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38선 분단, 피할 수는 없었을까
▲ 소련의 스탈린(가운데) 수상이 군함을 순시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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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원인
한국전쟁은 자유-공산 양측에 150만여 명 전사자와 360만여 명 부상자를 낳았다.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이 문명 세상에 이산가족들은 아직도 자유롭게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비인륜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 3년 1개월 2일 17시간 동안 계속된 한국전쟁은 아마도 세계 전사(戰史)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더티(Dirty)한' 동족상잔의 잔혹한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다. 500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에 어찌 그 원인(原因)이 없겠는가. 그래서 이번 회에서는 그 원인(遠因)을, 다음 회에서는 근인(近因)을 살펴보고자 한다.
▲ 1945. 9. 2. 일본 도쿄만. 미 미조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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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북 길이는 약 1000km요, 동서 너비는 약 300km요, 면적은 약 22만 ㎢다. 그 모양은 마치 쇠불알 같기도, 고구마 같기도 하다. 지구의를 보면,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바다 쪽으로 좁다랗게 돌출한 지형으로 대륙과 해양을 이어주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곧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위치에서 서로 간 문물을 이어주는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대륙의 세력이 남하하는 통로로, 해양세력이 북상하는 길목이 됐다. 한반도 백성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겪어야 했다.
▲ 1945. 9. 9. 서울. 미군들이 중앙청 앞 시가지를 행진하자 연도의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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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해양 잇는 교두보, 한반도
13세기인 1274년 몽고, 곧 원(元)나라는 고려를 그들의 말발굽 아래 무릎 꿇린 다음, 제1차 일본 원정에 이어 1281년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다. 당시 고려는 원의 일본 원정으로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휩싸여 막대한 물적·인적 피해를 입었다.
그로부터 두 세기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고자 길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명은 형제지국 이상으로 섬기는 관계로, 외교 관계상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일본군이 한반도를 '게다짝'(나막신을 낮잡아 부르는 말)으로 짓밟고 지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이 이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조선 침략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1853년 개항 후 서양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지난날 자신들에게 문물을 전수해준 이웃 조선을 가장 먼저 강탈하고자 덤벼들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1894년 조선 침략에 앞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에 러시아가 간섭하고 나서자 다시 러일전쟁(1904)을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두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한반도를 꿀꺽 삼켜버렸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해 만주국을 세운 뒤 점차 중국대륙마저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도우며 견제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에 이들 두 나라와도 선전포고해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주축으로 하는 진영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진영의 대립 구도를 낳았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세기 후인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명(明)나라를 정벌하러 가고자 길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과 명은 형제지국 이상으로 섬기는 관계로, 외교 관계상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은 일본군이 한반도를 '게다짝'(나막신을 낮잡아 부르는 말)으로 짓밟고 지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이 이를 트집 잡아 조선을 침략했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었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조선 침략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1853년 개항 후 서양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뤘다. 그러자 지난날 자신들에게 문물을 전수해준 이웃 조선을 가장 먼저 강탈하고자 덤벼들었다. 그러기 위해 일본은 1894년 조선 침략에 앞서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이에 러시아가 간섭하고 나서자 다시 러일전쟁(1904)을 일으켜 승리를 거뒀다. 두 전쟁이 끝난 이후 그들은 한반도를 꿀꺽 삼켜버렸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해 만주국을 세운 뒤 점차 중국대륙마저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도우며 견제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에 이들 두 나라와도 선전포고해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주축으로 하는 진영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국 진영의 대립 구도를 낳았다. 1945년 2월에는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 앉아있는 미군대표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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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아베 조선총독(가운데)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에서 미 진주군 앞에서 항복 선언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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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
그때 연합국의 지도자인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세 거두는 크림반도 얄타에서 독일의 최종 패배와 그 점령지를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개최했다. 그때 일본의 최후 항전에 고전하고 있던 미국의 루스벨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독일 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이에 스탈린이 호응하자 연합국은 그 대가로 소련에 1904년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하고, 또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등의 협정을 맺었다.
이에 소련은 그 협정에 따라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이로써 소련은 1945년 8월 12일 조선의 북부 해안에 상륙하게 됐다.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지 닷새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소련은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북을 할양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1945년 8월 14일 밤,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느닷없이 한반도 38도선 분할 제의 전문을 받은 것.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전대미문의 원자탄 위력에 놀란 나머지 이 제안을 앞뒤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한다.
당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가운데 인적·물적 희생이 가장 컸던 나라로, 그 보상에 대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나라였다. 그런 소련은 한반도 전체가 아닌, 38도선 이북만을 분할받은 지 한참 지난 뒤에야 자신들의 보상이 매우 적었음을 깨닫고 절치부심했다.
더욱이 한반도는 러시아가 이전부터 무척 탐냈던 부동항(不凍港)이 즐비한, 그들로서는 몽매에도 그리던 축복의 땅이 아닌가. 그래서 지난날 자신들보다 덩치가 한참 작은 일본과 한판 벌이다가 패배해 망신당하고, 일본의 조선 병탄을 멀뚱히 구경만 했다. 그들에게는 뼈아픈 전력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이런 날을 대비해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던 극동군 88여단 소속 항일연군 출신의 젊은 김일성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하여 언젠가 때가 되면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판도에 넣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 북위 38도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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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선, 북위 38도
역사에서 가정은 쓸데없는 공론이다. 만약 미국이 원자탄을 1개월 전 먼저 일본 열도에 떨어트려 일본의 패망이 한 달 앞서 발생했다면, 그때 소련은 대일전 참전 이전이기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 38선 이북을 소련에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한반도를 통째로 점령한 한두 달 뒤에 일본이 패망했다면, 한반도는 그대로 소련의 몫이 됐을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1945년 8월 15일, 그 시점에서 한반도의 38선 분단은 피할 수 없었던, 국제 강대국간의 땅따먹기 거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8선 분단은 당시 나약했던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치욕스러운 결정으로 두고두고 단장의 선이 됐다.
그날 이후 현재까지도 그 분단은 겨레의 큰 아픔으로 지속되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그 분단으로 촉발된 한국전쟁 발발 직접적 원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 이 기사에 실린 사진들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및 맥아더기념관에서 직접 검색하여 수집한 것으로 스캔한 원본대로 게재합니다.)
▲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미군 측 카메라맨들이 촬영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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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열린 일본항복 조인식을 일본 측 카메라맨이 역사적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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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역 광장에 입성한 미군이 장갑차 위에서 환영 인파에 답례로 손을 흔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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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9. 서울. 서울에 들어온 미군이 일본군 담뱃불을 빌려 불을 붙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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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16. 한 미군이 “한국인은 미군을 환영한다”는 게시판을 바라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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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28. 인천. 30년 전, 미국인 기술자의 손으로 건설한 인천항 도크에 미군 군함이 들어오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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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9. 인천. 연합군 환영아치 앞에서 미 해군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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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 10. 28. 서울. 서울에 진주한 미군들이 시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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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미국의 오판, 북한군 탱크에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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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31. 원산. 헐벗고 굶주렸지만 웃음은 떠나지 않는 아이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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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9. 한 지아비가 시각장애인 아내를 지게에 진 채 피란길을 떠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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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서울 은평. 한 소녀가 동생을 돌보며 불타버린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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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2.19. 전란 중이지만 설빔을 차려 입은 천진난만한 소녀들이 민속놀이의 하나인 널뛰기를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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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10. 옹진전투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한 국군 특무상사가 목발을 짚은 채 침통한 표정으로 철조망 앞에 서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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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저서. 왼쪽부터 <카사, 그리고 나>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약속> <항일유적답사기>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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