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4

 

올림픽 방해 공작? 올림픽 공동개최 파탄 공작!
강진욱  | 등록:2020-12-08 08:09:46 | 최종:2020-12-08 08:14:4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한홍구TV, 거짓과 진실, 그리고 헛소리 4
- 11월 26일 방송 ‘KAL 858기 폭파사건’에 대하여

강진욱 <1983 버마> 저자

4. 올림픽 방해 공작? 올림픽 공동개최 파탄 공작!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는 KAL 858 사건에 대해 이북이 ‘88 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저지른 테러’라고 규정했다. 김현희가 13대 대선 하루 전날(1987.12.15)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김포공항에 내린 지 한 달 만인 1988년 1월 15일 안기부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안기부는 ... 범인들은 북괴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소속 특수공작원으로 지난해 10월 7일 ‘88서울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이래 치밀한 계획 아래 범행을 ... 안기부는 또 범행 목적은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고 중동 노선 대한항공기를 이용하는 해외진출 노동자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국내 근로 계층 서민의 대정부 불신을 충동시킬 수 있다는 북괴의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동아일보> 1988.1.15)

(동아일보 1988.1.15)

올림픽을 방해하고 국내 노동자층의 대정부 불신을 충동하기 위해? 한 마디로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두 가지 이유가 서로 이율배반한다. 올림픽 참가 신청을 방해하려면 외국인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야 했다(안기부식 사고방식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망자 중 외국인은 딱 2명, 이집트와 인도 국적자였고 서방국 국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현대건설과 삼성종합건설 등 국내 건설 노동자 80여 명만 골.라.태.워.서(예정에 없던 이가 누군가의 권유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전언이 있다) 죽일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 사람들을 골고루 죽였더라면 아예 한국 경제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안기부식 사고방식대로라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교수는 안기부의 말도 안 되는 수사결과를 100% 신뢰한다. 그의 해괴한 주장을 다시 보자.

[참 이상해요 ... 아직도 ... 아직도 제대로 100% 이해를 못 하는 게 ... 그래도 남쪽에서 ... 선거에서 민주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북한이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왜 저런 몰상식한 짓을 했을까? ... 88올림픽을 방해할려고 한 거는 맞는 거 같은데 ... 사실 그랬거든요, 김대중이나 김영삼이가 등장을 하며는요 ... 88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 ... 북한에 크∼은 유화책을 쓰고, 북한과 공동개최는 아니더라도 북한 선수단을 초청하고 .. 우대하고 .. 몇 개 종목은 북한에 줬을 겁니다. 그런데 왜 ... 김영삼.김대중이 당선되는 그런 상황을 돕질 않고 ...]

한 교수가 안기부 발표를 따라 외는 것은 안기부와 똑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측의 ‘닭같은 놈들이 멍청한 짓’(한홍구)을 저질러 노태우의 당선을 도와 올림픽을 공동(분산)개최할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는 칠푼이 같은(극우 꼴등 같은) 사고체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한국현대사 사전’이라는 그는 놀랍게도 한국 현대사의 큰 축인 남북분단체제 에 대한 통찰이 없다. 미국과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 분단체제를 지탱해 오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혹시 ‘애국심’ 때문에?!). 이 ‘분단체제’에 대한 약간의 인식만 있어도, [강조]1988년 올림픽의 남한 단독 개최는 40년 전인 1948년 이승만 단독 정권수립과 똑같은 구도 아래 기획, 추진됐음을 간파할 수 있다.[강조]

일제에 이어 미 군정이 지배하는 남한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로 만들려 했던 것처럼, 박정희 정권 말년에 기획된 서울올림픽 단독 개최는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에게 합법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스였다.

실제로 KAL 858 사건은 미국과 전두환 정권이 기도했던 대로, 북한에게는 테러국가의 이미지를 씌우면서 ‘남한만의 올림픽’을 실현시킨 비책이었다. 그렇게 남북에 각각 천사와 악마의 이미지를 씌워 대비시키고 남한 내 대북 적대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림으로써 한반도 분단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이 바라던 바였고, KAL 858 사건은 미국이 바라던 바를 모두 현실화됐다. 이것이 바로 남북 분단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런 통찰이 아니더라도 올림픽 개최 문제를 놓고 약 1년여 동안 진행된 남북 체육회담만 자세히 들여다봐도(사이비 ‘친북.종북 역사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남과 북의 입장을 역지사지하는 객관적 시각으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교수는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은 것이다.

남북 체육회담의 물꼬를 튼 것은 1985년 7월 30일, 당시 이북의 정무원 총리 정준기(鄭浚基)의 서울.평양올림픽 공동개최 제의였다. 남측은 이를 무시했지만 북측은 IOC에 올림픽 공동개최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득했고 마침내 1년 3개월이 지난 1986년 10월 IOC 연차총회에서 ‘남북 분산 개최안’이 가결됐다.

(경향신문 1986.10.8)

[로잔(스위스)국제올림픽위원회(IOC) 91차 총회는 13일 북한의 서울올림픽 분산 개최 참여 문제를 IOC 최종 제안(탁구.양궁 전종목, 축구, 사이클 일부 종목 북한 개최) 테두리 안에서 87년 9월 17일까지 타결토록 결정했다. IOC는 이 제안이 북한에 대한 최후통첩이라며 IOC 집행위가 이 문제를 전권 위임받아 기한 내에 매듭짓도록 했다.](<동아일보> 1986.10.14)

북측이 요구하는 종목 수는 더 많았을 것이고 이 때문에 논란도 있었겠지만 IOC는 분명 종목 수를 떠나 남북 공동(분산)개최 필요성에 공감했다. IOC의 이런 전향적 움직임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북측의 금강산댐 공사를 서울올림픽을 무산시키려는 방해공작이라고 공격하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1986.11.5 경향 /  1986.11.13 경향)

이후 북측이 8개 종목을 분산 개최할 것을 주장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1987년 들어서면서 북측이 4개 종목 분산개최에 대한 IOC 최종안을 수락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분산 개최 개연성이 한 층 높아진 것이다.

[안토니오 사라만치 IOC 위원장은 [1987년 2월] 12일 북한올림픽위원회가 지난해 6월 11일 ... 4개 종목(탁구.양궁.축구 예선. 사이클)의 북한 배정을 받아들이도록 최후통첩 형식으로 권고했던 IOC의 분산개최안을 원칙적으로 수락했다고 발표했다. ... 사마란치 위원장이 이날 하오[오후] 5시 45분부터 근 2시간 동안 IOC 집행위원회와 김유순 북한 NOC[국가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 등 4명의 북한 체육대표단 간의 회담이 끝난 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확인 ... ](<경향신문> 1987.2.13)

이때 IOC가 제안한 분산 개최 종목과 경기는 탁구 및 양궁 등 2개 종목의 예선과 결승, 축구 1개조 예선, 100km 도로사이클 등이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북한 측이 이것으로 IOC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락한 것으로 인식하며 이같은 틀 안에서 구체적이고 발전적인 협의를 위해 올 여름 로잔에서 IOC 주재로 남북 체육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몇 개 종목을 북측에서 분산 개최해야 한다는데 대해 전두환 정권은 사뭇 못마땅해 했음은 불문가지다. <경향신문> 은 사설에서, 북측이 4개 종목 분산 개최안을 수용한 것을 두고 ‘올림픽 판 깨기 작전’이라고 매도했다. 당시 남측의 언론의 대북관은 지금의 맹북(盲北) 정도가 아니었다. 철두철미 적대의식에 세뇌된 모르모트 수준이었다.

( 1987.2.13 경향 사설)

이세기 체육부장관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표 나흘 뒤인 1987년 2월 17일 여당인 민정당정책위 문공분과위 회의에서 “88올림픽과 관련해 탁구.양궁 전 종목과 축구, 사이클 일부 종목 등 4개 종목 외에 어떠한 종목의 북한 북 개최도 허용할 수 없다”며 지레 못을 박았다.

그는 “4개 종목 분산 개최도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2만 5천 명의 필수요원에 대한 북한 자유왕래 보장을 전제로 수락한 것”이라며 “올림픽 분산 개최를 둘러싼 남북 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남북체육회담 전망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경향신문>

1987.2.17). 한 마디로 남북체육회담 하기 싫다는 말이었다. 결국 이 ‘2만5천 명 필수요원의 자유 왕래’ 문제가 올림픽 공동(분산)개최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분산 개최 종목 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1987년 7월까지 모두 네 차례 회담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올림픽을 함께 치르고 싶었던 북측은 5차 회담을 제의했다. 그러나 KAL 858 사건이 터지면서 없던 일이 돼 버렸다.

[강조]‘공동’이든 ‘분산’이든 남북이 함께 올림픽을 치르겠다는 북측의 의지를 꺾어버린 것이 바로 KAL 858 사건이라는 말이다. 88올림픽 단독 개최를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KAL 사건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올림픽 공동(분산)개최 의지와 노력을 파탄내기 위해 남한이 KAL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강조]

적어도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북측은 올림픽 공동(분산)개최를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87년 5월 31일 자에서 “우리는 평양에 오는 선수, 임원, 관광객과 모든 외국인을 따뜻하게 환영할 것이며, 그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한 가지 당시 북측의 올림픽 공동개최의 염원이 어떠했는지를 상징하는 ‘물건’이 있다. 잘난 남녘의 동족들이 오랜 기간 ‘평양의 흉물’이라고 비웃던 것. 착공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그 웅장한 면모를 과시하며 완공된 105층 유경호텔이 그것이다. 북측이 이 호텔을 착공한 때가 바로 1987년 8월이었다.

(2017년 8월, 착공한 지 30년 만에 완공된 평양 유경호텔)

전두환 정권의 몽니와 농간으로 올림픽 공동개최의 꿈은 멀어지고 있었지만, 북측은 각국 선수.임원단과 관광객을 맞이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시로써는 세계 최고 높이의 105층 호텔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북측이 일본 사회당 대표단을 초청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올림픽 경기장 건설 현장 등을 둘러보게 하는 등 올림픽 분산(공동) 개최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북한 방문을 마치고 27일 북경에 도착한 다나베 마코토 전 서기장 등 일본 사회당 의원들은 이번 북한 방문을 통해 북한이 내년 서울올림픽 일부 개최를 위해 대외 유연노선 강조 등 갖가지 사전 정지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28일 일본 신문들이 보도했다.](「“북한 88올림픽 분산개최 안간힘” - 일 사회당 방북단 밝혀」<동아일보> 1987.7.28)

8월에는 일본 국제탁구연맹 회장 오기무라 이치로를 평양에 초청해 “늦지 않은 시기에 사마란치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싶다는 희망”을 표시했다(<동아일보> 1987.8.4). 탁구는 IOC가 예선과 결선을 모두 북한에서 치르도록 하자고 제안했던 종목이다. 북측은 이처럼 88올림픽 남북 분산 개최 의지를 국제사회에 계속 전하고 있었다.

이랬던 북측이 불과 석 달 뒤 KAL 858기를 폭파해 서울올림픽 개최를 방해하려 했다고? 밥 좀 나눠 먹자는데 안 주고 혼자 먹겠다는 놈 미워서 한 대 치듯이? 그래서 진짜로 밥 나눠먹을 기회를 날려버려?

한 교수의 지적 능력이 이 정돈가? 13대 대선의 의미도 몰라, 서울올림픽 단독 개최의 의미도 몰라, 1980년대 말 극악무도한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도 몰라, 그 와중에 전개된 IOC와 남북 간 대화의 의미도 파악을 못 해, 그래놓고 KAL 858 사건이 어쨌다고? 

해방 후 1990년대까지 이남은 미국이 지탱하는 동북아 패권체체와 남북 분단체제의 불쏘시게요 노리개였고(어쩌면 지금까지도), 이 더럽고 치사하고 부끄러운 분단사의 모순이 극한으로 치달은 때가 1980년대였다. 전두환 집권 7년 동안(1981∼1987) 무려 네 건의 국가조작테러가 자행됐고, 그 분단 모순이 비등점에 달했을 때 KAL 사건이 ‘폭발’한 이유다. 한 교수는 이 ‘분단의 공식’에 대한 통찰이 없다.

‘한국 현대사’로 이름을 파는 이들 가운데 이 ‘분단의 공식’을 제대로 아는 이가 있을까마는(온통 분단체제에 기생하는 사이비들 천지라), 자칭 ‘종북.친북 역사학자’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여태껏 이 공식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한국 현대사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걸어 다니는 한국현대사 사전’? 사칙연산밖에 모르면서 인수분해 아는 척 하고 미적분 푸는 척 했나?

*    
2003년 7월 말 평양 시내 미니버스 안. 멀리 보이는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애써 외면하던 북녘 안내원들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저게 뭡니까?’ 올림픽 공동개최의 꿈이 응어리져 105층 높이로 켜켜이 쌓인 줄 모르고 불쑥 질문을 던져 정말 미안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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