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CIA, 일 자민당 창당 공작에 수백만 달러 투입
한승동 에디터
1992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관련 기밀자료의 마지막 약 8만 쪽에 이르는 미공개 자료가 지난 3월 18일 공개됐다.
일본 언론들은 마지막으로 공개된 그 자료들 중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일본 정치공작, 특히 자민당 결성과정과 자민당 정치인의 활용에 수백만 달러의 자금과 정보를 제공한 사실을 명기해 놓은 부분이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당시 수백만 달러를 지금 환율로 환산하면 엄청난 돈이다.
14일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이번에 기밀 해제돼 공개된 문서에는 미국 CIA 기밀공작 강화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이 문서를 분석한 조지 워싱턴대의 바카르디 교수는 “일본의 좌파를 약체화하고 보수파를 강화하기 위한 CIA 공작에 관한 증거 문서”라고 설명했다.
검은 칠로 삭제했던 인명 지명 등 무삭제 공개
이에 앞서 <아사히신문>은 지난 2일, 케네디 암살 관련 문서들은 1992년부터 2023년까지 이미 99%가 단계적으로 기밀해제돼 공개됐으며, 이번에 공개된 것은 나머지 약 8만 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이번 공개에서는 그 동안 기밀해제된 문서들에서 검은 칠로 삭제돼 있던 인명이나 지명, 기관명 등이 그대로 공개돼, 자민당에 대한 CIA 공작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관련 사실들은 2017년까지 공개된 관련 자료에 들어 있었으나 ‘일본’ ‘도쿄’ ‘자민당’ 등의 단어들은 검은 색칠로 지워져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무삭제로 공개됐다.
미 대사관 정치부문 직원 약 절반이 CIA 첩보요원
<아사히>에 따르면, 1960년대에 작성된 케네디 암살 관련 문서에는 당시 CIA가 해외에 약 3700명의 요원들을 파견했으며, 각국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정치부문 직원의 47%가 첩보요원들이었다는 사실이 명기돼 있다.
주일 미국 대사관 직원의 약 절반이 CIA 첩보요원이었을 도쿄에도 당시 CIA 지국이 있었으나, 당시 월터 먼데일 주일 미국대사는 그 사실의 공개를 꺼렸으며, 거기에는 그 사실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일본 자민당 정부 쪽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
미국 CIA가 일본 자민당 결성에 자금 제공 등을 통해 깊이 관여한 사실은 1994년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그 윤곽이 드러났으나, 당시 고노 요헤이 일본 외상은 먼데일 당시 주일 미 대사에게 “(CIA의 자민당 공작이 드러나면) 보수파 정치 지도자에게도, 미일 안전보장 관계에도 심각한 데미지(손실/피해)를 안겨주게 될 것”이라며 “미국정부에게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사실이 공개자료에 명기돼 있다고 보도했다.
CIA 도쿄지국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일본
외교, 방위, 디지털 대신을 지낸 고노 다로 중의원 의원의 부친인 고노 요헤이 당시 외상은 1995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도 “CIA가 일본에 존재하는지 여부, 그리고 CIA가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우리는 일절 아는 바가 없다”고 의원 질의에 답변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CIA가 일본에 존재하고 있고,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확인해 준 거나 같다.
좌파 배제 보수우파 집권 영속화 위해 자민당 결성
1994년 10월 9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CIA는 1950~60년대에 일본을 당시 동서냉전기의 공산주의 공세에 맞서는 동아시아의 보루로 설정하고 사회당 등 좌파들을 약체화해 친미 보수 우파가 지배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보수우파 합동의 자민당을 결성하고 소속 정치인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데에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투입했다. CIA의 자민당 결성 공작은 1949년 중국에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소련의 첫 원자탄 폭발시험이 이뤄진 뒤 본격화했다.
원래 미국은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뒤 전범자들을 추방하고 평범한 친미 종속국으로 만들 계획이었으나 중국 공산화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일본을 강력한 반공친미 동맹국가로 만들기로 방향을 선회하고 전범자들을 전후 일본의 중추세력으로 재기용했다. 이것이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인데, 그때 앞장세운 정치인이 A급 전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 감금돼 있던 기시 노부스케와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 같은 보수우파 정객들이었다.
자민당 일당 장기집권 체제의 출발점
함께 스가모에 감금돼 있던 도조 히데키 등 다른 A급 전범 7명을 처형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4일 기시를 전격 석방한 미국은 그를 1955년 보수합동의 자민당 결성 주역으로 내세웠다. 자유당과 민주당 등을 통합한 자민당 결성의 목적은 반공의 보루 일본에서 좌파세력의 집권을 영구히 막고 친미 보수우파세력의 집권을 영속화하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자민당이 사실상 장기 일당지배를 계속하고 있는 일본의 정치지형의 기본틀이 그때 짜였다.
이탈리아, 한국 등에서도 유사 패턴
이런 패턴은 CIA의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 지원 때도 되풀이됐으며, 한국에서 미 군정청이 몽양 여운형 등이 주도했던 건준과 인민공화국, 박헌영의 남로당 등을 억압 배제하고 한민당, 군부 등 반공주의 보수우파들을 지원해 ‘좌파’세력의 집권을 원천봉쇄한 것도 다르지 않았다.
기시가 석방될 때 요시다 시게루 정권 관방장관이던 사토는 CIA 자금 제공 통로였다. 사토는 형 기시가 총리로 재직(1957년 2월~1960년 7월)할 때도 재무상(당시 대장성 대신)으로 CIA의 자민당 공작 자금통로였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1958년 7월 29일 당시 주일 미국 대사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2세(미국 전쟁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는 사토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주일 미국 대사관에 돈을 요구했다고 본청 국무부에 보고했다. 맥아더 2세는 당시 일본 사회당이 “모스크바가 직접 운영하는 위성”이라면서 “일본이 공산화되면 나머지 아시아가 그것을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일본 외에 미국의 힘을 투사할 다른 곳이 아시아에는 없기 때문에 일본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늘 일본을 싸고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양자로 가는 바람에 성이 달라진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는 1964~72년 일본 전후 최장수 총리(그들의 외손자 아베 신조 이전까지)로 있으면서, 이른바 ‘비핵 3원칙’을 고수했다는 등의 이유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으나, 나중에 미국 핵무기의 일본 기항, 반입을 사실상 인정한 비밀 약정을 맺어 비핵 3원칙을 스스로 형해화한 사실이 폭로돼 노벨상이 무색해졌다.
일본 군부 은닉 텅스텐 밀거래에 1천만 달러
CIA는 고다마 요시오 등 또다른 전범들과 전직 국무부 관리 유진 두만, 2차대전 기간의 미국 첩보기관 OSS 출신자들도 정치 브로커 및 자금통로로 활용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한국전쟁 기간에 유진 두만 그룹은 돈이 필요한 일본 보수정치인들(나중의 자민당)과 텅스텐 등 희소 전략물자가 필요한 미 군부 사이를 연결하는 1000만 달러 규모의 밀거래를 성사시켰다. 여기에는 고다마 요시오와 갑부 게이이치 스가하라(케이 스가하라) 등도 관여했다. 당시 CIA는 일본 군부 관리 출신자들이 은닉하고 있던 텅스텐 확보작전에 280만 달러를 제공했고, 두만 그룹이 그 중 200만 달러 이상을 가져갔다.
이들은 1953년에 전후 처음 실시된 일본 총선에 ‘검은 돈’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1955년 자민당의 보수합동체제(1955년 체제) 탄생에도 기여했다.
일본 군부가 확보해 숨겨 두고 있던 텅스텐이라면, 세계 최대의 텅스텐 광산 중의 하나가 조선 상동 광산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패전 전에 비밀리에 빼돌린 상동광산 텅스텐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중국과의 희토류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이 다시 상동 광산 텅스텐 재개발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무거운 돌이라는 뜻의 ‘중석’으로 불리는 텅스텐은 무겁고 단단한 재질 때문에 탄환과 미사일 등 군수물자에 필수적인 광물이다.
CIA 대일공작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자민당 결성 때 CIA의 극동작전 책임자였던 앨프리드 을머 주니어는 1955년에서 1958년 시기에 자민당 결성과 자민당 내 정보원 확보를 위해 자금을 제공했으며, 그것은 1970년대 초까지 관행으로 이어졌다. CIA와 자민당의 이런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부총리를 지낸 7선 중의원 의원 고토다 마사하루의 당시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당시 CIA는 사회당이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고, 자신들의 자민당 지원을 그런 면에서 정당화했다. 이런 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고 미일 간에 통상무역을 둘러싼 알력이 커질 때까지 유지됐다.
트럼프가 ‘케네디 기밀문서’ 최종본까지 공개한 이유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오픈카를 타고 시내 퍼레이드를 벌이던 당시 46세의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백주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암살 용의자 리 오스왈드는 사건 이틀 뒤인 24일 경찰서에서 다른 남성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미국 정부조사위원회는 다음해인 1964년에 “오스왈드에 의한 단독범행”으로 규정했으나 중앙정보국(CIA) 등이 개입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 사건과 관련한 방대한 자료들은 비밀에 붙여졌고, 30년이 지난 1992년부터 해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에 관련 법률이 제정돼 25년 안에 원칙적으로 자료들을 공개하기로 했다. 이후 단계적으로 기밀해제가 이뤄져 왔고, 2023년까지 전체 자료의 99%가 공개됐다. 3월 18일 처음 공개된 마지막 자료도 8만 쪽에 가까운 방대한 자료인데, 거기에는 검은 색칠로 삭제된 내용 원본들도 포함됐다. 따라서 그동안 기밀해제한 자료들조차 숨겨 온 구체적인 인명이나 국명, 기관명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케네디 암살 관련 마지막 기밀자료 공개 이후에도 아직까지 오스왈드 단독범행설을 뒤엎을 만한 새로운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마지막 기밀자료 전면 공개는 대선 때 그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약속을 이행한 결과다. 사회보장번호 등 개인정보 유출 등을 이유로 공개해선 안 된다는 주장들도 있었으나 트럼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공개를 정당화했다.
“나는 아무것도 소거(삭제)하고 싶지 않았다. 소거하면 사람들은 왜 소거했느냐며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거기에 뭔가 있으니까 그랬겠지라고. 그래서 우리는 사회보장번호까지 모조리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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