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출범 후 증세 논의에 시동이 걸렸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대기업 법인세 최고세율 구간 신설과 부유층 소득세율을 높이는 방안을 거론하고 나서면서다.
국정기획자문위가 내놓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가 나오면서 증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여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증세를 둘러싼 논쟁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대통령도 "증세의 방향과 범위를 확정해야 할 시기"라고 말하며 증세 공론화에 힘을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 "증세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
국정기획위는 지난 19일 100대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선 앞으로 5년간 178조원의 재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를 위해 세입 확충으로 82조6천억원을, 세출 절감으로 95조4천억원을 조달할 계획이다.
여기서 증세 논쟁을 촉발시킨 부분은 바로 세입 확충 방안이다. 국정기획위는 세입 확충의 73%가 넘는 60조5천억원은 초과세수로 충당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매년 세금이 더 걷힐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다.
이를 두고 재원 확충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여당 현직의원이기도 한 김부겸 행정자치부 장관은 다음 날인 20일 오전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재정당국에서 내놓은 재원조달방안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김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소득세 최고구간을 조정하겠다고 했고, 법인세율도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는데 (국정기획위가 내놓은 방안은) 너무 약한 것이 아니냐"며 "국민에게 우리 경제 현실을 정확히 알리고, 좀 더 나은 복지 등을 하려면 형편이 되는 쪽에서 소득세를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TV토론에서 "제 공약은 고소득자의 소득세와 고액상속세를 높인다는 것"이라며 "자본소득에 대한 세금과 법인세 실효세율을 높이고, 그래도 부족하면 법인세 명목세율까지 (증세로) 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국정기획위는 문재인 정부의 5년 청사진을 그리면서 증세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김 장관의 지적이다.
여당 대표도 나섰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같은 날 오후에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초대기업과 초고소득자에 대한 법인세 및 소득세 과세구간을 하나 더 신설하자고 제안했다.
추 대표는 "세입 부분과 관련 아무리 비과세 감면과 실효세율을 언급해도 한계가 있는 만큼, 법인세를 손대지 않으면 세입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며 소득 200억원 초과에서 2천억원 미만까지는 현행 법인세 22%를 유지하면서, 2천억원 초과 초대기업에 대해서는 과표를 신설해 25%로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추 대표는 "이렇게 법인세를 개편하면 2조9천300억원의 세수효과가 있고 이 돈으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중소자영업자 재정지원,4차산업혁명 기초기술지원 등을 통해 소득주도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추 대표는 또 "소득 재분배를 위한 고소득자에 대한 과세 강화 방안으로 현행 40%로 되어있는 5억원 초과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42%로 늘려야한다"고 말했다.
추 대표는 21일 열린 2차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도 "이것은 증세가 아니라,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정상화"라며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과표 500억 기준을 말씀하셨지만, 당은 2천억원으로 대상을 줄이는 방향으로 제안드린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마무리 발언에서 "원래 재원 대책 중에는 증세가 포함돼 있었지만 증세의 방향과 범위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제 확정해야 할 시기인데, 어제 소득세와 법인세 증세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해줬다"며 "대체로 어제 토론으로 방향은 잡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문 대통령은 "기획재정부에서 충분히 반영해서 방안들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며 "다만 증세를 하더라도, 대상은 초고소득층과 초대기업에 한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 중소기업들에게는 증세가 전혀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며 "중산층, 서민, 중소기업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전날 서면브리핑을 통해 "청와대는 당이 세제개편 방안을 건의해옴에 따라 민주당과 정부와 함께 관련 내용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정치권 논쟁 불붙나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증세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일단 여당은 추 대표의 제안에 공감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우윈식 원내대표는 같은 날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추 대표의 제안에 대해 "충분한 논의를 통해 사회적 동의를 거치면서 논의해야 되는 부분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 원내대표는 "(현재) 초대기업이나 초고소득자 중심으로 세금이 적다.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세금이) 줄였다"며 "이런 부분에 대해 정상화하는 논의를 이제 해야 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년 지방선거가 신경쓰이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초고소득자, 초대기업에 세금을 더 걷는 게 지방선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박했다. 우 원내대표는 "오히려 중소자영업자, 비정규직에 제대로 일한 만큼 대가를 줘서 내수가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이 사내유보금만 늘어나고 지나치게 대기업으로 몰려있지 않나"라며 "이걸 정상화시켜서 기업으로 일방적으로 쏠리고 있는 이 소득을 비정규직과 중소자영업자 보호하는 데 쓰고 국민의 생명과 삶을 지키는 부분에 좀 더 쓰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 원내대표는 "지금 한쪽으로만 몰린 돈을 이제 정부를 통해서 소득재분배하는 그런 모양을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부 국무위원들도 추 대표의 제안에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 원내대표는 "(전날 회의에서) 추 대표의 이야기하는데 딱히 반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보수야당은 반발했다. 자유한국당 이현재 정책위의장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무리한 공약을 위해 세금인상으로 국민의 부담을 전가시키는 증세는 신중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같은 당 정용기 원내수석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정부여당의 포퓰리즘을 위한 졸속 정책, 준비와 대책없는 증세 요구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바른정당 이종철 대변인은 논평에서 "우리는 정부 여당 일각에서 나오는 '부자 증세'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그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이 역시 합리적 증세 논의를 물타기하고 속내를 숨기려는 행태로 보이기 때문"이라며 "더 가진 사람이 더 내는 구조는 맞지만 어느 일방의 희생만 강요하는 식은 곤란하다. 지금은 정치권과 국민이 솔직하게 머리를 맞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증세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국민의당 이찬열 비상대책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회의에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보면, 재정투자를 줄이고 세입을 늘려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인데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우려스럽다"며 "재정지출 절감이나 비과세 감면제도 정비는 박근혜 정부에서 해오던 것으로 과연 문재인 정부와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증세 없는 복지는 이미 박근혜 정부에서 허구로 드러났다"며 "대통령께서는 국민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공약 과제 중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밝히고 특히 증세의 필요성에 대하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을 해야 된다고 본다"고 당부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전 대표는 이날 BBS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100대 국정과제가 발표됐을 때 제가 법인세 인상 등 부자증세를 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며 "당연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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