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인권위,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인권위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한다
박찬운  | 등록:2017-07-28 13:32:45 | 최종:2017-07-28 16:43:4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쓸모없는 인권위,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인권위의 전면적 개혁을 요구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내가 한 때 일했던 곳이다. 12년 전 인권위는 설립 5년째를 맞이해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각종 인권침해에 대해 조사활동을 벌려 진상을 밝히고 그 결과에 맞는 구제조치를 취했다. 인권 관련 법령 및 제도의 개선을 위한 정책권고가 줄을 이었다.
나는 인권정책국장으로서 인권위의 주요 인권정책 권고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면서 내손으로 직접 각종 권고문을 완성시켰다. 그 중엔 대한민국 최초의 인권종합정책인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차별금지법,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 등 인권위가 설립 이래 지금까지 자랑하는 인권정책 권고가 포함되어 있다. 나와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은 자신들이 작성하는 권고문 초안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데 밑거름이 될 거라는 자부심으로 밤을 새워 일을 했다. 내 인생 최고의 시절이었다.
2006년 가을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한 동안 인권위는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정책자문위원, 사회권전문위원, 국제인권전문위원 등 서 너 개의 직함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서 수시로 회의참석과 전문가 의견서를 작성해 보냈다. 그런 인권위를 나는 지난 8년 간 거들떠보지 않았다. 철저하게 담을 쌓고 살았다. 현병철 위원장의 6년과 이성호 위원장의 2년 시절이다. 이 기간 인권위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런 인권위를 위해 일할 마음이 없었다.
인권위는 이명박과 박근혜 두 정권을 지나오면서 우리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가끔 신문 귀퉁이에 인권위 뉴스가 올라오지만 그것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국민들도 이젠 높은 기대를 내려놓았고, 인권단체마저 관심을 끈 지 오래다. 권고대상기관인 정부의 다른 국가기관들이 인권위를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변해 버렸다. 인권위 권고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해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인권위의 기능복원을 약속했다. 과연 인권위는 이 새 정부에서 과거의 명예를 되살릴 수 있을까? 이명박도 박근혜도 물러났으니 국민들은 이제부터 출범 초기 인권위에 준 신뢰를 다시 줄 것인가?
그러나 이런 기대는 나로서는 무망하다. 인권위는 지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두 번의 정권은 인권위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벽하게 개조시켰다. 지금 인권위는 그저 그렇고 그런 관료조직 일뿐이다. 11명의 인권위원 중에 인권감수성이나 전문성을 말할 수 있는 위원이 도대체 몇 명인가? 200여명의 공무원으로 조직된 인권위 사무처에서 인권신장을 위해 밤잠을 설치는 영혼 있는 직원이 아직도 있기나 한 것인가? 인권위는 다른 국가기관처럼 똑 같이 관료화되어 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혹평에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무슨 증거로 그렇게 인권위를 비난하느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이런 말에 내가 증거로 답하리라. 최근 직접 경험했으니 내가 증인이다. 지난 봄 학기 대학원 인권법 강의를 하면서 인권위 기능을 토론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학생들에게 인권위가 최근 어떻게 인권침해 사건을 처리하는지 실증적 연구를 해볼 것을 제안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인권침해를 학생들이 직접 공익 진정을 해보도록 권했다. 물론 나도 거기에 참여할 거라고 선언했다. 인권위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단 한 번도 인권위에 인권침해 진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마음에 켕겼던 것이다.
이 강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매우 적절한 사건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5월 대선을 앞둔 며칠 전 가족과 함께 강원도 어느 콘도 리조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X 콘도 내에 있는 여자 사우나 시설이 문제였다. 아내와 딸이 목욕을 하고 와서 불평을 하는 것을 듣다보니 여자 사우나 시설이 남자 시설에 비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여탕이 남탕과는 달리 사우나 도크도 부족하고, 탕도 하나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동일 가격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여유롭게 이용하는 데 비해, 여자들은 불편하게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있고 차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에 돌아오자 인권위 사이트에 들어가 온라인 진정을 했다. 자수 제한 때문에 많은 말을 쓸 수 없어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차별사건으로 조사해 달라고 했다. 나는 진정을 낸 다음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인권위가 이 사건을 어떤 식으로 차별시정 해나가는지 지켜봅시다. 아마 이 정도 사건이면 인권위가 충분히 적절한 결론을 내지 않을까요? 당장 시설을 고칠 수 없다면 여성고객에겐 가격이라도 깎아주는 것으로 조정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진정을 낸지 두 달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담당자가 연락을 할 텐데... 왜 오지 않을까? 학기가 끝나도록 전화 한번 오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이틀 전 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000선생, 그동안 잘 있었습니까?”
“아, 교수님, 오랜만이시네요.”
“제가 오늘 이렇게 연락을 한 것은 그 진정사건 때문인데...”
“아, 그 사건 진정인이 교수님이세요? 그거 지난 10일 기각했는데요...”
한 마디로 황당한 답변이었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간신히 참고 전화를 끊은 뒤 호흡을 가다듬고 아래와 같은 메일을 작성했다. 그 메일 일부를 여기에 공개한다.
<메일 일부>
(아래 내용 중 < >부분은 메일에 없는 내용으로 이 글에서 설명하기 위해 가필한 것임)
...
이 사건처리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은 의문과 함께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담당자는 사건이 접수된 후 단 한 번도 진정인에게 연락해 진정 건과 관련된 진술(의견)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온라인으로 진정을 했기 때문에 자수 제한으로 진정인이 제대로 의견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인권위의 조사관은 당사자에게 연락해 그 진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경찰서에 고소장 내면 후일 담당 수사관은 고소인을 불러 고소인 진술조서를 받는다. 인권위 진정절차도 이와 유사하게 할 수밖에 없다.>
더욱, 피진정인의 진술서 등이 접수된 경우, 진정인에게 보내 주어 그에 관한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해야 할 텐데,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이게 과연 적절한 업무처리인지요?
<소송을 하다보면 원고가 소장을 내면 피고가 답변서를 제출한다. 그러면 법원은 답변서를 원고에 보내 그 주장에 대해 반론하라고 한다. 인권위 진정 과정에서도 보통 이런 절차가 진행되어야 한다.>
참고로 저는 혹시나 직접 전화를 하면, 전직 인권위 국장이란 경력 때문에 담당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염려해, 먼저 연락하지 않고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오길 바라고 있었습니다(물론 온라인 진정서 어디에도 제가 과거 인권위에서 일한 사람이란 것은 기재하지 않았음).
2. 담당자는 진정 대상 시설을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오로지 피진정인이 제공하는 자료에 의존해 사실관계를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실인정을 하는 게 인권위의 진정절차상 관행인지요? 법률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건은 당연히 조사관이 현장을 가봐야 한다. 과연 진정대로 시설에 남녀 간 차이가 있는지, 이용객의 차이가 있어 시설을 달리 설치한 게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3. 저는 이 사건 공익진정이 진정 당사자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종결 처분할 정도의 사건인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인권위에 제기되는 연간 2,500여 건의 차별진정 사건이 이런 식으로 처리되는 지 묻고 싶습니다.
<최근 인권위는 2,500여 건의 차별진정사건을 접수해 그 중 20%를 인용하고 나머지 80%는 기각 또는 각하하고 있다.>
......
인권위가 지금 이런 식으로 일하는 국가기관이다. 조사관은 자리에 앉아 상대방에게 연락해 그 쪽 이야기 듣는 것으로 조사절차를 완료한다. 조사의 원칙과 기본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안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런 황당한 조사가 진행된 채 보고서가 작성되어도 이것을 시정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 과장도 있고, 국장도 있지만 그들 눈엔 이런 문제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빨리 사건 떼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또 이런 보고서가 위원회(이건은 차별시정위원회)로 올라가면 제대로 된 인권위원들이라면 조사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금방 알아채야 하는데, 사무처에 대한 무한신뢰(?) 때문인지, 대부분 사건에선 사무처 의견대로 도장 찍어주기 바쁘다.
이런 인권위에 국민들이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이런 인권위가 헌법기구가 된들 우리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인권위가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선 방법이 없다. 설립 초기의 자세로 다시 인권위를 만든다는 마음으로 대수술을 단행해야 한다. 인권감수성과 전문성 넘치는 인권위원으로 인권위를 재구성하고, 전국의 인권현장을 발로 누비며 땀을 흘릴 수 있는 사명감 넘치는 직원들로 사무처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그것은 부분 리모델링이 아니라 전면 재건축이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 동참할 자신 없는 사람들은 인권위의 미래를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인권위는 영혼 없는 직원들이 월급이나 받을 곳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어떻게 만들어 놓은 인권위인가. 엄동설한 노숙하면서 싸워 쟁취한 독립기구다. 그런 인권위를 이렇게 쓸모없는 조직으로 놓아둔다? 나는 그리 할 수 없다.
박찬운 /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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