을 무기로 삼는다. ‘까발리는’ 수법은 진실을 드러내는 효과의 이면일 수 있다. 인터뷰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그간의 수치와 모욕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충격적이다. 사안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들의 ‘치부’를 영광의 상처로 만들어 주지 못한 우리 모두는 앞으로 꽤 오랜 시간 역사적 수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자각과 성찰을 갖게 된다.
<1980 사북>은 한편으로 사건의 본질, 전말에 접근하는 데 있어 꽤 흥미진진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왜 저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사람들은 저 때 저래야만 했을까. 그들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우리는 저 일을 왜 잊고 살았을까. 영화는 종종 파묻힌 사건을 세간에 꺼내 놓는, 고고학적 발굴이라는 위업을 수행한다. 이번 <1980 사북>을 끝내 완성해낸 황인욱(기획) 박봉남(감독, 제작) 엣나인(제작 배급)에 높은 평점을 드리는 바이다. 이 영화는 흥행의 성공이 목표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다들 잘 알 것이다. <1980 사북>은 10월 29일 전국 50여 개 극장에서만 개봉된다. 전국 스크린 수는 약 3200개이다. 의미 있는 영화는 늘상 발품을 팔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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