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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수의 대부'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이 팔순에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지난 11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조천현] |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이런 분들은 정말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최근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양심수의 대부’ 권오헌(81)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지난 11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끝내 ‘이름 없는 후원자’들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권오헌 명예회장은 양심수를 뒷바라지하며 팔순을 넘겼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직을 내려놓고 명예회장으로 한발짝 물러났지만 여전히 현장 곳곳을 누비다 덜컥 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내가 몸에 이상증상을 느낀 것은 거의 석 달이 다 되지만 의료기관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5일”이라며 “병원에서 (폐암) 4기라는 것은 이미 폐를 지나서 다른 장기나 부위로 옮겨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이럴 때는 수술이 불가능하고 약물치료 내지는 주사치료 밖에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11년전 고희(古稀) 기념 인터뷰 당시에도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정년은 없다”고 말한 바 있는 그는 “그냥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에서는 움직이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은 내가면서, 투병도 하고 또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가게 되면 갈 거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실제로 폐암 판정을 받은 다음날인 7월 6일 ‘민가협 목요집회’에서 그는 “물론 자연에 거슬러서 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특히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팔순을 맞은 지난해부터 기존 기고글들을 모아 두 권의 책을 준비 중인 그는 “하나는 자주통일과 관련된 부분,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인권, 양심수 관련 문제”라며 “약간의 욕심이지만 최근에 서둘러서 하고 있다”고 변화된 심경의 일단을 내비쳤다.
그러나 정작 인터뷰 자리가 잡히자 지난 일들 가운데 묵혀뒀던 특별한 이야기거리를 기대했던 기자의 바람이 무색하게 그의 관심은 온통 통일 정세와 양심수 문제로만 내달렸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다음날부터 ‘사회적 존재감’에 눈뜨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농촌 새마을운동의 원조격인 4H 활동을 통해 청소년 사회운동을 했고, 3년간 군대생활을 하고, 다시 3년간 농촌사회운동에 매진한 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부터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참여, 1968년 통일사회당 입당,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다.
출옥후 양심수와 양심수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정년 없는 양심수의 대부 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는 북에서 내려온 이름모를 피난민부터 <자본론>을 건네준 한영고교 교감, 통일사회당 입당 계기를 마련해준 박금서 성신여대 교수, 당대의 선각자들인 함석헌, 장준하 선생, 3개월 동안 자신의 집에서 동거한 남민전 책임자 이재문 선생까지 숱한 인연을 언급했다.
또한 두 달이 넘도록 가슴앓이만 했던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만난 북 처녀, “정말 동지이고 스승이고 누님이고 어버이고 나를 키워준 유일한 분”인 ‘작은 누님’에 대한 각별한 마음도 풀어놓았다.
그러나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했지만 “언젠가는 밝히겠”다고만 넘어갔다. 특별히 “민가협 어머님들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며 “어머니들의 소원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석방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9월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되는 과정을 긴밀하게 도운 그는 “열일곱 분인가 남아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여러 가지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다”며 “선생님들, 부디 건강하시고 선생님들 생전에 선생님들 평생 염원이 반드시 이뤄지길 간절히 빌겠다”고 안부를 전했다.
아울러 ‘강제 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며 2차 송환을 요구한 33명 중 생존해 있는 15명의 조속한 송환도 촉구했다.
속아서 강제로 끌려왔다는 탈북민 김련희 씨와 중국 식당에서 일하다 지배인을 따라 단체로 입국한 뒤 본인들의 귀순의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12명의 여종업원에 대해 송환운동을 해온 그는 “문명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현대판 노예, 야만행위” 등 강도 높게 비판하고 조속한 송환을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에 대해서는 “미국에 대해서 할말 하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미국에게 오히려 제재와 압박, 그리고 적대정책을 폐기함으로써 해결하는 순서를 밟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세와 협의한다거나 허락을 받아서 할 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떳떳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남북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현재 남북 간에 얽혀있는 것을 완전히 풀어야 된다”는 것.
또한 “핵.미사일 문제는 어차피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 때문에 나온 것”이라며 “외세의 침략을 막는 방어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둘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대북 ‘세컨더리 보이콧’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밝힌 강경화 외교장관에 대해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평생을 양심수 후원활동에 전념해온 그는 “양심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양심수 석방 문제는 ‘그 사람들이 바로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6.15민족공동행사가 평양에서 개최될 경우 방북하기 위해 병원 측의 입원 권유조차 보류한 채 기다렸다는 그는 6.15공동행사가 무산된데 이어 8.15민족공동행사마저 무산으로 흐르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인터뷰 내내 꼿꼿함을 잃지 않은 그는 이후에도 <통일뉴스> ‘최다 출연자’답게 6.15남측위원회가 주최한 7.27 정전협정일 기자회견이나 최근 남민전 장기수 박석률 전 민자통 의장의 추모식에서도 항상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지난 11월 서울 마포 한 오피스텔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조천현 작가가 영상과 사진 촬영을 맡았다.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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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흐트러짐 없이 인터뷰에 응했고, 현 정세와 양심수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진 - 조천현] |
□ 통일뉴스 : 갑자기 건강이 안 좋다는 사실을 목요집회에서 공개했다. 먼저 그 내용부터 알려 달라.
■ 권오헌 명예회장 : 내가 몸에 이상증상을 느낀 것은 거의 석 달이 다 되지만 의료기관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5일이었다. 서울대학병원 호흡기내과에서 CT촬영이나 조직검사, 여러 검사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폐암 4기라는 판정을 받았다.
앞으로 2주 동안에 걸친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7월 19일에 다시 병원에 가서 아마 첫 치료를 할 것 같다.
□ 폐암이 4기라면 오래되고 진전된 상태 같다. 몸에 이상을 자각했다지만 갑작스럽고 당황스럽겠다.
■ 문헌상으로 보니까 폐암은 증상을 알았을 때는 많이 발전된다고 한다. 나도 4기라는 얘기에는 좀 놀랐다.
실제로 왼쪽 폐에 있는 부위는 자그마한 거였다. 덩어리가 작아서 그렇게 심한 건 아니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리고 기침 나오는 것 외에는 통증이나 호흡 곤란이나 다른 부위에 대한 통증은 아직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4기라는 것은 이미 폐를 지나서 다른 장기나 부위로 옮겨졌을 때를 이야기 한다. 이럴 때는 수술이 불가능하고 약물치료 내지는 주사치료 밖에 없다고 한다.
□ 오랫동안 사회운동을 해왔고, 고령에 비해 활동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거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는데, 4기가 되도록 어떻게 그렇게 계속 활동을 해왔는지 믿기지 않는다.
■ 그래서 내가 목요집회에서도 얘기한 바 있다. “물론 자연에 거슬러서 살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특히 조국통일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병마도 이겨내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가장 존경하는 민가협 어머니들,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비전향장기수 여러분들, 목요집회에 항상 나오는 사회단체 여러분들에 대한 내 개인의 애정이고 또 그분들과의 동지적 연대감이다. 또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서 함께했다는 측면에서 서로에게 힘을 주자는 의미를 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어디 요양하러 간다거나 이런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에서는 움직이면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은 내가면서, 투병도 하고 또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가게 되면 갈 거다.
사실 너무 오래 살았다. 원래 내가 몸이 약했고, 위가 약해서 60을 넘겨 살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80을 넘겼기 때문에 다른 욕심은 없다. 그래서 내가 활동하는 한은 종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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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두 권의 책 출간을 서두르고 있다. [사진 - 조천현] |
□ 2006년 선생의 고희를 맞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벌써 11년이 흘렀고,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한발짝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똑같이 활동해 온 것 같다. 좀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후배들의 바람도 있었는데, 계속 일선 활동에 전념한 이유는?
■ 그 때도 인터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양심수후원회 회장의 임기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정년은 없다.
사실 어떤 직책을 맡고 안 맡는 것과는 관계없이 통일문제나 민주화문제, 특히 늘 만나야하는 양심수 가족들과의 생활, 이것은 임기를 떠나서 그냥 ‘내 생활의 일부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을 가장 자긍심을 가지고 보람있게 생각할 뿐이지 고통이라고 생각한 일이 없다.
그래서 사실은 명예회장이 된 이후에도 일상활동은 거의 변함없이 했다. 그리고 회장의 자리를 침범한다거나 이런 개념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개인 권오헌이 우리 민족문제나 민주화문제나 양심수에 대한 생각에 따라 활동은 변함없이 했다.
□ 고희 때 책을 낸 적이 있는데, 팔순에는 계획이 없었나? 고희 때 자서전을 내고 싶다고 말했는데 진척이 있나?
■ 자서전이라는 것은 나이가 들고 했을 때 얘기가 나와야 된다.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웠지만 80 가까워지니까 지나간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그런 생각이 안 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계획된 바가 없었고, 다만 그동안 썼던 글들, 주로 후원회 소식지에 썼던 글인데 ‘이것을 엮어내는 것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했다.
그전 70때에는 한겨레신문이나 대학신문에 쓴 것이 많았다. 이번에는 주로 통일뉴스에 기고형식으로, 사월혁명보라든가 민중의소리, 자주시보 이런 언론사에 썼던 글들이다. 후원회 소식지에도 실었던 글들인데, 이것을 엮어내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특히 양심수후원회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 음력으로 치면 80인 작년에 책을 내면서 팔순잔치도 하자고 했는데 내가 일이 바빠서 정리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아무 것도 않는 것 같아도 굉장히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정리를 시작한 것이 올 초부터였고, 올 초 내 조카가 그걸 정리했다. 그러다가 내가 몸이 안 좋게 돼서 기왕에 하려면 서두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글모음을 정리하고 있다.
다른 글들은 제외시키고 주로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가령 자주통일이라든가 평화, 전쟁반대, 인권, 민주주의, 양심수, 국가보안법, 민중생존권 이런 부분에 있어서의 내 마음 속에 생각을 거쳐서 나온 것이 우리 주장이었다.
그래서 우리 주장만을 그것도 다가 아니라 추려서 두 권으로 모아냈다. 하나는 자주통일과 관련된 부분,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와 인권, 양심수 관련 문제, 이렇게 나눠서 정리하고 있다. 약간의 욕심이지만 최근에 서둘러서 하고 있다.
“개인사라기 보다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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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5산악회 회장이 맡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은 얼마 전까지도 산행을 함께했다. 하늘색 조끼는 6.15산악회 단체복이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현대사를 깊숙이 체험하며 살아왔는데, 자서전 계획은?
■ 마음속으로는 좀 갖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것이 그냥 개인사라기 보다는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철이 들고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이 해방 다음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작은 아버님이 “일본이 망했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서 장롱 속에 깊숙이 놔뒀던 지금으로 치면 한글교본을 주면서 “오늘부터 이 공부를 해라. 왜놈 글은 이제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바로 그날 면사무소와 학교를 가보니까 학교 신사가 불타고 일본 교장선생이 아래만 가리고 발가벗긴 채 “나니모 나이, 나니모 나이(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봤다.
그때 청년들이 왜놈들로부터 그 압박과 설움을 받았는데 “이제 우리 독립을 했다. 우리는 독립국가다”고 외치던 것이 쟁쟁하다.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사회적 존재감을 갖게 된 거다.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던 해방공간의 여러 일들이 있다. 그것이 청년운동이기도 했지만 좌익운동이기도 했고, 지금으로 보면 자주통일운동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동네사람 70여명이 한꺼번에 잡혀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심각한 우리 이념대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사회적 존재감이 내가 어머니 아버님 일찍 돌아가시고 사회적으로는 아주 격변시대였고, 전쟁을 겪었다. 어려운 시대를 지내면서, 그럴수록 왜 그렇게 책을 보고싶어 했는지. 사회적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이것이 움터서 나중에 이런 사회활동 하는 토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3년간 4H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 사회운동을 했고, 3년동안 군대생활 했고, 제대 후 3년간 농촌사회운동을 했고, 이때부터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회운동이었다.
64년부터 한일회담 반대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된다. 68년 통일사회당 입당, 그 뒤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이렇게 해서 감옥살고 나와서, 양심수 문제와 통일 문제 관련해서 사회활동하고 이렇게 한생을 보냈다.
이것이 그냥 소박한 개인사라기 보다는 우리사회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이런 것도 하나 기록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지금까지 공개하지 못하고 묻어뒀던 이야기가 있다면 한두 가지 말해 달라.
■ 이상하게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혼자 생활이 아니라 동네 사랑방에서 생활했고, 또 4H 그룹이라는 이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래서 개인생활이 없었다.
한 가지 이야기한다면 64년에 농촌사회운동 3년을 하다가 농촌을 떠나서 충청북도 단양에 한일시멘트공장 짓는 현장에 갔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조그만 천막을 치고 수천명이 모여서 하루 일을 하는 거다.
새벽 3시쯤이나 일어나 줄을 서야 되는 거다. 삽이나 곡괭이 같은 공구를 받아야 일하는 거다. 그때 나한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사람들 삶이 이렇게 절박하고 일이라는 게 단순한 게 아니라 생존권이라는 게 이렇게 절박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북에서 피난왔다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한 걸 기억한다. “회사에서는 나한테 공구를 안 줬지만 나한테 임금을 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으니까. 나는 집도 없고 잘 곳도 없어서 여기서 하루 일을 해야만 사는 사람이다.”
여기서 회사는 사회,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나를 살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국가나 사회는 특정 개인을 떠나 사람들에 대한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된다. 그분은 전혀 지식인도 아니고 그냥 떠돌이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다.
□ 1964년이면 한일협정이 사회적 이슈가 됐던 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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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권오헌 명예회장. 64년께부터 서울에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64년 그해가 굉장히 무더웠다. 한일회담 때문에 서울이 아주 부산했다. 현장 모르게 서울에 올라와서 광화문네거리에서 데모 속에 들어갔다가 종로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는데, 만일 그날 못 내려가면 아주 큰일 날 일이었다. 어떻게 용케 빠져 나가서 내려가면 현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9월에 서울에 올라왔는데 처음 만난 사람이 함석헌, 장준하 이런 분들이었다. 나는 그때 진보라든가 이런 것보다 그 분들의 한일회담 반대 활동이나 <사상계> 글을 통해서 지식인으로서 평가했던 것이다.
사실 사상계를 본 것이 사상계가 창간된 다음해인 54년쯤 될 거다. 시골에 있으면서 그때는 한자도 잘 모르던 땐데 사상계를 봤다. 진보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책자 <중앙정치>도 전부 한자였다. 평화통일론을 접한 거다.
그런 걸 열심히 볼 정도로 많은 책을 통해서 속을 채우긴 했다. 그래서 함석헌, 장준하 선생을 만나서 생각의 차이나 대화에 있어서의 어려움은 느끼지 않고 지냈다.
서울에서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보면서 많은 토론회를 거의 다 갔고, 그것이 하나의 나의 학습장, 교정이었다.
65년인지 67년에 졸업하고 10여년이 지나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을 만났다. 전쟁시기에 부역을 했다해서 우리학교에서 쫓겨나 서울에 와서 어느 대학 사학과를 나와 고등학교에 있다고 듣고 수소문해 만났다.
왕십리 근처 한영고등학교 교감 선생으로 있더라. 그 교감 선생을 만난 것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됐다. 그분이 나한테 <자본론> 1,2,3권을 준 분이다. 해방공간에서 처음으로 <자본론> 3권이 나왔는데, “이건 자네나 봐야할 거네. 나는 이제 못 보겠고”라고 줬다.
얼마나 어렵나. 그걸 수십 번 읽곤 했다. 다른 비판적 막시즘이나 보다가 그걸 보니까 아주 논리정연하고 내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뒤로 통일사회당도 들어가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내 전부는 아니었다.
□ 남민전이나 비전향장기수 관련해서 비화나 공개 못할 이야기도 많았을 텐데, 의미가 있는데 안 알려져 있거나 이번 기회에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 이재문 선생이 우리집에 3개월 있었던 것은 공개한 바 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있다. 지금 어떤 것을 특정하지는 못 하겠다. 정리를 쭉 해놓고 봐야 어떤 것이 중요했던지 알 것 같다.
□ 혹시 남로당이나 조선로동당에서 당원 가입을 권유받거나 가입하지 않았나?
■ 남로당 당시에는 소년이었고, 남민전 사건은 전선이었고, 전혀 그런 건 없었다. 통일사회당에 들어간 것이 유일하게 당에 들어간 거다.
통일사회당에 입당한 것도 독특한 이야기다. 박금서 성신여대 교수가 박정희 쿠데타 세력한테 밀려나서 현장에 쫒겨나와 나하고 현장에서 만난 거다.
그때 입석이라고 충북시멘트공장 짓는 현장인데, 거기서 보니까 아무래도 비슷한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지 않나. 모든 것이 너무 찰떡궁합이었다. “미스터 권, 정치 한번 해보지 않을래?” 그래서 김철 씨를 소개해줘서 통일사회당 가게 된 거다.
그 사람 아주 참 재밌었다. 그 뒤로 나와는 절친했고, 그 사람 이야기만 해도 참 많다.
□ 혼자 독신으로 사시는데 연애는 안 했나?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후원자가 따로 있었나? 독자들도 궁금해 할 것 같다.
■ 사람들이 자꾸 묻는다. 간간이 이야기 한 적은 있다.
군대생활 할 때 화진포에 추경명이라고 통역장교가 관리소장으로 가고 내가 위생병으로서 장병들 건강 관리하러 갔다. 바로 거기가 휴전선 바로 아래인데 휴전 전에는 이북 땅이다. 지금도 거기 가면 가슴이 좀 뛴다.
그때 우연히 북의 처녀를 만났다. 지금으로 치면 포장마차처럼 돼 있는 집에 들어가서 술을 한잔하게 됐는데, 먼저 와 있는 장병들과 우리하고 맞닿았다. 다들 팬티만 입고 있어 누가 장교인지 모르는 거다. 서로 싸움 날 뻔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 고향 사람이고 훈련소에 같이 입대해 그 사람은 3소대 서무계였고 나는 1소대 서무계였다. 그래서 쌈이 날 듯 하다가 화기애애해져서 노래 부르고 그랬다.
그런데 포장마차에 묘령의 너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나나 추경명 장교나 다툴 뻔 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 다음날 또 간 거다. 그런데 그 여인이 가버렸다.
그것이 정말 두 달 이상 가더라.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 회원들은 화진포만 가면 거기 가보자 한다.
우리 작은 누님은 정말 동지이고 스승이고 누님이고 어버이고 나를 키워준 유일한 분이었다. 누님이 건강이 안 좋을 때 화진포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보낸 적이 있다.
□ 개인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양심수 후원하는 일은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됐을 텐데.
■ 내가 토목공사장 현장에서 일했고, 장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걸 하면서 일종의 내 퇴직금 겸해서 내가 장비를 사서 동업을 했다. 그것이 바로 남민전 사건 터지던 해인가 그 전해다.
사실상 사업도 해보지도 못하고 감옥 갔다 왔는데, 나오니까 장비 값이 뚝 떨어지고 장비가 고장만 나고 엉망이 됐더라. 그래서 그것을 동업자가 팔고, 나하고 다 정리가 됐다. 그래서 누님이 그 당시에 800만원을 가지고 있더라.
그래서 그 돈하고 좀 보태서 불도저를 하나 사서 기사하고 동업했다. 역시 기사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또다시 돈 하나도 없이 대우에서 나온 0.2입방미터라는 뜻인데 ‘공투’ 포크레인을 할부금으로 샀다. 그것도 기사한테 전적으로 맡기고 나는 내 나름대로 활동했다.
그때는은 남민전 석방운동과 민가협 장기수가족협의회 활동을 할 때다. 결국은 두 가지가 다 잘 안 됐다. 89년에 다 처분했다. 기사들 생활은 됐지만 나한테 큰 생활인 안 된 거다.
내가 크게 돈 쓸 게 없고 나름대로 강남에 12평짜리 집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생활했던 거다. 처분한 것 가지고 생활하다 2001년에 그 12평 아파트가 재건축됐고 그때 나는 팔았다.
당시 오진으로 암진단을 받고 죽으면 안 되니까 주는 대로 받고 다 정리하고 지금 수유리에 9평짜리 집을 샀던 거다. 그리고 얼마 남은 걸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도움 주신 분이 있다. 얼마 후에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 될 거다. 그것이 내 생활 전부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양심수후원회는 특정한 후원자 한 분이 계신다. 그리고 인혁당재건위 분들이 보상이 나오니까 그 중에 몇 분이 개인적으로 후원해줬다. 내가 민주화운동 공헌자로 돼서 생활지원금이라고 4,800만원인가 받았다. 그것이 전부다.
이제까지 다른 후원을 받거나 어떤 대우를 받아가면서 생활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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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1130여 회째 열리고 있는 '민가협 목요집회' 여는말 고정 발언자였다. 사진은 문재인 정부 들어 첫 목요일인 5월 11일, 1122회차 목요집회에서 여는말을 하고 있는 권오헌 명예회장. 새 정부에서도 여전히 양심수 석방을 외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실제로 많은 양심수들이 석방되고 비전향장기수 송환되고, 했지만 여전히 목요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실제 양심수 현황은 어떻게 되나?
■ 지금 양심수가 그전처럼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다. 87년 6월항쟁 때만 해도 천명 이상이 됐고 가장 많은 때는 1989년 1,700명까지 이르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50명 안팎인데 많은 숫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더 엄밀히 따지면,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로 구속된 사람까지 치면 500명이 넘는다. 그 사람들을 제외하면 지금 40~50명 내외라 볼 수 있다.
□ 오랫동안 양심수 석방, 후원 활동을 해왔다. 지금 양심수 문제나 국가보안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 독재국가 특히 군부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의 양심수와 그래도 이른바 문민정부, 특히 오늘 촛불시민에 의한 새로운 정부 하에서 양심수는 다르다. 오늘 문재인 정부 하에서 양심수가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양심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구속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수 석방 문제는 ‘그 사람들이 바로 양심수이기 때문에 석방된다’는 것이다.
그럼 양심수는 어떤 사람들이냐.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양심에 따른 활동으로 인해 구속된 사람이다. 또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 공동선을 위해서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다. 또 하나는 자기 활동이 불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정당했기에 확신을 가지고 활동하다 구속된 사람이다.
이런 양심수, 확신수는 단 한사람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고 이런 양심수를 잡아 가둔다는 것은 반문명적인 야만행위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는 양심수와 국가보안법이 연관돼 있다. 지금 국가보안법 관련 양심수는 몇 명이나 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 지금 양심수 절반 이상이 국가보안법 관련 양심수들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과 코리아연대 사건으로 자주통일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들이다. 또 인터넷 상에 통일관련 의견을 개진했던 이른바 ‘인터넷 논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가 무죄고 지하혁명조직 RO가 없는 걸로 판명됐음에도 불구하고 9년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완전히 정치보복이고 이건 야만시대의 행태나 다름없다고 본다.
그 다음에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상징적으로 되고 있다. 다 알다시피 2015년 민중총궐기 때 민중들의 요구를 짓밟고 살인진압하고 한상균 위원장을 잡아 가뒀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같이 잡혀갔다.
그 외에도 직장에서 정리해고 됐거나 직장폐쇄 됐거나 비정규직으로 노동3권 보장 투쟁을 하다 구속된 노동자들이 있다. 다 사회 공익을 위해 활동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노점상이 두 사람 있는데, 도시빈민으로서 노점상 철거에 반대하다 구속된 사람들이다.
또 종교적 신념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구속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 이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를 꼭 구속만 하느냐. 만약 이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면 재판을 통해서 잘잘못을 법정에서 가릴 수는 있다.
유엔의 자유권규약위원회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한국의 양심수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제언을 했다. 이것은 사상양심의 자유 침해, 또 결사의 침해,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석방하라 했다.
그런 이야기 전에, 천만 촛불의 힘이 있지 않나. 혁명적 발상으로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서 석방을 해야 한다. 이번 8.15광복절에는 양심수가 한 사람도 없고, 정치수배자도 없어져야 한다. 민주노총 사무총장 같은 경우가 정치수배자로 몰려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석방은 됐지만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 대한 사면복권이 반드시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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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북민 김련희 씨 문제나 12명의 여종업원 문제로 주제가 옮겨가자 권오헌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해졌다. [사진 - 조천현] |
□ 특별하게 최근에 이슈가 된 탈북민 김련희 씨와 12명 여종업원에 대한 입장은?
■ 가장 중요한 인권문제로서 김련희 평양주민이 속아서 강제로 끌려와서 현재 사실상 억류상태에 있다. 이것은 문명사회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김련희 평양주민은 오는 과정에서도 눈치채고 “나는 안 가겠다. 나는 돌아가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권을 뺐기고 강제로 끌려왔다. 오자마자 국정원에서도 그 이야기를 되풀이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현재 6년이 되도록 여기 억류된 거나 다름없다.
이게 냉전시대라면 몰라도, 지금 꼭 이렇게 해야 되나. 김련희 씨는 빨리 가족 품으로, 자기 조국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 해외식당 종업원 12명은 정부에서는 남한사회를 동경해서 왔다고 했지만 사실상 본인들이 어떻게 왔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일체 않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이나 처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식당 지배인이 <한겨레>에 이야기했고, 또 민변에 찾아와서도 이야기했는데, 남한사회를 동경해서 온 게 아니라 돈을 많이 벌어 가려고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정부 당국에서 발표한 것이 거짓말인 거다.
이들이 만약에 자유의사로 왔다면 떳떳하게 이야기하면 누가 뭐라 하겠나. 부모 자식 간이라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그런데 본인들이 일체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부모들이 북쪽에서 면회라도 한번 해달라고 했고, 또 변호사들이 면회요청을 했지만 안 들어주고 있다.
또 인신보호구제신청을 통해 법정에 나와서 구제하려 했어도 법정에도 못 나오게 한다. 국가인권기구라든가 유엔인권기구 대표들이라든가 우리는 인정 않는 기구이지만 이른바 북한인권사무소, 이들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거야 말로 현대판 노예, 야만행위다. 더군다나 국정원 직원이 돈을 줘서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국가기관이 개입된 납치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
박근혜 남북대결 시대라면 그런 못된 짓도 늘 했겠지만, 이제는 문재인 시대 아니냐. 국정원의 과거 잘못을 다시 밝힌다고 한다. 국정원은 억울하게 끌려온 북 주민들을 빨리 돌려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산가족 문제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 2차 송환을 요구하는 비전향장기수도 있고, 연세가 많아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2000년 9월 2일 북으로 송환됐던 분들의 근황도 궁금하다.
■ 다들 아다시피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북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인 2001년 2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33명이 2차 송환을 희망했다.
1차 송환 때는 이른바 ‘전향’을 했다고 해서 안 간 측면도 하나 있었다. 그런데 ‘강제 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거다. 실제로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라고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인정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분들이 자기 조국을 배신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신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2차 송환 희망자 33명 중 정순택 선생은 세상을 떠나 시신을 송환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시신 송환’이라는 용어를 썼다.
리인모 선생이나 63명이 송환될 적에도 ‘송환’이라는 말을 않고 북한주민접촉신청서를 갖고 갔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정부에서도 송환이라는 말을 썼고, 송환이라는 말은 당연히 가야된다는 걸 내포하고 있다. 당연히 가야할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은 고향이 거의 다 북쪽이다. 처음부터 전향 대상자도 아닌 전쟁포로들도 있다. 세월이 17년이나 지나다 보니까 지금 15명도 안 남았다. 이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신념의 고향, 자기 조국이기도 한 고향으로 빨리 보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들은 아직도 보안관찰법에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다.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이들이 빨리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들이야 다 잃었겠지만 혹시라도 처가 남아있거나 자식들이 있다면 그 혈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 논란이 됐던 북한인권법 제정에 대한 입장은?
■ 북한인권법은 사실 미국에서 2005년 ‘민주주의 증진법’을 제일 먼저 만들었는데 다 북을 고립 압살시키기 위한 법이었다. 반북단체들한테 돈을 줘서 북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을 하기 위한 법이었다.
미국에서 만들고 그 다음에 일본서도 만들었다. 그때 바로 한국에서도 지금 야당이 만들었다. 그게 계속 폐기되다 재작년에 여야 합의로 만들어졌다. 지금 여당인 당시 야당은 북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킨다며 가령 인도주의 지원사업이라든가 이런 걸 포함시켜서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주 잘못된 법이다. 제 나라 인권이나 제대로 챙기지 남의 나라 이름을 빌려서 북한인권법을 만든 자체가 이건 굉장히 미국 같은 제국주의나 패권주의 국가나 할 수 있는, 일본 같은 망나니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이게 한국에서도 있었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지금은 여당인 당시 야당이 함께했다는 것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여러 번 국회에도 가서 이걸 막으려고 했는데 끝내 북한인권 증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이건 한마디로 문재인 정부가 폐기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인권을 정치화시켜서 북을 고립 압살시키기 위한 것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북한 인권을 증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권을 내세워 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중상모략해서 아주 악마화시키는 법이다.
문재인 정부야말로 촛불정신으로 이룩한 정부다. 이런 야만행위는 이 문명사회에서는 없어야 되는 것이 원칙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법을 없앴으면 한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가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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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헌 명예회장은 폐암 판정 이후에도 일상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정전협정 54주년을 맞은 7월 27일 권오헌 명예회장은 6.15남측위원회가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석해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한.미 정상회담과 G20회의가 열렸고, 새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의 일단이 드러났다. 어떻게 평가하나?
■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가 이야기했다. 새 정부는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이룩된 정부다. 그러니까 촛불시민의 뜻을 절대로 명심하고 받아들이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가지 국내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서 박수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일외교안보 문제에 있어서 새 정부가 어떻게 할 것인가다. 예를 들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6.15공동선언, 10.4선언이 다 무시, 외면당했는데, 그것을 다시 복원시키고 이어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미국을 간다는 것이 참 뜻밖에도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물론, 미국에서 아마 빨리 박근혜 정책을 잇기 위해서 초청했다는 것이 첫 요인이 되겠지만 미국을 생각보다는 빨리 갔다. 후보 시절 평양을 먼저 가겠다고도 이야기했는데, 우리 생각이라면 평양을 먼저 가야되지 않나.
문 대통령이 미국에 갈 적에 많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해왔던 단체나 개인들이 이야기했다. “미국에서 올바른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나도 광화문에서 며칠 동안 농성하며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우리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에 대해서 눈치보지 말고 소신껏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 다음에, 핵과 미사일 문제는 미국의 70년 가까운 북에 대한 적대정책, 군사적 압살정책에 따른 자위적 억제력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국가, 주권국가로서 당연하게 자위권이 있는 거고,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핵 억제력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국 정부가 관여 안 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관여를 한다면 미국에 대해서 대북 적대정책을 폐기하도록 조언해주면 핵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나.
다른 한 가지는, 한미연합전쟁연습 이걸 꼭 해야 되는 건가? 이건 이전에 벌써 문정인 교수도 미국에 가서 이야기한 바 있고 또 북에서도 일부 외교관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고, 또 미국의 많은 전문가들이나 활동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전쟁연습 중단과 핵활동 중단이나 임시중단을 동시에 하는 것, 일단은 한미연합전쟁연습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걸 미국에 가서 트럼프와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다. 이걸 주문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게 됐나.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토대로 해서 북핵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북정책을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남북관계는 한미동맹의 종속관계가 된 거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다. 이것은 전도된, 뭐가 바뀐 거다.
첫째, 미국 가서 겉으로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왜 그걸 미국한테 허락받아야 하는 건가.
핵과 미사일에 대해서 ‘미국과 한미동맹을 토대로 제재와 압박을 가해서 해결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거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대화와 제재는 양립될 수 없는 거다. 핵과 미사일은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에 따른 자위적 억제력이기 때문에 미국에서 그걸 풀어야 해결될 문제이다.
대화를 한다면서 제재와 압박을 외교수단으로 쓴다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으로도 안 맞는다. 정말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동등한 자격과 입장, 권한을 가져야 한다. 동등한 자기방어권을 가져야 하는데, 대화한다면서 상대방을 압박하고 제재하면서 무슨 대화가 되느냐.
미국에게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대 정책과 고립압살 정책, 특히 핵 전력이 수시로 드나드는 이런 핵위협 공갈부터 없애야 된다. 그렇게 해야 상대도 맘 놓고 핵을 폐기할 수 있고, 동결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결과 폐기 순서로 간다고 했는데, 어떤 순서로 가든지 제재와 압박 속에서 해결한다는 것은 안 맞는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제까지의 ‘전략적 인내’가 실패했다고 얘기했는데, 그건 사실상 ‘전략적 인내’의 연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천만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세웠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미국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혁명적 발상을 가지고 해도 되는 것이다. 세계 어떤 지도자도 문재인 대통령이 이야기하면 “아, 그렇다” 따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위치와 역할, 이런 권능을 왜 스스로 포기하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한단 말인가. 그래서 “미국에 대해서 할말 하라”, “남북관계에 있어서 미국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핵과 미사일 문제는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 속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미국에게 오히려 제재와 압박, 그리고 적대정책을 폐기함으로써 해결하는 순서를 밟았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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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우려를 표하고 ‘민족자주의 원칙’을 강력히 주문했다. [사진 - 조천현] |
□ 문재인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는데, 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이후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가했고, 최근에는 국회 외통위가 열려 강경화 외교장관 발언이 문제되기도 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참가차 독일을 방문해 거기서 이른바 ‘신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는데, 결국 미국서 한 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다. 이른바 북핵문제에 대해서 국제협력을 요청하고 있다.
그전 정부라면 늘 해왔으니까 그렇다지만, 촛불혁명으로 마련된 신정부라면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 혁명적 발상을 가져야 한다. 민족문제, 통일문제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가지고 해야 한다. 왜 국제사회에 협력을 얻어가지고 해결하려 하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핵.미사일 문제는 어차피 미국의 고립 압살정책 때문에 나온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폐기시키는 방법이 있고, 내부적으로 남과 북이 합쳐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인가 심층 협의를 해야 될 것이다.
외세의 침략을 막는 방어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산으로 둘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이런 대량살상무기는 인류가 폐기해야 하고 전쟁도 없애고 평화스러운 세상을 만들어야한다. 그러나 그건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항상 외세로부터 침략과 간섭을 받을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통일된 조국이라 하더라도 침략적 외세에 대한 방어적 수단은 필요하다.
그래서 지난 번 목요집회서 그 이야기를 했다. 일단은 미국의 핵위협 공갈시대는 끝났다. 이제 미국 자신도 그런 위협에 노출이 현실화 됐기 때문에 다 같이 폐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이것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화를 해야 된다.
미국이 지금 대북제재를 중국에게 압박을 가한다. 만약에 중국이 안 하면 독자제재를 하겠다면서 석유를 금수조치하고 노동자들 송출을 막겠다고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하겠다고 한다. 제3자에 대한 제재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국주의적인 패권주의자들의 침략 근성 그대로다. 미국이 자기들이 일등국가로 살려는 욕망이 있다면 상대방도 주권국가로서의 자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최소한 구성원의 생존권을 지켜야하고 그 나름대로 발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왜 그걸 인정하지 않느냐.
말이 무슨 평화와 안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약소국가에 대한 살인행위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제국주의 시대의 야만행패를 당장 집어치워야 되고, 한국 정부는 이런 야만행위에 동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외무장관이라는 자가 미국이 세컨더리 보이콧을 하는데 한국이 협의 중이라고 했다. 어떻게 감히 외교장관이라는 자가 이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나.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이익과는 전혀 배치되는 행패이기 때문에 이런 외무장관은 당장 파면시켜야 한다.
□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이번 베를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 중에 우리 국민들이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들도 물론 있었다. 그 중에는 7.27를 기해서 휴전선 근처에서의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든가, 10.4를 기해서 이산상봉을 추진한다든가 하는 것은 다 좋은 일이다.
이렇게 되려면 무엇을 해야 되느냐. 남북관계, 통일문제, 민족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외세의 간섭 없이 7.4남북공동성명, 6.15공동선언, 10.4선언 정신에 따라서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한다. 이걸 선언하고 시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기본적인 것이 해결돼야 이산가족 문제도 해결되고 동계올림픽도 함께 할 수 있고 그렇지 남북문제의 주체가 외세의존형으로 된다면 다른 것은 될 수가 없는 거다.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외세와 협의한다거나 허락을 받아서 할 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 자신이 떳떳하게 김정일 위원장과 남북합의를 이행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현재 남북 간에 얽혀있는 것을 완전히 풀어야 된다.
남북정상이 만나는 데서는 자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실 핵도 미사일도 수십조원에 이르는 국방비도 정말 평화와 번영을 위한 사회복지를 위한 데로 다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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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홍경선 선생을 평양 3대헌장기념탑 앞에서 만나 포즈를 취했다. 권오헌 명예회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 중 하나로 이 사진을 꼽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오랫동안 인권.통일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통일뉴스> 현장 사진에 가장 많이 등장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보람이나 아쉬움, 남기고 싶은 말은?
■ 가장 보람있었다면 양심수후원회가 89년에 만들어져 99년 10년만에 비전향장기수를 다 석방해냈다. 양심수후원회 만들 때 비전향장기수가 170여명이었는데 10년만에 다 석방했다.
그 당시에 비전향장기수를 양심수라고 규정한 것 자체가 참 혁명적이었다. 어떻게 간첩들을, 좌익분자들을 양심수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때 내 논리는 이렇다. 수십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의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도 양심수다. 그래서 우리는 석방운동한다. 10년만에 다 석방을 했고, 그 다음해에 63명 비전향장기수를 송환했다.
이때 가장 긍지를 느꼈고. 내 힘이 아니지만 여러 운동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가 10년동안 보수세력에게 젖다 보니까 자기가 당연히 할 소리도 뭔가 자기검열을 하면서 못하는 거다. 현재의 집권여당이 그렇다. 야당시절의 종북 논리에 젖어서 지금 제대로 이야기를 못한다.
예를 들어서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 말 자체를 않고 있고, 북한인권법 문제도 마찬가지다. 옛날 군부독재시절에 늘 이야기 해왔던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양심수 석방하라, 국정원 해체하라, 자주통일하자’ 이런 얘기를 지금 여당이라면 옛날 생각을 해서라도 이제 제 목소리를 좀 내달라.
오랫동안 종북 논리에 젖어서 목소리를 잊고 자기 검열을 해왔다면 이제는 제목소리를 내서 하나하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소신껏 정치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오랜 활동을 해오면서 감사를 표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름 없이 헌신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다. 내가 양심수후원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또 자기가 하는 일을 전혀 밝히지 않게 한 특별한 분들이 있다. 내가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이런 분들은 정말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모른다.
그리고 민가협 어머님들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다. 처음에는 내 자식과 내 가족 때문에 나왔지만 이제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고 모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계속 활동하고 지금도 1030회가 되도록 목요집회를 열고 있다. 어머니들의 소원이 이뤄졌으면, 양심수가 없고 국가보안법이 없고 자주통일 되는 세상이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 통일운동권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은?
■ 운동권도 어떤 측면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글 하나를 써도 그렇고 어디 가서 발언을 해도 그렇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데 이제는 소신껏 이야기를 하고 그것 때문에 감옥에 간다면 떳떳하게 갈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활동하면 좋겠다.
지금 제일 중요하게 일자리 문제라든가, 최저임금 1만원 시대, 언젠가는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시대가 되면 그런 용어 자체가 없어지지 않겠나.
어제도 독일에서 온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이 이야기했다. 이 땅에서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가 구속됐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는 거다. 어떻게 책을 출판하고, 막시즘이라든가 자본론이라는 책을 폈다고 구속될 수 있느냐는 거다.
사드 배치 반대, 그리고 반환 미군기지 오염 제거, 미군이 이 땅에서 물러가게 하는 문제도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어떤 원한이 있어서 갈라진 것이 아니니까, 이제야말로 우리가 같은 동족으로서 아무 원한 없이 함께 웃고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자주통일 시대를 이뤄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인터뷰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내가 최근에 몸이 이러니까 여기도 내세우고 저기도 내세우고 하는데, 나는 건강 때문에 특별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건강과 아무 관계없이 내가 능력이 있는 대로 종전처럼 똑같은 활동하고 싶다. 뭘 계산해서 이렇게 하는 것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그냥 따르려고 한다.
□ 주변에서 돌봐줄 분이 있나?
■ 내 조카가, 누님의 아들딸들이니까 생질인데, 실질적으로 내 보호자가 됐다. 내가 책 내는 것도 그 사람이 책임지고 해야 할 거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책임도 져야할 거고. 그 사람도 자기 할 일도 많은데, 지금도 수시로 다니면서 여러 가지 보살펴주고 있다. 집도 별로 멀지 않다.
많은 회원들이 전화주고 뭘 해온다고 하는데, 너무 감사하다. 관심을 가져주신 회원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여러 회원님들의 뜻에 맞게 내가 열심히 싸워서 이겨낼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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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특별히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밝혔다. [사진 - 조천현] |
□ 남북해외 독자들에게 안부 삼아 하시고 싶은 말은?
■ 지금 몸도 여의치 않고 나라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가고 싶은 데를 못 가고 그렇다. 서울대병원 입원 날짜를 6.15를 지나서 잡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평양에 갈 수 있지 않나 자그마한 희망을 가졌었다.
10년 넘게 남과 북이 서로 오가지 못했다. 왜 같은 땅에 같은 민족끼리 오가지 못하는지. 그래서 북에 계신 반가운 얼굴들에게 인사드리고 싶은 생각이다. 또 해외에 계신 많은 분들이 있다. 전화 주신 분, 와서 쉬었다 가라는 아주 감사한 말씀 해주신 분도 있다.
많은 분들에게 감사말씀 드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똑같은 마음으로 통일조국에 대한 심신으로 열심히 일을 하면 우리 뜻이 이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 같이 건강하고 우리가 힘을 모아서 통일조국을 이뤄냈으면 좋겠다.
특히 북쪽에 비전향장기수로 가셨던 선생님들, 지금 아마 많이 돌아가시고 알기로는 열일곱 분인가 남아있다는 말씀을 들었다. 선생님들 돌아가시기 전에 빨리 가서 제발 뵙고 싶은데 여러 가지 여의치 않아서 안타깝다. 선생님들, 부디 건강하시고 선생님들 생전에 선생님들 평생 염원이 반드시 이뤄지길 간절히 빌겠다.
□ 통일뉴스에도 한 마디 남겨달라.
■ 통일뉴스는 사실 내 사회활동과 아주 직접 관련돼 있다. 아마 통일뉴스에서 보도한 횟수가 누구 못지않게 많았고, 또 통일뉴스는 언론이라는 본연의 임무 말고도 정말 우리민족 전체의 참 염원인 조국통일에 대해 언론영역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가 글을 쓰게 됐고 통일뉴스에서 늘 잘 실어줬다. 지난 10년이 별로 보도할 게 없었던 시대라면 이제야 말로 봇물 터지듯이 통일과 관련된 기삿거리 많고, 궁극적으로 자유스럽게 남북을 오가면서 취재해 북녘 소식, 남녁 소식을 서로에게 전해주는 그런 통일뉴스로 거듭나길 바란다.
통일을 지향하고 활동하는 많은 개인과 단체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줬던 언론사이면서 가장 통일의 큰 주춧돌, 주도적 역할을 한 통일뉴스의 무궁환 발전과 앞으로 그 소원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또 한번 간절히 빌겠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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