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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협한 권력의 폭주와 그 종결, 그리고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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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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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5.04.0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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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부터 4월 4일까지의 기록

12월 3일, 총을 든 군인이 국회에 나타났던 그 날 밤부터, 4월 4일 윤석열의 대통령이란 지위가 사라지기까지, 4개월 동안 응원봉은 꺼지지 않았다. 

탄핵소추안이 여당의 훼방으로 가결되지 못할 때, 윤석열 체포를 촉구하던 전봉준 투쟁단과 길을 열어내던 민주노총이 경찰에 의해 탄압받을 때면 어김없이 응원봉이 나타났다. 

윤석열 파면은 예고된 일이었다. 조금의 강성 지지층만을 바라보며, 헌정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사건의 특검을 거부하며 덮으려 했다. 한 군인의 죽음의 진실을 은폐했고, 나라 밖에서는 굴욕 외교를 일삼았다. 

12월 3일, 불법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하고 있다.
12월 3일, 불법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국회로 진입하고 있다. ⓒ 김준 기자

불법 비상계엄, 저항의 시작

다 나열하기도 어렵지만, 그 쐐기를 박은 날은 12월 3일이었다. 윤석열은 부정 선거 음모론을 맹신하며, 민주적 절차로 당선된 야당의 입법을 ‘폭거’로 규정했다. 이게 비상계엄의 이유였다. 

이때부터 시민의 저항이 시작됐다. 그 늦은 시간에 시민들은 국회로 달려왔다. 몸으로 장갑차를 막았고 담을 넘는 군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의원들이 국회로 들어갈 시간을 벌어줬다. 그 덕에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은, 대한민국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실패 친위 쿠데타로 기록됐다.

그 주 토요일인 7일 야당은 윤석열 탄핵소추안 표결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내란에 동조하듯,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투표해달라” 호소했으나, 국민의힘의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의원 외엔 모두 퇴장했다. 결국 195표로 투표 불성립, 탄핵안은 자동 폐기됐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뉴시스

14일,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여의도로 결집했다. 탄핵소추안 가결을 촉구하는 200만의 응원봉이 국회 앞에서 여의도 광장까지 밝게 비추고 있었다. 여당은 민주주의 꽃이라는 투표를 거부했다는 것에 거센 비판을 받았다. 지도부는 부결을 당론으로 정하며 투표에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는 가결 204표, 불법 계엄 열흘 만에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됐다. 시민들은 그 열흘 만에, 총은 든 군인과 군용 헬기가 활보하던 곳을 아이돌 가수의 음악이 나오는, 산타와 응원봉이 찬란한 곳으로 만들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 등을 촉구'하는 트랙터 대행진이 1박2일째 이어진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에서 집회 참가자가 시위를 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 등을 촉구'하는 트랙터 대행진이 1박2일째 이어진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에서 집회 참가자가 시위를 하고 있다. ⓒ 뉴시스

"응원봉과 함께라면 승리한다"

응원봉의 역할이 끝난 게 아니었다. 윤석열을 내란죄로 구속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이에 전봉준 투쟁단과 민주노총이 앞장섰다. 투쟁단은 트랙터 상경 투쟁을 전개하며 윤석열 관저로 향했다. 그러나 경찰은 평화롭게 이어지던 행진을 막아섰다. 갑자기 차벽을 세워 트랙터를 막고 농민들을 연행했다. 이들이 남태령에 이르렀을 때였다.

같은 날, 광화문에 집회에서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몰려들었다. 영하 12도의 날씨에, 차도 끊겼지만, 이들은 경찰을 향해 연신 “차 빼라”를 외쳤다. 새벽이 깊어지자, 외부에서 지원 물품이 쏟아졌다. 핫팩, 담요, 장갑, 보조배터리, 음료와 간식까지, 몸은 함께하지 못했으나, 마음만은 함께 있던 시민들이 보낸 응원이었다.

20여 시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마침내 경찰을 차를 빼며 길을 텄다. 농민과 응원봉이 만나 이룬 쾌거였다. 시민들은 관저 한남동까지 이들과 함께하며, 한강진역에서 평화롭게 집회를 마무리 지었다.

4일 윤석열 관저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윤석열 즉각 체포, 긴급행동'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한남동으로 합류하는 시민들 ⓒ 김준 기자
4일 윤석열 관저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윤석열 즉각 체포, 긴급행동'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한남동으로 합류하는 시민들 ⓒ 김준 기자

12월 31일, 윤석열 체포영장이 발부됐으나 고위공직자수사처와 대통령 경호처의 대립으로 윤석열 체포에 실패했다. 민주노총은 “직접 끌어내리겠다”며 관저로 향했다. 그 과정에 조합원 두 명이 체포됐다. 역시 이 소식을 들은 응원봉이 다시 한남동으로 모였다. 이들은 체포된 조합원 석방과 윤석열 체포를 연신 외치며 민주노총에 힘을 보탰다. 

1박 2일로 예정됐던 민주노총의 체포 농성은 3박 4일까지 이어지며 한남동 대첩이라는 역사를 써냈다. 진보당 의원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서 풍찬노숙했다. 그 결과 1월 15일, 두 번의 영장 집행 시도 끝에 마침내 윤석열은 체포돼 서울 구치소에 수용된다.

내란동조세력, 어디까지인가

이토록 어렵게 윤석열이 체포를 끌어냈으나 3월 7일, 서울지방법원은 돌연 윤석열 구속취소 청구를 인용한다. 여태 날로 계산하던 체포 적부심 기간을 갑자기 시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꾼 거다. 지금까지 구속 수사를 모두 위법으로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을 내렸다.

이에 검찰이 항고할 거라 기대한 시민들은 또 한 번 실망하게 된다. 검찰은 항고를 포기하면서 내란공범임을 자인한 셈이 됐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비상행동주간을 선포하며 매일 집회를 이어갔다. 

20250327-윤석열 즉각 파면 민주주의 수호 전국 시민총파업 ⓒ 민주노총
20250327-윤석열 즉각 파면 민주주의 수호 전국 시민총파업 ⓒ 민주노총

공동의장단과 야당 국회의원들은 단식으로 맞섰고, 시민들도 릴레이 단식과 서명으로 윤석열 파면과 재구속을 촉구했다. 매일 열린 집회에는 다양한 시민들이 참석했고,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시민들까지 합세했다. 총파업이 시민의 저항으로 확산한 순간이었다.

4개월 투쟁의 끝, 그리고 시작

이런 시민의 목소리가 마침내 헌법재판소에 닿았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심판이 4일로 정해졌고, 응원봉은 헌재 앞에서 72시간 꺼지지 않고 밤하늘을 밝게 비췄다.

4일 마침내 윤석열 파면 선고가 내려지던 순간, 안국역 앞에 모여있던 집회 참석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 김준 기자
4일 마침내 윤석열 파면 선고가 내려지던 순간, 안국역 앞에 모여있던 집회 참석자들이 기뻐하고 있다. ⓒ 김준 기자

마침내 윤석열 파면이 선고되는 순간, 응원봉으로 인해 민주주의는 되살아났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전복당할 뻔한 위기에서, 그 위기를 초래한 윤석열의 파면까지 응원봉은 어두운 대한민국을 밝히며 길을 만들어왔다.

무엇보다 어떤 위기에도 길을 다시 비출 응원봉이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잠깐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우리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란에 동조한 국민의힘, 검찰이 아직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파면당한 윤석열 또한 재구속해야 한다. 

윤석열 파면은 끝이 아니라, 기록된 시작이다. 그날 시민이 지킨 민주주의는, 다시 어떤 위기가 와도 길을 만들어낼 것이다. 

3일 안국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파면, 민주노총 72시간 비상행동, 노동자·시민 한마당 집회’ ⓒ 김준 기자
3일 안국역 앞에서 열린 ‘윤석열 즉각 파면, 민주노총 72시간 비상행동, 노동자·시민 한마당 집회’ ⓒ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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