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죄 받기 전에 절대 못죽는다"

북녘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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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2.09  18: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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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전후 보상 국제공청회. 여기서 남측 김학순 할머니(오른쪽)와 북측 김영실 할머니(왼쪽)가 만났다. 두 할머니는 같은 위안소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김학순 할머니는 김영실 할머니를 만나 "위안소에 같이 있었잖아"라고 말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나는 똑똑한 사죄를 받아내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
북녘에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인 장수월 할머니의 절규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 타결(12.28합의)을 선언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독 사과와 법적 배상이 아닌 10억 엔의 위로금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합의한 한국 정부에 대한 규탄 목소리가 크다.
일본군'위안부' 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전 지역에서 자행됐다.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여성들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당시 네덜란드령이던 인도네시아에 거주한 네덜란드 여성들도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피해 당사국들은 '12.28합의'에 주목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국들은 피해자들을 접촉하면서 '12.28합의'의 맹점을 파고들며, 오히려 '12.28합의'와 다른 형태의 문제해결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2.28합의'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남한 외 다른 피해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억하지만 북녘에도 피해자들이 있다는 점은 놓치는 경향이 있다. 분단 이전 하나의 땅이었던 한반도는 남북을 가르지 않고 해결하지 못한 일제의 전쟁범죄의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북녘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은 얼마나 있으며, 그들의 사연은 어떠한가. 1990년대 초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인 관심으로 떠오르면서 북녘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단체는 '조선일본군성노예및강제연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조대위)이다. 최근까지 홍선옥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이 위원장을 맡았으나 현재 위원장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2000년 당시 북한 조대위 조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18명이다. 이 중 43명이 공개증언을 했으며, 나머지는 가족 등의 반대로 공개증언을 하지 않았다.
이들 중 15.5%가 12~15살, 42.2%는 16~19살에 끌려갔으며, 7명은 기혼자였다. 피해자의 44%가 고향에서 강제 소집되거나 여행 중 끌려갔으며, 34%는 취업사기에 속았다. 그리고 하루 평균 20~25명, 일요일에는 40명 이상의 일본군을 상대하도록 강요받았다.
하지만 해당 조사는 2000년에 발표된 기본 내용으로, 2016년 현재 생존자 숫자 등 최신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남북 민간단체가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해왔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간 교류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의 패망 이후 귀국했지만, 분단선에 가로막혀 고향을 가지 못한 사례도 많아 남북의 피해자들 중 국가에 의한 강제적 이산가족상황에 놓여있다. 대부분의 이산가족들은 자발적 월남, 월북이었던 반면,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돌아왔지만 체제가 그은 분단으로 이산을 강요받은 셈이다.
  
▲ 2004년 5월 서울대회에서 남측 김윤심(왼쪽에서 두 번째) 할머니와 북측 리상옥 할머니가 기쁨의 포옹을 하고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북녘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은 모든 일본군'위안부' 피해사례와 다르지 않다. 자발적으로 갔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과 달리 이들은 모두 취업사기에 속거나 길에서, 집에서 강제로 끌려갔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북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조대위'가 발간한 증언집을 통해 일부 소개한다.
김영실 할머니는 1924년 10월 양강도 보천군에서 태어났다. 13살 되던 해에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회령 삼촌댁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삼촌은 사망해 남의집 심부름을 하거나 구걸로 생활을 해야했다.
18살이 되던 해 한 일본인이 일자리를 구해주겠다며 데려갔다. 취업사기 피해자다. 회령철도역에서 출발해 함경북도 경흥군에 내렸다. 화물차를 타고 깊은 산골로 가더니 '김영실'이 아닌 '에이꼬'로 생활해야 했다. 첫날 강간을 당하고 다음 날부터 하루 20~3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홍의라고 하는 마을에 주둔한 일본군을 위해 이동봉사를 강요받았고, 조선말을 하던 한 친구는 그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패색이 짙던 일본군이 떠나자 도망쳐 나왔다. 
"가슴 속의 원한을 다 토로할 수 있도록 세계의 양심있는 모든 분들이 힘을 줄 것을 호소한다"던 할머니는 1992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국제공청회에서 같은 위안소에 있던 것으로 알려진 김학순 할머니와 만났다.
곽금녀 할머니는 1923년 1월 충남 천안 백이리 출신이다. 14살에 전남 순천을 거쳐 광주제사공장에서 일했다. 1939년 10월경 공장 감독은 몇몇 여공을 불러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 할머니도 포함됐다.
서울역에서 영등포방직공장 여공들과 합류한 할머니는 중국 목단강을 지나 소만국경지대인 군영으로 끌려갔다. 1년 반 동안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은 할머니는 도망쳐 나와 전기기술자인 남편을 만났다. 하지만 남편이 징용을 끌려가고 남편을 찾아나선 할머니는 평안북도 선천에 머물렀다. 분단으로 고향을 밟지 못했다.
심청옥 할머니. 1919년 2월 전북 진안군 평지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943년 9월경 전라북도 전주도립병원에서 간병인으로 일했다. 24살에 할머니는 중국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소만국경지역에 도착한 할머니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점심, 저녁 식사시간을 빼고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다.
리복녀 할머니는 1919년 경기도 수원면 북수리(당시)에서 태어났다. 23살에 중국 목단강에서 일을 하던 중 끌려가 '하루코'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울면서 아우성치면 일본군은 "여기서는 황군의 요구에만 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목을 쳐죽인다"고 말했다.
1926년 6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박복이 할머니는 17살 되던 해 진주시 문산개화동 구장이 일본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대만으로 끌려갔다. '기꾸사이로' 항공군병영에서 하루평균 5~6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했다. 
해방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군숙 할머니는 1938년 9월경 친구들과 시내 공원에 놀러갔다가 일본군에 납치됐다. 중국 심양에 끌려간 할머니는 2명의 학교 친구들이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북녘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한다. 리계월 할머니는 "이 원한을 풀지 않고서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일본정부는 과거범죄에 대하여 조선인민 앞에 성실히 사죄하고 응당한 피해보상을 해야한다"고 일갈했다.
조삼순 할머니도 "그 어떤 천만금의 보상 이 이루어진다한들, 수백수천의 일본놈들을 내 눈앞에서 쳐죽인다한들 하늘에 사무친 조선여성들의 피맺힌 원한을 풀 수 있겠는가. 세월은 흘렀어도 역사는 수치스러운 과거범죄를 파묻어버리려는 일본당국의 책동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이번 '12.28합의'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조대위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국제연대를 강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춘실 조대위 위원은 최근 재일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이번 합의에 대처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고 과거 역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업에서 많은 인민들이 주인으로 되여 투쟁을 벌릴 수 있도록 방안을 확고히 세워나갈 예정"이라며 "세계 각국의 단체들과 연계를 가져 연대활동도 적극 벌려나가겠다"고 말했다. 
'12.28합의'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남북 연대로 나아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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