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방사선도 너끈 '불사조' 곰벌레 비밀 밝혀져

치명적 방사선도 너끈 '불사조' 곰벌레 비밀 밝혀져

조홍섭 2016. 09. 22
조회수 18 추천수 0
지구 어디나 사는 '작은 거인', 물기 없으면 휴면 빠져 극한 상황 견뎌
사람 1000배 방사선 견디는 핵심은 디엔에이 둘러싸는 보호 단백질

Dr. William Miller, Flickr_Creative Commons license_s.jpg» 곰벌레의 전자현미경 사진. 갈고리가 달린 여덟개의 다리로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작은 무척추동물이지만 극한 환경에서 견디는 능력이 뛰어나다. Dr. William Miller, Flickr, Creative Commons

삼엽충이 바다 밑을 기어 다니던 고생대부터 지구에 살던 원시적인 무척추동물로 곰벌레가 있다. 길이가 0.5㎜ 정도로 저 배율 현미경으로도 보이는 이 느린 동물은 이끼나 연못 바닥 등 물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서식한다. 그러나 흔한 이 동물은 극한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숨죽이고 있다가 여건이 나아지면 살아나는 불사신 같은 동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제노바 대학 프란체스키 교수는 120년 전에 채집해 바싹 마른 이끼 표본에서 찾은 곰벌레에 물기를 뿌렸더니 다리 하나를 움직였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1948년에 했다. 그러나 부활의 증거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했다.

1-s2.0-S0011224015300134-gr1.jpg» 일본 연구진이 영하 20도에서 30년간 보관하다 휴면상태에서 깨운 남극 곰벌레. 뱃속에 먹은 초록색 클로렐라가 보인다. 쓰지모토 외(2016)

최근 메구무 쓰지모토 일본 극지연구소 연구원 등 일본 연구자들은 남극에 사는 곰벌레가 장기 휴면에서 깨어난 뒤 생식능력을 되찾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해 올해 초 과학저널 <저온생물학>에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1983년 11월 6일 일본 남극기지 근처에서 이끼와 함께 곰벌레 2마리와 알 1개를 채집해 영하 20도 상태로 보관했다.

꼭 30년 6개월이 되는 2014년 5월 7일 표본의 해동에 들어갔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라는 애칭의 이 곰벌레에 수분을 공급하고 15도를 유지한 지 하루 만에 곰벌레는 프란체스키 교수가 본 것처럼 다리 하나를 꼼지락거렸다.

마치 오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듯 매일 한 가지씩 늘리게 기능을 회복했다. 첫날 4번째 다리, 둘째 날은 세 번째 다리를 움직였고, 사흘째는 몸을 꼬았고 이튿날엔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침내 해동 13일째에 먹이로 준 식물플랑크톤인 클로렐라로 첫 식사를 했고 23일째에는 알을 낳았다. 다른 곰벌레 한 마리는 깨어난 뒤 알을 낳기 전에 죽었고, 30년 동안의 잠에서 깬 알에서도 어린 곰벌레가 깨어났다. 이들은 모두 번식에 성공해 장기 휴면 뒤에도 생식능력이 완벽하게 복원된다는 것을 보였다.

이 장기 휴면에 들어가기 전 체중의 85%를 차지하던 수분의 비중은 3%로 줄었다. 곰벌레는 이처럼 수분이 없는 곳에서는 거의 완전한 탈수 상태로 '건면'에 들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곰벌레는 극한의 추위, 더위, 압력, 방사선, 진공 등에 견디는 초능력을 발휘한다.


■ 곰벌레의 극한 능력

Eye of Science_Science Source_s.jpg» 이끼 속 곰벌레. 몸의 수분이 거의 모두 빠져나간 상태에선 '건면'에 빠지고 이때 극한의 내성이 발휘된다. Eye of Science, Science Source

갈고리가 달린 여덟개의 다리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동글동글한 몸매 때문에 초소형 곰처럼 보이는 곰벌레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산다. 지금까지 약 1150종이 히말라야 산맥 6000m 고도부터 해저 4000m까지, 적도에서 극지방까지 서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곰벌레가 극한 환경에서 견디는 사례를 <위키백과> 내용을 토대로 소개한다.

-극한 온도: 151도에서 수분, 영하 200도에서 수일 생존

-극한 압력: 2007년 유럽우주기구는 인공위성에 곰벌레 수천 마리를 우주 공간으로 데려갔다. 곰벌레들은 진공과 우주선에 10일 동안 고스란히 노출됐지만 생존했을 뿐 아니라 지구로 귀환한 뒤 번식에도 성공했다. 반대로 6000기압에서도 생존한 사례가 있는데, 이는 지구에서 가장 깊은 마리아나 해구보다 6배 가까운 수압이다.

-방사선: 곰벌레는 우주실험에서 보듯이 방사선에 잘 견딘다. 바싹 건조된 상태에서는 전리방사선이 반응을 일으킬 수분이 적어 해를 덜 입는다고 알려졌지만 수분이 있는 상태에서도 방사선을 잘 이긴다. 사람에게 5~10 그레이의 방사선은 치명적이지만 곰벌레는 수분이 있는 상태에서 그보다 1000배 강한 방사선을 쪼여야 죽는다.

곰벌레가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존 능력이 무엇 때문인지를 둘러싸고 그동안 논란이 계속됐다. 일본 연구자들이 그 비밀을 해명할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을 내놓았다.

타쿠마 하시모토 일본 도쿄대 생물학자 등 일본 과학자들은 20일 과학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실린 논문에서 방사선에 잘 견디는 특성을 지닌 곰벌레 종의 유전체를 규명해 분석한 결과 이 곰벌레가 합성하는 특유의 단백질이 유전자의 디엔에이를 담요처럼 감싸 방사선에 의해 손상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S TANAKA_H SAGARA_T KUNIEDA.jpg» 도쿄대 연구자들이 유전체를 규명한 방사선에 잘 견디는 곰벌레의 일종(Ramazzottius varieornatus). S TANAKA,H SAGARA,T KUNIEDA

논문의 교신저자인 다케가츠 쿠니에다는 이번 연구의 배경에 대해 “연구자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곰벌레의 강한 내성에 매료됐지만 어떻게 그런 내성을 갖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곰벌레가 그처럼 극한상태를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분자를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라고 도쿄대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연구자들은 이 곰벌레의 유전체에서 찾아낸 분자가 바로 ‘손상 억제 유전자’(Dsup)이다. 이 유전자를 배양한 사람 세포에 이식한 뒤 엑스선을 쪼였더니 그렇지 않은 배양세포에 견줘 세포 손상이 절반가량으로 줄었다. 게다가 손상 억제 유전자를 지닌 사람 배양세포는 방사선을 쪼인 뒤에도 증식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S TANAKA_H SAGARA_T KUNIEDA2.jpg» 도쿄대 연구팀이 실험한 곰벌레의 전자현미경 사진. S TANAKA,H SAGARA,T KUNIEDA

하시모토는 “지금까지 방사선에 견디려면 손상된 디엔에이를 복구하는 분자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손상 억제 유전자’는 상해를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디엔에이의 손상을 최소화하도록 작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보도자료에서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손상 억제 유전자는 방사선 피해를 막는 데 응용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이식용 피부 조각을 안전하게 운반하고 보관하는데 이 유전자가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비비시>는 보도했다. 연구자들은 지난해 이 유전자의 특허를 출원했다. 나아가 대기가 없어 방사선이 강한 화성 표면을 생명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미래 프로젝트에도 이런 유전자가 쓰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곰벌레의 손상 억제 유전자를 이식한 사람의 배양세포는 방사선에 대한 내성이 크게 늘었지만 여전히 곰벌레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이번에 발견된 손상 억제 유전자 말고 유전체 안에 있는 다른 요인들이 특별한 내성에 기여하는 것 같다.”라며 새로운 단백질을 발견하기 위한 후속 연구를 기대했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Megumu Tsujimoto et. al., Recovery and reproduction of an Antarctic tardigrade retrieved from a
moss sample frozen for over 30 years, Cryobiology, 72 (2016) 78-81.http://dx.doi.org/10.1016/j.cryobiol.2015.12.003

Takuma Hashimoto et. al., Extremotolerant tardigrade genome and improved
radiotolerance of human cultured cells by
tardigrade-unique protein, Nature Communications, 7:12808, DOI: 10.1038/ncomms12808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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