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복 입고 민간인 총살한 대한민국 경찰부대

 우익도 좌익도 피해 가지 못한 해남·완도 민간인 학살사건

20.12.05 19:56l최종 업데이트 20.12.05 19:5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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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후 있는가?" "(김상규) 면장님 오셨어라우." "인민군들이 온다는데 언능 울 집으로 가서 환영대회를 우짜케 할 것인지 상의해 불드라구." "그라지라."

김상규(1896년생)는 1948년 초대 국회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완도 지역 유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전남 완도군 노화면 면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박상후는 노화면 대한청년단 부단장이었다. 이어 김상규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마을 이장이거나 대한청년단 간부 들로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이들이었다.

"오늘 인민군들이 선착장으로 온다등만요. 주민들과 함께 환영대회를 열어불라는데, 어쩌코롬 생각하시오." "뭔 이견이 있간디요. 그래붑시다."

박상후가 부단장으로 있던 대한청년단은 전형적인 우익단체로 인민군(공산당)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단체였다. 그런 대한청년단이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 생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징병된 박상후의 당시 모습.
▲  일제강점기 때 징병된 박상후의 당시 모습.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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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가 터지자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쪽으로 쳐내려 왔고, 국군과 UN군은 짚단이 허물어지듯이 패퇴를 거듭했다. 오산, 대전 전투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한 국군과 UN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에 급급했고, 마침내 전라도도 북한군 수중에 장악되었다.

전남 동부 지역의 퇴로가 막히자, 해남과 완도 경찰들은 각각 7월 24일과 25일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후퇴했다. 이러다 보니 해남과 완도는 무주공산이었고, 인민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에 주민들과 우익 인사들은 불안에 떨었다.

완도경찰서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이런 찰나에 7월 25일에 완도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동무, 내일 우리가 완도로 갈 테니 환영대회를 준비하시오!" 상대방은 이 말만 하고 전화를 툭 끊었다. 이 전화는 완도군 전체에 급속히 퍼졌고, 노화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전화를 한 이는 인민군이 아니라 나주경찰부대였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지역 유지들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열자고 입을 모았다. 그렇지 않으면 우익인사뿐만 아니라 주민도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피해를 줄여뿝시다"라는 말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동신호'는 전남 완도군 노화면 이포리 선착장에 접안했다. 배에는 북한의 국기인 인공기가 매달려 있었고, 배에서 내리는 이들은 사복 차림의 나주경찰 부대원 5명이었다.

노화면 주민들은 그들이 북한군인지 대한민국 경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지난 25일 완도경찰서에 걸려온 전화와 배에 걸린 인공기를 보고 북한군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환영대회를 위해 선착장에 나왔던 주민 40여 명은 동신호 가까이 모여들었다. 주민들을 대표해 김상규가 앞으로 나섰다. "동무들,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지라"라는 김상규의 말에 청천벽력같은 말이 돌아왔다.

"이 빨갱이 새끼들!" 김상규를 비롯한 유지들은 입이 딱 벌어지며 놀랐다. 환영대회에 동원된 주민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서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인솔자가 "이 빨갱이 새끼들 전부 지서로 끌고 가" 라며 명령을 내렸다.

"대한민국 만세" 불렀지만

지역 유지들은 모두 해안가에서 200미터 떨어진 지서로 연행됐다. 환영대회에 나온 주민도 끌려갔는데 유치장이 비좁아 지서 마당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잠시 후 지서 안에서는 '악' '아이고'하는 비명소리가 났다. 나주경찰부대원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소리였다. "지들은 인민군인 줄 알고 그랬지라, 한 번만 용서해 주씨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은 통하지 않았다.

장교의 턱짓에 이들은 손이 묶였고, 지서 마당으로 끌려 나왔다. 맨앞에 선 김상규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으려 묶인 두 손을 번쩍 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나주경찰부대의 '풋'하는 비웃음뿐이었다.

마당에서 무릎 꿇고 있던 이들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벌벌 떨고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정중웅은 무릎을 꿇은 채 놀란 황소 눈으로 경찰에게 끌려가는 어른들의 뒤통수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노화면 지역 유지들은 지서에서 2km 떨어진 배남재에 끌려가 사살되었다. 13명이 끌려간 자리에서 김상규(당시 53세), 박상후(25세), 박형열(18세)를 비롯한 12명이 즉사했고, 한 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김채규는 경찰들의 총소리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확인 사살에도 총 한 방 맞지 않았다. 1950년 7월 29일이었다(정중웅, 82세, 전남 완도군 노화읍 이포리)

1950년 7월 27일, 완도경찰서 소사 김길재(가명)는 완도 읍내를 뛰어다녔다. "인민군 환영대회가 완도중학교에서 있으니 모두 모이시오." 완도중학교에 모인 사람들 앞에 인민군 대표라는 사람이 운동장 연단에 섰다.

그는 "공무원과 경찰 가족은 앞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어젯밤에 선착장에서 우리를 환영했던 사람도 모두 나오시오"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나온 이들을 분류했다. 잠시 후 인민군 대표인 듯한 사람이 "사실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고 나주 경찰"이라고 했다.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이들 중 한 명이 도주했다. 그러자 나주경찰부대원들이 총을 쏴 벌집을 만들었다.

이날부터 나주경찰부대는 완도군 '빨갱이 사냥'을 시작했다. 인민군 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경찰로 판단할 수 있는 모자 마크와 견장, 버클 등은 전부 가리고 인민군 말투를 썼다. 실질적인 함정 수사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완도지역 주민들은 완도중학교와 노화면 이포리 선착장에 나온 사람들처럼 나주경찰부대들을 모두 인민군으로 오해했고, 일부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201개의 섬(유인도 54, 무인도 147)으로 이루어진 완도는 나주경찰부대의 민간인학살 사냥터로 바뀌었다. 

땅끝마을에서 시작된 '함정수사'

많은 사람들을 골로 가게 한 함정수사는 1950년 7월 25일 해남에서 시작됐다. 이날 오전 나주경찰부대 100여 명은 해남에 입성했다. 이들은 경찰과 관련된 물건은 모두 헝겊으로 가리고 모두 인민군 말투를 썼다. 다음 날 완도주민들처럼 해남 주민들도 나주경찰부대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했다.

해남읍 '인민군 환영대회'는 없었다. 나주경찰부대는 '좌익 척결' 등의 명분으로 청·장년이 보일 때마다 모두 사살했다. 그들은 쓰리쿼터와 트럭 10대에 나누어 타고 해남읍 해리, 수성리, 구교리, 남동리, 신안리, 읍내리, 성내리 일대에서 주민을 사살했다. 집안에 있는 주민을 길가로 끌어내 근접 사격하기도 했다. 해남읍에서만 108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김소철, 86세,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나주경찰부대는 7월 25일 오후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로 진입해 3일간 주민 15명을 살해했다. 학살 첫날 마을 어귀에 모인 일부 주민들은 나주경찰부대를 인민군으로 오인해 환영하려다 변을 당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주경찰부대에게 끌려가 일방적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나주경찰부대는 왜 인민군 흉내를 내면서 해남과 완도 주민들을 학살했을까? 기존에 경찰 측은 좌익세력들이 해남과 완도를 장악했기 때문에 전시에 좌익을 색출하기 위한 작전상 자구책이었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좌익 세력은 해남과 완도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이 사건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독립운동 세력이 강했던 이 지역을 한국전쟁을 기화로 싹쓸이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왔다.

거창에서 국회조사반 공격한 인민군

"철수! 빨리 철수하시오!" 1951년 4월 3일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국회조사반' 일행을 태운 지프차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과 남상면 사이 계곡에 다다랐을 때였다. "타타탕"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산에 매복하고 있던 인민군 40여 명이 국회조사단 일행을 태운 지프차에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정조준을 하지 않아 총에 맞은 국회의원은 없었지만 이들이 공포심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국회조사반은 1951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제11사단이 거창군 신원면 주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을 제대로 조사도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조사반에 발포를 한 이들은 정말 인민군이었을까? 놀랍게도 아니었다. 그들은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의 명령을 받은 제11사단 9연대 수색중대원들이었다. 이들은 국회의 거창 민간인학살사건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인민군 총격전'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거창민간인학살 피해자 719명 중 359명이 15세 이하 어린이였다. 이들은 11사단 군인들의 집중사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불에 태워지기도 했다. 당시 거창 사건이 제대로 진실규명되지 못한 것도 이 '인민군 총격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나주경찰부대에 의한 해남·완도 피해자 대부분은 이념과는 무관했다. 심지어 우익청년 단체와 지역유지들도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자녀는 '빨갱이 자식'으로 규정돼 또다른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 정만조(당시 노화면 포전리 이장) 아들 정남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복무하다가 신원조회에 걸려 2학년 재학 중 퇴교 조치당했다.
 
 박동원이 고향 선산에 세운 박상후 추모비
▲  박동원이 고향 선산에 세운 박상후 추모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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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 노화면 배남재에서 숙부 박상후를 잃은 박동원(81세, 전남 나주시)은 2017년 고향 선산에 숙부의 추모비를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집으로 만주에 끌려갔던 숙부가 젊은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저세상으로 가버린 게 한이 되었다.

조카 박동원은 나주경찰부대 사건을 유족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기억하길 바란다. 전남 완도군 노화읍 이포리 선착장이나 배남재 사건 현장에 나주경찰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증언자 박동원. 박상후 조카다.
▲  증언자 박동원. 박상후 조카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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