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라고 불러" 했다가 밀린 임금 달라면 화내는 고용주

 [고기복의 이주노동 보고서 ②] 이주노동자가 속수무책으로 임금체불 당하는 이유

20.12.18 08:13l최종 업데이트 20.12.18 08:13l
 휴식 중 비닐하우스에서 낮잠 자는 농업 이주노동자들
▲  휴식 중 비닐하우스에서 낮잠 자는 농업 이주노동자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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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 형편을 살피다 보면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누적되다 보면, '아, 또 그런 이야기구나'라며 간과해 버리기 쉽습니다. 정형화된 하소연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피해자요, 고용주는 악하다고 일반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닳아빠진 일반화를 피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바람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어떤 이는 착하다 했고, 어떤 이는 속 터진다 했습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L 이야기입니다. L은 15년을 자기 사업체인 것처럼 일했습니다. 축사 관리, 사료 주기, 청소, 방역을 위한 예방 백신 접종 등 농장 전반 업무를 혼자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농장 사정 때문에 인근 업체로 옮길 때도 사장은 퇴직금 지급을 약속했지만 '다음에, 다음에, 오늘은 바빠서'를 반복하며 L을 우롱했습니다. 사장은 L이 퇴직금을 요구하러 농장에 간다고 할 때마다 단속에 걸릴 수 있으니 일하고 있는 곳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등록자인 L은 그 말에 따랐습니다.

L은 퇴직금 소멸 시효를 얼마 안 남기고 어쩔 수 없이 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왜 그런 데 가느냐, 나랑 먼저 이야기해야지" 하며 마치 퇴직금을 곧 줄 것처럼 L을 다시 회유했습니다. 노동청 조사를 받던 사장은 15년을 묵묵히 일한 사람 앞에서 '외국인들을 쓰면 하루아침에 도망가 버리고 손해가 얼마나 큰지 아느냐'며 마치 아량을 베풀어서 L을 고용했던 것처럼 사실을 왜곡했습니다. '합의 하에 그만둔 것을 두고 계속 도망이라는 말을 쓰는데, 당신이 무슨 노예주냐'고 따져도 사장은 부끄러운 줄 몰랐습니다. 그에게 이주노동자는 묶어놓고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여야 했습니다.

사람을 노예처럼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장은 돈을 위해 인권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런 사장과 대면하여 노동청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L은 "나는 15년을 일했고, 그만둔 뒤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믿었어요. 이제 모든 신뢰를 잃었어요"라고 했습니다.

무던한 L의 성격을 잘 아는 사장은 처음부터 퇴직금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L의 심리를 통제하는 동시에 퇴직금 요구가 있을 때를 대비해 증빙 서류가 될 만한 것들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임금 지급 일자는 일정하지 않았고, 늘 현금으로 지급하며 급여 봉투를 한 번도 준 적이 없습니다.

L을 고용한 사장은 근로기준법 43조(임금 지급)에 나와있는 '직접', '전액', '통화(通貨)', '정기 지급'이라는 임금 지급 4원칙 중에서 전액과 정기 지급 원칙을 어겼습니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연차 수당 미지급 등 따지고 들면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이 한둘이 아님에도 사장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고, 근로감독관은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20년 전보다 더 교묘해진 가스라이팅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년씩 임금체불을 당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따져 보면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용주의 기질적 특성에 기인하겠지만, 외국인력 제도가 가진 사업장 이동 제한과 같은 독소조항, 이주노동자의 신분적 약점, 고용주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근로감독관 조사 관행 등이 장기간 임금체불을 가능하게 합니다.

고용주 중에는 이주노동자들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그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스라이팅 혹은 심리(적) 지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L의 고용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IMF 외환위기 때 이주노동자들은 손쉽게 해고됐습니다. 그중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업체 부도로 갑자기 귀국하게 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M과 S는 귀국 대신 다른 선택을 합니다. 빚만 안고 귀국하느니 고향에서 손에 익은 농사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했던 것입니다. 단, 급여는 인삼 재배가 끝나고 판매 대금이 입금되면 한꺼번에 지급받는 거로 했습니다.

산업연수생 제도 시절에 사업체들은 강제로 3년씩 적금을 들게 해서 귀국할 때 한꺼번에 지급하는 경우가 왕왕 있던 터라 둘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2년 계약을 맺고 일했습니다. 사장은 인삼을 팔고 난 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습니다.

밭주인이라고 알고 있던 사람은 임차농이었고, M과 S는 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둘의 사연을 지역 경찰에도 이야기해보고, 농협에도 문의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누구도 M과 S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한국 사람도 그렇게 당하는 수가 있다"라며 "조심했어야지" 하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20년 전 이야기이고, 미등록자들이라 그런 피해를 봤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랍게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고,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가진 이주노동자들이 피해 당사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것도 대한민국 고용노동부가 알선해 준 업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3년 동안 임금 3400만 원을 받지 못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A 이야기입니다. A는 2015년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입국해 채소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사장은 근로계약 기간에 임금을 제대로 지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A는 농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한꺼번에 주겠다는 사장 말이 있었던 것도 있지만, 고용주 동의 없이는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없는 외국인 고용허가제 때문이었습니다.

A는 언젠가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근무 시간과 임금을 계산해서 공책에 적어뒀습니다. 하지만 사장은 밀린 월급 달라는 말에 그 공책을 불태워 버릴 정도로 막무가내였습니다. 이 사건 피해자를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 중인 원곡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부가 알선한 5인 미만 농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임금체불 등 피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장기간 임금체불 피해 이주노동자 사례를 아주 예외적이라고 말하지만, 체불임금 액수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이주노동자에게는 아주 보편적인 일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장기간 임금체불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주노동자를 마치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위장하여 통제하는 고용주의 기질적 특성에 기인합니다. 농업주들은 대체로 이주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아빠, 엄마"로 부르도록 합니다. 그러다가 이주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배은망덕하다면서 화를 냅니다.

3년 계약 후 1년 10개월 연장과 재입국 특례로 최장 4년 10개월을 더 일할 기회를 얻기 원하는 이들에게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입니다. 결국 고용허가제의 제도적 한계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앉아서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체불 피해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 노동자와 두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정부가 지정한 사업장에서만 일하는 등 사업장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점과 영주 자격이 없기에 사업주 재산에 대한 집행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시민단체가 나서서 농장주를 고소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고, 국가배상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최정규 변호사는 정부 알선 사업장에서 일하다 임금체불을 당한 이주노동자에게 ▲ 체불임금을 전액 체당금으로 지급하고 귀국시키거나 ▲ 임금 전액을 사업주로부터 집행해서 받아 낼 때까지 노동이 가능한 체류자격을 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임금체불 해소를 위한 대응과 국제규범

이주노동자 임금체불 대응에 나서고 있는 '지구인의 정거장'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소액체당금 제도는 5인 미만 농어업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고, 외국인고용법에 따른 체불보증보험 보험한도는 200만 원인 부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업주를 상대로 소송해도, 임차농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집행할 재산을 확보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대한민국은 피해자에게 그냥 떠나라고 합니다. 몇백, 몇천만 원의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주노동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야 할까요?

1990년 12월 18일 유엔이 채택한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 보호에 관한 국제협약' 제61조 2항은 이주노동자의 근로계약 조건이 고용주에 의하여 위반됐을 경우, 그 사건을 권한 있는 당국에 제기할 권리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피해 이주노동자가 노동청 진정이나 법원, 국가인권위 등에 도움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한편, 세계인권선언문 제23조는 '모든' 사람에게 일할 권리,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실업 상태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어 '모든' 사람은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고, 보수가 부족할 경우 여타 사회 보호 수단으로 부족한 보수를 메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이라는 단어는 '이주노동자는 빼고'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문 제23조 '여타 사회 보호 수단으로 부족한 보수를 메울 수 있는 권리'를 이주노동자에게 부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최소한 법적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에라도 합법적으로 체류하여 노동하게 하는 것이 정당한 처우가 아닐까요?
 
 MFA 소속 말레이시아 시민단체에서 진행 중인 임금 도둑질 철폐 캠페인 포스터
▲  MFA 소속 말레이시아 시민단체에서 진행 중인 임금 도둑질 철폐 캠페인 포스터
ⓒ Muhammad Haizreel Bin M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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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각국에서 임금 체불을 '정의'의 문제로 부각하는 캠페인을 진행 중인 아시아이주노동자회의(MFA)는 임금 체불을 임금 도둑질(wage theft)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앞서 사례를 든 임금체불은 인신매매와 사기에 준해서 처벌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 역시 캄보디아 A씨 사건을 사기죄로 보고 수사하고, 국가 인권위원회는 피해자를 속이거나 취약한 지위를 이용해 착취한 인신매매로 보고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반면 관할부서인 고용노동부만 가해자들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 구제에 소극적입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이 상황이 정상인지 물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임금체불은 범죄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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