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당초 <통일뉴스> 2월 3일자 칼럼으로 쓰여졌지만 분량과 내용이 많아 요지는 칼럼으로 올린 뒤 전문을 다시 기고문 형식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
장대현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
불안은 미국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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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존 케리 미국 국무부장관이 동북아 순방에 나섰지만 뾰족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1차는 1주일, 2차는 2주일, 3차는 3주일, 4차는 4주일을 넘기고 있다.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말이다. 1,2,3차까지는 “별거 아니다” 서둘러 덮더니 이번에는 4주일이 넘도록 다른 뉴스로 넘어가질 못한다. 수구언론 말이다.
모두 왜 이럴까? 4차의 폭발력이 1차보다 4배 증가한,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100배에서 1000배, 아니 그 이상도 커질 수 있는 까닭이다. 수소폭탄이 아니라고? 미 의회조사국의 보고서(1월 7일), 케리 미 국무장관의 베이징 기자회견 발언(1월 28일), 미 정부관리를 인용한 CNN(1월 28일)보도 등 논쟁은 이미 종결됐다. 수구언론의 진심어린 걱정은 거기서 유래한다.
그들은 먼저 불안하다. <언제든지 우리를 일격에 절멸시킬 수 있는 절대무기를 가진 북한의 '결정적 한 방' 앞에 철저히 무력한 우리(조선일보 2016년 1월 8일)> <결국 북한 핵개발의 전략적 최종 목표는 SLBM에 소형화한 수폭을 장착해 1만 km 이상 날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는 것이다. 북한에 과연 그런 날이 올까? 20여 년간 우리는 이 질문을 하면서 매번 ‘그런 날’을 맞고 있다.(동아일보 2016년 1월 8일)>
불안은 미국에 대한 불신으로 확장된다. <미국은 북핵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손에 흙 묻히면서까지 나설 마음이 없다. 중국이 시늉만 한줄 알면서도 “북한을 손봐달라”고 칭얼대는 게 전부다.(중앙일보 2016년 1월 18일)> <미국은 한국을 '핵우산'으로 보호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 핵무기의 버튼이 미국의 손안에 있는 한...한국의 안전은 국지적이고 2차적일 수밖에 없다.(조선일보 2016년 1월 19일)>
수구언론이 미국에 대한 불신감을 이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며 공개적으로 표출한 적은 1945년 9월 미군정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북핵이 다소 불안해도 미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더 불안하다는 게 1,2,3차까지 수구언론의 자세였다면 이제 그것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이다. 그만큼 이른바 북핵 문제는 시급하고 심각하다. 답은 있을까?
북미 핵공방 3라운드, 그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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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자회담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를 위한 국제적 대화틀로 자리를 굳혔지만 북핵 문제 해결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사진은 2007년 2.13합의 직후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은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문제풀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서 어디서, 왜 틀렸는지 찾아내는 것이 오답을 정답으로 고치는 출발이다. 그럼 이른바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 25년 여 공방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확인할 것 한 가지. <그간 북·미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북핵 개발이 중단됐었다.(중앙일보 2016년 1월 8일)> 그렇다. 북핵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가 아니라 협상을 통해 정지 가능한 보통기관차였다.
북핵 공방을 간추리면 1) 북의 제1차 선비핵화 2) 북의 제2차 선비핵화 3) 북의 선비핵화 거부와 미국의 협상 거부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 즉, 북의 제1차 선비핵화는 1994년 1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무려 8년 동안 지속된다. 북이 흑연감속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1992년 이전에 추출한 핵물질(과거 핵)과 1994년에 인출한 폐연료봉(현재 핵) 등 핵시설과 물질을 동결,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2,000MW의 경수로, 연간 50만 톤의 중유, 정치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제공하기로 한 제네바합의(1994년 10월)에 따라 북은 1994년 11월 핵 활동 동결을 선언하고 이어 NPT에 복귀한다. 완벽한 선비핵화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경수로는 무소식(2000년 2월 착공)이었고, 관계정상화 협상은 거부되었다.
1998년 8월 북이 인공위성을 발사, 미국을 다시 협상장으로 이끌어내면서 2000년 10월 북미공동코뮈니케가 합의된다. 북이 제네바합의를 준수(즉, 북의 선비핵화)하고 또한 미사일 발사를 유예하는 대가로 미국은 경수로 약속을 이행하고 적대관계 종식과 평화보장체계 등 관계정상화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미사일 발사 유예가 추가된 제2의 제네바합의다.
이렇게 해서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가 종료될 때까지 선비핵화를 유지하는 외교적 성과를 챙긴다. 그렇다면 북은 무엇을 얻었나? 클린턴의 뒤를 이은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초 “이라크와 이란과 북은 악의 축이다” 즉, 북을 선제공격 대상으로 지목한다. ‘선비핵화’ 했더니 ‘후전쟁위협’인 거다.
<켈리 특사 일행은...10월 2일 서울에 왔다...그는(켈리)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으며, 이를 폐기하라고 통보하기 위해 평양에 간다...‘협상’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통보’하러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드디어 판을 깨려 하는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피스메이커. 임동원 지음. 511-513쪽)>
그랬다. 2002년 10월 3일 평양을 방문한 미 국무부 켈리 대북특사 일행은 북을 자극하여 “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만들 수 있다”는 발언을 듣는데 성공(?)한다. “합의를 먼저 위반한 것은 북”이라며 미국은 중유공급을 중단하고 제네바합의를 파기한다.
이에 북은 2002년 12월 핵시설 봉인을 풀고 감시 카메라를 제거하는 등 핵 활동 재개에 돌입하고 2003년 1월 NPT를 또다시 탈퇴한다. 그로부터 2년을 질주한 북은 결국 2005년 2월 핵무기보유를 선언한다. 이 동력에 이끌린 북미의 새로운 합의가 바로 2005년 9월의 6자회담 9.19공동성명이다.
6자회담 참가국이 모두 같이 약속하는 형식의 이 합의에서 북과 미국은 각자의 핵심 요구사항을 1조와 2조로 나누어 배열한다. 1조 <한반도의 검증 가능한 비핵화>의 “북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한다” 2조 <관계 정상화>의 “북과 미국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가 바로 그것이다. 3조는 <경제협력과 에너지 지원>이다.
여기까지는 제네바 합의와 대동소이하다. “두 번 속으면 내 잘못”이라는 말을 떠올렸을까? 북은 안전장치가 필요했을 게다. 9.19공동성명은 4조에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한다”는 것, 5조에서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합의사항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한다”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안전장치는 세 가지다. 첫째 6자회담 참가국이 6자회담의 목표로 합의한 것은 “북의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점이다. “북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비핵화”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고 하듯 북도 “미국의 핵을 다리에 묶고 살 수는 없다”는 거다. 한반도 남쪽의 핵은 1990년대 초반에 모두 철수했다? 미국의 핵항공모함, 핵잠수함, 핵폭격기 등이 무시로 드나들며 수시로 전쟁연습을 하는데도?
둘째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 협상을 한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직접 관련 당사국이란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남, 북, 미국, 중국 등을 말한다. 이 4자가 한국전쟁의 종식을 선언해야 북미 간 적대관계 청산이 시작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도 가능해진다. 셋째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즉 ‘먹튀’는 안 된다는 거다.
‘말 대 말’의 차원에서 9.19공동성명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자, 그럼 ‘행동 대 행동’을 보자. 9월 20일 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 예금계좌를 동결한다. <“한 손으로 악수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형국”을 연출해놓고도 BDA제재와 6자회담은 별개의 건이라고 주장하는 미국도 참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칼날 위의 평화. 이종석 지음. 344쪽) <북한 계좌 2.200-2.500만 달러를 2005년 9월 동결한 것은 북한 경제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유일한 효과는 후속협상을 18개월 동안 궤도 이탈 시켰다는 점이다.(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313쪽)> 이로써 북의 핵 활동 제동장치 해제 기간은 하염없이 늘어났고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이 터진다.
협상욕구에 다시 불이 붙은 미국은 한사코 거부하던 북미 양자협상에 응하는 등 적극성을 발휘했으며 그 결과 2007년 2월 2.13합의가 나온다.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라는 이름의 그 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상호 병렬적으로 취한다”고 명시한다.
북은 “재처리시설을 포함, 영변의 핵시설을 폐쇄, 봉인하고 IAEA 사찰단의 복귀를 초청”하며, 미국은 “북과의 전면적인 외교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협상에 나서고, 북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과정을 개시하며, 북에 대한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하기 위한 과정을 진전시켜 나가”고, 참가국들은 “한반도 비핵화, 북미 관계정상화, 북일 관계정상화, 경제 및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 등 다섯 개의 실무그룹을 설치”하고, 참가국들은 또한 “중유 5만 톤 상당의 긴급 에너지 지원을”한다는 등이다.
6월 25일 미국이 BDA 북 동결 자금을 풀고, 7월 15일 중유 5만 톤이 도착하자 북은 그 날부터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한다. 이는 그 해 10월 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 즉, 10.3합의로 이어진다.
간추리면 이렇다. 1조(한반도 비핵화)는 “북은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핵프로그램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한다”. 2조(관련국간 관계정상화)는 “미국은 북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기 위한 과정을 개시하고, 대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시키기 위한 과정을 진전시키며 북미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 기초하여 북의 조치들과 병렬적으로 북에 대한 공약을 완수할 것이다”. 3조(경제 에너지 지원)는 “중유 100만 톤 상당을 제공하며, 구체적인 것은 실무그룹 논의에서 결정한다" 등이다. 이것이 ‘말 대 말’이다.
그럼 ‘행동 대 행동’은? <싱가포르에서 회동한 결과 성김과 헤이늘의 북한 방문이 허용되었다...두 사람은...1만 8천 쪽 짜리 자료를 가지고 왔다. 영변 시설 가동에 대한 자료인데 198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대한 양이었다...우라늄 흔적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며 일축됐다.(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362-363쪽)> 2008년 5월 8일의 일이다.
이어서 북은 6월 26일 핵 시설과 물질에 대한 신고서를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한다. 그리고 <6월 27일...북한은 영변의 냉각탑을 폭파함으로써 선언 내용을 이행했다...CNN을 포함한 전세계 텔레비전 카메라가 이 역사적인 현장을 기록했다. 부시 대통령은 오벌 오피스에서 현장을 지켜보면서 참모들에게 이렇게 얘기 했다. “저것이야말로 검증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네요.”(같은 책 367쪽)>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이 증언하는 것처럼 북은 9.19공동성명 2단계 조치 즉, 핵 시설 불능화, 핵 프로그램 신고를 모두 이행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2단계 조치가 부여한 의무사항 즉, 테러지원국 해제, 적성국 교역법 적용대상 삭제, 중유 95만 톤 제공, 북미관계정상화 실무그룹 논의 진전 등을 이행했나?
아직 한 게 없다. 그렇다. 동시행동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1단계에서 핵 활동을 동결하고 2단계에서 핵 시설을 불능화하는 등 9.19공동성명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과정은 명백한 북의 선비핵화였다. 또 다시 어음을 끊어주고 현찰을 받은 미국, 이번에는 제대로 결재를 할까?
영변 냉각탑을 폭파한 지 두 달 후인 8월 26일 북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불이행은 10.3 합의 위반이므로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한다”. 9월 19일에는 “영변 핵시설 원상복구 중” 등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미국은 10월 12일 마침내 북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11월 4일 대선 이후 미국은 새로운 조건을 들고 나왔다. 2008년 12월 12일 조선일보 기사다. <부시(Bush) 행정부에서의 마지막 북핵 6자회담은 끝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지난 3년 반 동안 미국의 협상을 이끌었던 크리스토퍼 힐(Hill) 국무부 차관보의 ‘북핵 외교 실험’이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핵심 쟁점인 검증의정서 부분에서 북한이 전날의 완강한 입장을 바꾸지 않아 실질적인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힐 차관보는 의장성명이 나오기도 전에 회담장을 떠났다.> 핵심쟁점은 북의 핵신고서에 대한 검증의정서 채택이며, 여기서 북이 타협을 거부해 6자회담이 결렬되었다는 논리다. 정말일까?
답안지는 2008년 7월 12일의 <제6차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 언론 발표문>이다. 동 합의문서는 서문에서 “참가국들은 제2단계 조치의 전면적, 균형적 이행에 대해 중요한 합의를 이루었다”면서 1조 <검증체제>에서 “검증조치는 시설 방문, 문서 검토, 기술인력 인터뷰 및 6자가 만장일치로 합의한 기타조치를 포함한다”. 2조 <감시체제>에서 “감시체제의 임무는 비확산 및 북에 대한 경제, 에너지 지원을 포함한 각자의 공약을 이행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다”. 3조 <시간계획>에서 “모든 참가국들은 2008년 10월말까지 중유 및 비중유 지원을 완료한다”. 6조 <제3단계 조치>에서 “6자회담을 계속 진전시켜 나가고, 동북아시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노력하기로 한다” 등으로 구성된다.
미국이 주장하는 “북의 핵신고서에 대한 검증의정서 채택”은 제1조의 검증조치에는 없는 것이므로 “6자가 만장일치로 합의”해야만 핵심쟁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북은 그것이 2단계 조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확인했다. 복잡하고 지루하더라도 조금 더 보자.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베이징 회담이 끝나고 지난 13일 “북핵 검증 체제가 없으면 앞으로 대북 에너지 지원을 위한 중유선적은 더 진전되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을 제외하고 6자회담에 참가하고 있는 나머지 5개국이 대북중유제공 중단을 양해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날 러시아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알렉세이 보로다브킨 외무차관은 "러시아는 6자 비핵화 합의에 따라 북한에 대한 연료 공급을 계속할 것"이라면서 "러시아는 결코 대북 중유제공 중단에 동의한 적이 없다"라고 반박했다... 16일에는 중국이 러시아를 거들고 나서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번 수석대표 회담에서 채택된 의장성명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면서 “성명에는 참가국들이 이번 회담에서 10.3 합의에 기술된 대로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와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에너지 제공을 병렬적으로 이행하기로 합의했다는 점이 분명하게 제시돼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중유 지원은 핵시설 불능화의 대가로 북한에 제공하는 것으로 검증의정서 채택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러시아 측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다.(연합뉴스. 2008년 12월 18일)>
미국이 검증의정서를 들고 나온 것은 명백한 돌출행동, 합의위반, 9.19공동성명 파괴행위였던 거다. 왜 그랬을까? 부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클린턴 대통령 말기의 대북외교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보면 앞뒤가 맞기도 하다. 정말 그럴까? 여기 힌트가 하나 있다.
<성김과 헤이늘은 검증프로토콜을 마련하려고 북측과 진지한 협의를 지속했다. 북한 측 인사 중 한 명은...우리가 뭔가에 합의하고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도록...프로세스 진행을 약속했다. 만약 우리가 북한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 이 같은 협의를 해왔다면, 아마도 작업을 수행하기위해 수용할 만한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협의에서 그것은 내가 워싱턴에 돌아가 누구를 납득시킬만한 제안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즉시 거부했다.(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368쪽)>
암호전문 같은 이 조심스런 외교관의 글에서 핵심은 “북한이 아니라 다른 나라였다면 수용할만한 것이었는데 북한이어서 거부했다”는 문장이다. 즉,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기 때문에 안되는 게 아니라 북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다. 맞다. 임기가 끝나서 못하는 것이라면 임기가 넉넉한 다음 대통령은 협상에 나서는 게 당연하다.
<9일 시작되는 키 리졸브(KEY RESOLVE) 및 독수리 연습은...이지스함은 종전의 5척 안팎보다 2척 가량이 많은 7척 안팎인 것으로 알려져...이번 연습 기간이 예년에 비해 2배가량 늘었는데...(2009년 3월 9일. 조선일보)>
<AP통신에 따르면 클린턴 (국무)장관은 자카르타발 서울행 비행기 기내에서...오바마 행정부가...“평양에서 독재체제가 변화할 가능성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2009년 2월 20일. 연합뉴스)>
<클린턴 장관은...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의 회동에서...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하고,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북미관계 정상화도 요원하다...(2009년 3월 4일. 중앙시사매거진 뉴스위크)>
핵 활동을 동결한 채 북미관계 정상화, 4자 종전선언,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등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북에게 미국은 그 반대의 것을 안겨줬다. 4월 5일의 북 인공위성 발사와 5월 25일의 2차 핵실험이 “너무 빨랐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북의 입장에서는 오바마 대통령 취임(2009년 1월 20일)까지 핵 동결 18개월을 ‘참은’ 거고, 인공위성 발사까지 21개월을 ‘기다린’ 거다.
자, 이제 지루한 독자들을 위하여 속히 결론으로 가보자. 1998년 8월 1차 인공위성 발사, 2005년 2월의 핵 보유 선언,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등 북의 강력한 군사력 시위는 어김없이 미국의 협상동기를 자극하였다. 따라서 북의 2차 핵실험 역시 미국을 협상으로 끌어낼 것이다? 하여 중단된 6자회담이 다시 열릴 것이다?
일단 대화가 시작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 들어 첫 북-미 대화에 나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2월) 6일 한국을 거쳐 8일 방북한다...이번 보즈워스 대표의 방북이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및 북핵 협상의 재개 여부를 결정짓는 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2009년 12월 4일. 동아일보)>
협상을 재개하려면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진짜로 동시 논의하자는 북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교토통신에 따르면 북한은 보즈워스 특사에게 영구적인 평화협정 체결이 우선순위이고 북미관계 정상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반면에 그동안 장기간 교착상태에 빠진 6자회담이 재개되면, 4자(미.중.남북)간 한반도 평화포럼을 개최하여 9.19 합의에 따라 한반도 평화조약(peace treaty) 체결을 논의할 것으로 보도했다.(2010년 1월 28일 통일뉴스)>
더 이상 선비핵화가 먹히지 않고, 더 이상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미국은 단호히 협상을 거부한다. <당시 회담에서 보즈워스 특사는...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9·19공동성명 이행 등을 촉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및 북미관계 정상화 논의의 선행을 주장해 대화가 난항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국이 이른바 ‘전략적 인내’를 내세워 대북 접근에 주의를 기울였고...( 2013년 6월 16일. 연합뉴스)>
이로써 북핵 공방 제3시기, 즉 “북의 선비핵화 거부와 미국의 협상 거부”시기가 도래한 거다. 클린턴의 미국이나 부시의 미국에게 북핵 저지가 국익이듯 오바마에게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그가 임기 중 북의 수소폭탄 실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가 그것보다 더욱 두렵기 때문이다.
그게 왜 그토록 두려운 걸까? 간단한 사례 하나. 평화체제를 수립하려면 먼저 종전선언을 해야 한다. 종전선언을 하면 휴전협정 당사자 중 하나인 유엔군사령부는 해체된다. 그러면 미국이 유엔군사령부의 모자를 쓰고 한국에 미치는 군사적 기득권의 상당부분이 재설정되어야 한다. 또한 유엔사후방기지라는 명목으로 미국이 거느린 일본의 미군기지(본토4개, 오키나와 3개)도 존립근거를 잃게 된다. 한국에 대한 기득권 약화는 물론 동북아 패권유지를 위한 전략적 이익이 흔들리는 거다.
답은 아주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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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9.19공동성명 채택 당시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은 최근 자서전을 통해 북핵 협상의 일단을 밝혔다. 사진은 9.19공동성명이 채택된 제 4차 2단계 6자회담 당시 숙소에서 기자들을 만나고 있는 힐 수석.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북의 수소폭탄 실험 직후 미국 국무장관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중국 외교부장에게 전화를 건 다음 기자회견을 자청 “중국의 대북 정책이 성공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미국이 시험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답을 쓰기 싫기 때문에 “내 시험지가 아니다”버티는 거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2009년 1월) 13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적대관계를 그대로 두고 핵문제를 풀려면 모든 핵보유국들이 모여 앉아 동시에 핵군축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며 북미 간 관계정상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주목된다.(2009년 1월 13일. 통일뉴스)>
조엘 위트는 말한다. “2020년이 되면 북은 최대 100개의 핵무기를 갖게 된다”. 북도 말한다. “핵억제력의 규격화, 표준화 단계에 들어갔다” 전략적 인내가 전략적 혼수상태라면 누군가 흔들어 깨워야 한다. 누가 할 것인가?
<나는 두 사람(라이스 부시 2기 국무장관 내정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에게 말했다. “우리가 협상에 주저하는 자세를 한국 등에 보인 점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북한과 기꺼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북한과의 관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좀더 중요하게는 한국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크리스토퍼 힐 회고록. 258쪽)>
<이제부터라도 외교다운 진짜 외교를 해야 한다. 그것은 북한 붕괴론의 환상에서 깨어나 북한의 구미를 당길 만한 카드를 갖고 평양과 워싱턴이 대타협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과 북·미 관계 정상화를 북한의 핵 포기와 맞바꾸는 ‘그랜드 바겐’을 추구하되 일단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고 협상을 하는 동안에는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2016년 1월 26일. 중앙일보)> 답은 아주 가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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