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025년 오늘, 어쩌면 영국 1918년 그날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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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성들이 투표권 쟁취해 나라를 바꾼 날

지금 한국 유권자들이 한표한표 나라 바꿀 날

투표는 가장 품위있고 거룩한 방식의 복수다

영국에서 산 세월이 35년이다. 영국 여성과 결혼해 아이 낳고 살며 느낀 점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 아이들은 영국에서 초중고대를 나와, 지금은 다 독립해서 행복하게 산다.

아무리 영국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도, 자주 한국이 그립다. 한국의 문화, 냄새, 심지어 소음까지도 그립다. 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갔다. 그런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번에는 영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문화, 풍경, 심지어 영국의 날씨까지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영국에 있을 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 있을 땐 영국이 그립다.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분명히 '이중감정자'다.

그게 바로 나다. 삶이 힘들고 슬플 땐, 우리는 평화로운 천국을 그리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평화로운 천국에 있더라도, 우리는 이 바쁘고 소란스러운 삶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자, 이제 한국과 영국정치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싶다.

1918년 영국의 부분적 여성 참정권 인정을 부른 서프러제트 운동 시위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투표일은 평범한 시민이 정치인을 해고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정중하게."

최근 차를 마시다 문득 떠오른 역사적 순간이 있다. 바로 1918년 영국 총선이다. 묘하게도, 곧 치러질 한국의 6.3 대선과 겹쳐 보인다. 100년도 더 지난 영국의 선거와 2025년 한국 대선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겠지만 꽤나 깊이 닮은 점이 있다.

1918년 영국의 대반전 "여성, 드디어 투표하다!"

1918년 12월 14일 영국에서 열린 선거는 단순한 총선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불과 한 달,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나라 전체가 '이제 뭔가 새로 시작해야 할 텐데' 하는 분위기였다. 총리는 캐치프레이즈 하나를 던졌다.

"A land fit for heroes to live in(영웅들이 살기에 걸맞은 나라)."

말은 멋졌다. 문제는 실현이 안 됐다는 것이다. 집도 부족했고, 실업률도 치솟았고, 돌아온 전쟁 '영웅'들은 여전히 슬럼가에서 살았다.

정작 이 선거가 정말로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여성들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선거였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한 참정권은 아니다. 30세 이상, 일정 재산 보유자, 혹은 남편이 집주인인 여성만 투표할 수 있었다. 29세 미혼 여성은 투표할 수 없었다. 결국 여성의 절반 이상은 여전히 투표권이 없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여성들이 투표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그 한 표가 세상을 바꿨다.

영국 선거권 확대 과정.

2025년 대한민국 "그 한 표는 아직도 유효하다"

이제 눈을 한국으로 돌려본다. 6월 3일, 대통령 선거일이다. 내란과 탄핵,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의 혼란을 거친 뒤 찾아온 이 선거. 상황이 어지럽다는 점에서 1918년 영국의 선거와 어쩐지 닮았다.

물론, 지금 한국 여성은 이미 투표권이 있다. 하지만 '권리가 있다는 것'과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이, 누가 돼도 똑같지"라며 투표를 포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기억하자. 100년 전 영국 여성들이 "우리에겐 목소리가 있다!"며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 내 아내와 딸은 투표를 못했을지 모른다. 나아가 영국 여성들은 정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용산구 청파도서관에 마련된 청파동 제1투표소에서 관계자가 기표 도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2025.6.2. 연합뉴스

한국 정치, 이제 '고급스럽게 복수'할 차례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 "Vote is the most polite form of revenge' (투표는 가장 점잖은 방식의 복수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이런쯤 될까? "투표는 짜장면 값 오른 것에 대한 고급스러운 복수다."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 공약은 넘치고, 말은 많지만, 실현은 미지수다. 그 모습이 마치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보리스 존슨 보수당 의원이 "EU에 매주 3억 5000만 파운드를 보내지 않고 공공의료(NHS : National Health Service)에 쓰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보리스 존슨이 브렉시트 후 총리가 되고나서 그 돈 어디 갔는지 지금도 다들 궁금해 한다.

유권자의 상상력, 그게 진짜 '정치력'

1918년 영국 여성들의 투표는 단지 법으로 얻은 게 아니다. 총알과 포탄이 떨어지던 시절, 그들은 가정을 지키고, 공장을 돌리고, 간호하며 세상을 버텨냈다. 그 무게를 알고 있는 의회는 마침내 그들에게 투표할 권리를 줬다.

오늘날 대한민국 유권자, 특히 젊은 세대와 여성들은 이미 '정치의 주체'다. 이에 대한 BBC 보도는 주목할 만하다. "South Korea elections: They helped oust a president. Now women say they are invisible again. (한국 총선: 대통령을 쫓아낸 그들. 이제 여성들은 "우리는 다시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유튜브에서,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정치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물어야 한다.

"이 후보가 정말 내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5년 뒤, 내가 다시 투표하고 싶게 만들 사람은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한 조각의 영국식 냉소주의

영국에서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정치인을 무작정 믿지 않는 태도도 민주주의의 일부"라는 점이다. 정치인은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실망시켰을 때, 그들을 단칼에 교체할 수 있는 힘은 유권자에게 있다. 1918년 총선에서 압승한 로이드 조지 총리도 1922년, 민심에 밀려 물러났다. 민주주의는 실패를 허용하지만, 무관심은 허용하지 않는다.

6월 3일, 짧은 산책 한 번 어떤가? 100년 전, 영국여성들은 싸워서 투표소에 들어갔다. 지금 우리는 그냥 걸어가면 된다. 그 짧은 산책길 끝에서, 2025년 대한민국은 어쩌면 1918년 영국처럼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날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투표하자. 민주주의는 늘 한 표에서 시작한다. 고급스럽게, 점잖게, 그리고 단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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