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팔레스타인 비극사 ③ |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아랍인들을 농락한 영국 : 후세인-맥마흔 협정, 사이크스-피코 협정
1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지배 아래 있었다. 아랍인들은 이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편에 가담하자, 아랍인들은 이를 호기로 생각하고 독립투쟁을 더욱 활발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던 아랍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안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며, 전쟁 승리 후 아랍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집트 주재 영국 고위 관리 맥마흔과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은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10차례에 걸친 서신을 교환하며 이런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를 세계사에서는 ‘후세인-맥마흔 협정’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약속한 대로 1916년 6월부터 독립투쟁을 벌였고,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한다. 아랍인들은 영국이 협정을 이행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애초에 영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승리 후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분할 지배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비밀리의 논의한다.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까지(후세인-맥마흔 서한이 오가던 시점) 진행된 협상 끝에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한다. 양국 협상 대표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 협정은 현재 시리아와 이라크의 국경선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영국이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차 대전 승리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이 합의대로 아랍지역을 나누어 지배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 : 밸푸어 선언
전쟁을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유대인 자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는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대인 국가 건설을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영국의 대부호였다. 이미 팔레스타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던 로스차일드는 이 편지에 호응하여 영국에 자금을 지원했고 그 결과 영국은 1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편지는 11월 9일 공개되었고, 아랍인들은 영국의 배신에 치를 떨어야 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이 편지에 환호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이주는 순조로웠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영국의 지원이 있었고,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인 부호들의 자금 지원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중동 전쟁은 종결된 것일까: 캠프데이비드 협정(1978년)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극적 화해가 이뤄졌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 대통령을 초청하여 13일 동안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집트는 네 차례의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주도했던 아랍의 대표적인 반이스라엘 국가였다. 따라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 체결은 중동 평화의 출발로 평가된다.
계속된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수에즈운하 수입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마저 여의치 않자, 사다트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여 경제난을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사다트는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유화적’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그 결과 1978년 평화협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중동 평화의 출발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협정에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사다트는 이집트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랍권 국가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집트는 아랍연맹 회원자격이 정지되었다. 협정을 체결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암살당했다.
평화적 해법의 출발이 되는가: 오슬로 협정 Ⅰ(1993)
1991년 11월 미국, 소련, 스페인이 주최하고,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가 초대받아 ‘마드리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중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담이었다. 비록 합의문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1990년대 평화 협상의 물꼬를 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중동 평화 협상은 1993년 오슬로 협정 체결로 빛을 보게 되었다. 오슬로 협정은 이집트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한 2개의 합의문을 일컫는다. 1993년 9월 워싱턴에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 아래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PLO 의장이 만나 합의서에 서명했다. 1993년 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측의 비밀 협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를 오슬로 협정 Ⅰ이라고 부른다.
오슬로 협정 Ⅰ의 원칙은 두 국가 해법이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철수하고, PLO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5년 안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동의했다. 쟁점이 되는 예루살렘, 최종 국경,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등은 5년 후에 논의하기로 했다. 평화적 해결의 원칙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 협정의 공식 명칭은 “원칙 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다.
1994년 5월 4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 대한 합의”를 체결하고,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 일정과 팔레스타인으로의 권한 이양 등을 합의했다. 몇 주 후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했고 PLO는 자치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을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기엔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졌다.
오슬로 협정 Ⅰ은 서안지구(West Bank) 대신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를 명시했다. 예리코는 서안지구 내의 도시이다. 흔히들 오슬로 협정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합의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일부에서만 팔레스타인 자치가 합의된 것이다.
또한 가자지구와 예리코 지역에서 이스라엘 군이 철수했지만, 이스라엘 정착촌은 그대로 존재했다. 정착촌 문제는 5년 후에 논의하기로 미뤘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착촌이 존재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보장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착촌 문제는 자치 정부수립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권 역시 5년 후로 미뤘다.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이 팔레스타인 거주민을 내쫓고, 그들의 귀환을 저지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늘려 종국에 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 지역에서 완전히 내쫓는 것이다. 따라서 정착촌과 귀환권 문제를 5년 뒤로 미룬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에 토대해서 마련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서안지구 분할은 누구에게 이익인가 : 오슬로 협정 Ⅱ(1995년)
1995년 9월 28일 오슬로 협정 Ⅱ가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 기구 구성, 이스라엘 군대의 재배치와 철수, 서안지구 분할, 팔레스타인 경찰, 적대행위 예방 등의 내용을 담았다. 공식 명칭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한 임시 협정”(Interim Agreement)이다.
오슬로 협정 Ⅱ의 가장 큰 특징은 서안지구를 A, B, C 구역으로 나눈 것이다. 서안 지구 18%에 해당하는 A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서안 지구의 22%를 차지하는 B 구역은 팔레스타인 당국과 이스라엘의 공동 관리 구역이며, 점진적으로 팔레스타인의 관리로 이양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서안 지구의 60%를 차지하는 C 구역은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관리한다.
그림에서 확인되듯이, 팔레스타인 당국의 권한이 미치는 A와 B 구역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오슬로 협정이 온전히 이행된다고 하더라도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갇혀 있는 셈이다(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불만을 품은 이스라엘 극우 시오니스트에 의해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1995년 11월 14일 암살당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절망시킨 7년의 ‘평화 협상’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 2000년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까지 7년 동안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1997년 양측은 헤브론 의정서를 합의했다. 서안지구 남쪽에 있는 헤브론에 400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정착촌이 있다. 문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800명의 이스라엘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 이스라엘군은 여러 형태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이 합의로 헤브론의 80%(H1)는 팔레스타인이, 20%(H2)는 이스라엘이 관리하게 되었다. 당시 H2에는 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다.
1999년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배치된 이스라엘군의 11%를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측이 요르단강 서안 영토의 40%를 완전 또는 부분 관할하며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 350명을 석방하고 ▲2000년 9월까지 팔레스타인 최종 지위 협상을 종결하는 내용을 합의한 “샤름 엘-셰이크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합의는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으로 이어졌고,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주 동안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 실패하고, 곧이어 등장한 이스라엘 강경파 샤론이 총리로 등장하면서 그 이후 협상은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의 7년은 ‘평화 협상’ 기간으로 불리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시간이었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7년 사이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수 배로 늘었고, 미국의 자본으로 50개가 넘는 이스라엘 군사기지가 건설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평화 협상’에 참여했던 PLO는 합법적인 협상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주장을 무조건 인정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을 묵인했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포기했다. 7년 동안 이스라엘 총리가 라빈, 페레스, 네타냐후, 바라크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정책은 일관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구조화되었다.
2000년 이스라엘 샤론이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여 동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 통치를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2차 인티파다의 시작이다. 2001년 총리가 된 샤론은 오슬로 협정 효력 상실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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