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식 칼럼] 윤석열 이후의 한반도, 어떻게 ‘리셋’할 것인가?
수정 2025-04-07 07:50등록 2025-04-07 07:35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장고 끝에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로써 4개월 동안 지속되어온 계엄·내란·탄핵 사태는 종지부를 찍었고, 60일 안에 우리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된다. 새 정부가 국민과 함께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안팎에서 높아지고 있는 지정학적 파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있다. 특히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도전은 민주주의·민생·경제·기후변화 등 여러 위기와 고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명한 대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우선적인 관심사는 6년 가까이 단절된 북미대화 재개 여부 및 그 시점에 있다. 이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31일(현지시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김정은 위원장을 가리켜 “나는 그와 아주 좋은 관계이고 아마도 우리는 어느 시점에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대선 후보 때부터 트럼프가 일관되게 발신해온 메시지이다. 그의 진정성을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대권의 꿈을 본격화한 1999년부터 조선과의 문제를 풀겠다고 밝혀온 그의 의지를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또 김정은의 호응 여부도 예단할 수는 없지만, 그가 트럼프와의 재회를 십분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한국과 같은 동맹국은 ‘하급자’로 대하려고 하고 조선과 같은 적대국은 ‘동급자’로 대하려는 트럼프 2.0 시대의 한국 외교가 어느 때보다 도전에 직면한 까닭이다.
아마도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종결되면 본격적으로 조선에 손짓을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선 북·미·러 사이의 삼각관계가 흥미롭게 전개될 수 있다. 트럼프가 다시, 그리고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외국 지도자가 김정은이다. 김정은이 가장 친한 외국 지도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 또 러-우 전쟁이 끝나는 즈음에 트럼프와 푸틴이 만날 것이다. 트럼프의 요청에 따라, 혹은 푸틴의 셈법에 따라 푸틴이 북미정상회담을 중재하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적으로도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트럼프는 3월 13일에 세계 3대 핵보유국들인 미국·러시아·중국의 핵군축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 등과 더불어 “김정은도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그들도 (논의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일 후에는 트럼프와 푸틴이 두 시간 동안 전화통화를 가졌는데, 백악관은 “전략무기의 확산을 중단시킬 필요성을 논의했으며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이를 적용시키기 위해 다른 국가와 협력키로 했다”고 밝혔다. 맥락상 조선도 거론되었다는 뜻이다. 이틀 후에는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안보위원회 서기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 미러 접촉의 세부 사항과 푸틴의 친서를 전달했다. 주목할 점은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조선 러시아 대사가 “조선이 미러 접촉 재개를 크게 반겼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러-우 전쟁이 종결되면 북러 관계가 이완되고 이를 우려한 조선이 미러 접촉을 반기지 않을 것이라는 일각의 진단을 무색케 한다. 북러가 김정은의 방러 준비에 착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양국 관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북러 관계는 ‘전략 동맹’으로 강화되고 있고, 미러 관계는 ‘리셋’되고 있으며,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관계를 “재구축”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러-우 전쟁이 상반기 내에 휴전이나 종결되면,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또 하나의 퍼즐인 북미관계의 향방은 8월 한미연합훈련의 실시 여부에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2019년 8월에 트럼프가 약속을 뒤집고 연합훈련을 강행한 것이 “사랑에 빠졌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실연’하게 만들었다면, 연합훈련의 유예는 ‘재회’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김정은과의 관계를 “재구축”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말한 트럼프의 선택이 주목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시기적으로 이는 한국의 차기 정부 출범과 조우하게 된다. 한국의 외교 관례에 비춰볼 때, 차기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 상대는 트럼프가 될 공산이 크고 그 시기는 7월로 점쳐볼 수 있다. 엄중한 의제들이 많겠지만, 나는 한미정상회담이나 전화통화를 통해 ‘양 정상은 8월 한미연합훈련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는 발표가 나오길 소망한다. 연합훈련의 실시 여부가 다방면에 미칠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연합훈련을 실시하면 한국은 당분간 ‘악순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우선 조선이 강력히 반발하면서 올해 내에 북미 간에 의미 있는 접촉이 이뤄질 가능성도 희미해질 것이다. 이렇게 안보 정세가 악화되면 한미 간의 여러 현안에 있어서도 한국이 불리한 위치에 내몰릴 수 있다. 한국의 대미 의존의 상승을 가져오게 되어 방위비 분담금과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에 있어서 트럼프의 요구가 터무니없이 강해질 수 있다. 무역 문제에 있어서도 안보적 고려가 강하게 작용해 우리의 발언권이 약해질 것이다. 폭망한 남북관계에도, 갈수록 강해지는 북러 동맹에서 효과적인 대처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차기 대통령과 트럼프와의 초기 소통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방위비 분담금과 관세 문제 등을 놓고 얼굴을 붉힐 수도 있지만, 트럼프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상호 만족할 수 있는 의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트럼프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해온 북미정상회담과 세계의 핵군축 및 미·중·러 군사비 삭감 문제가 이에 해당한다. 트럼프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분개한 나머지 대다수 미국의 동맹국들은 이러한 트럼프의 발제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이다. 이에 반해 한국 대통령이 이들 사안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 의사를 피력하면 트럼프와 긍정적인 케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북미정상회담의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8월 연합훈련을 유예하는 데에 맞춰져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비핵화도 차기 정부가 심사숙고해야 중요한 문제이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어떤 표현이 나오느냐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한반도”나 “북한”의 비핵화를 강조할수록 북핵은 강해지고 한국의 대미 안보 의존도 깊어진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트럼프의 세계 핵군축 추진 의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모든 핵보유국들이 핵군축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미·러, 혹은 미·중·러의 핵군축이 탄력을 받아 미국의 핵보유량이 줄어들면, 꽉 막힌 한반도 핵문제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이전까진 북미 상호 핵군축 주장이 턱도 없는 소리였지만, 트럼프는 ‘핵보유국들이 같이 줄이자’는 입장이기에 그러하다. 이에 따라 차기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에 집착하기보다는 북핵 문제를 세계 핵군축 논의에 담아내면서 ‘한반도(혹은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창설’을 대안으로 추구할 필요가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 참조>
폭망한 남북관계를 어떻게 ‘리셋’할 것인가도 차기 정부의 중대 과제이다. 일단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던 윤석열이 파면되면서 최근까지 한반도를 짓눌렸던 전쟁 위기설은 크게 누그러질 것이다. 윤석열 집권기에 언제 무력충돌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남북관계가 악화되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이 정도만 되어도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대화와 관계 개선 없는 안정화는 언제든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성과 같다. 그래서 설자리를 잃어버린 기존의 대북 정책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대신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대북 정책을 토론하고 설계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면, 핵심적인 기조와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는 ‘상호간 주권 존중과 평화 공존’을 제안한다. ‘북한’이라는 호칭에서부터 헌법의 영토조항과 국가보안법, 그리고 유사시 ‘미수복 지역’을 점령해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군사전략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 유엔 회원국인 조선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선도 “조선반도에 두 국가가 병존한다”면서도 한국을 미국의 “괴뢰”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한국의 주권을 온전히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 양측 모두 상대를 평시에는 적대·억제하고 전시에는 섬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어 유엔 헌장에서 명시하고 있는 평화 공존과는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로가 국가성을 인정하고 평화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조선이 들고 나온 ‘적대적 두 국가론’에서 두 국가론은 받고 적대는 떼어내는 ‘주권과 평화의 교환 전략’에 입각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된다. 윤석열 정부가 조선을 “주적”이라고 부르자 조선도 한국을 “제1의 주적”이라고 했고, 대북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를 방조하자 조선은 쓰레기 풍선을 보냈으며, 대북 확성기 방송을 전면 재개하자 조선은 대남 괴음 방송으로 응수했다. 그런데 이들 조치는 하나같이 자제할 수 있는 일들이자, 상호간 적대성과 긴장을 완화하고 주권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더해 전쟁이 발발하거나 “북한급변사태” 발생시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해 통일을 완수하겠다는 ‘전시 목표’를 내려놓는 것도 검토해봐야 한다. 아울러 공식 국호를 사용하고, 헌법의 영토 조항 및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문제도 국민적 공감대를 이뤄나가면서 차분히 검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선택이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롭고 하고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우리의 선택지를 넓힐 수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 이로운 까닭은 조선을 변화시키겠다며 쏟아부어온 역량을 우리 내부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데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와 김정은의 협상이 탄력을 받으면, 북미관계가 평화협정 체결과 국교수립으로까지 진행될 가능성도 품고 있다. 북미관계가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그동안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조선과의 수교를 꺼려했던 여러 나라들도 조선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한국이 이러한 가능성에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전망은 북미관계의 다양한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북미정상회담 자체가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열리더라도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2017년과 흡사한 위기 상황이 조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나리오는 모두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이 조선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평화적 두 국가론’으로 대처하면서 상호 주권 존중과 평화 공존의 토대를 넓혀가는 것은 북미관계의 낙관적인 시나리오를 대비하고 촉진하는 데에도,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방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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